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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Feb 17. 2024

119 구급차를 탄 남편

어느 외국인의 구급차 탑승기

친정 엄마가 집에 오기로 되어있던 어느 주말 아침, 나는 새벽같이 산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유일한 취미생활이자 운동인 트레일러닝을 즐기러 주말 아침이면 산에 갔다. 그 시간만큼은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몇 시간을 뛰고 오든 본인 자율에 맡겼지만, 그 날은 달랐다. 장모님께 맛있는 파스타를 해주겠노라 호언장담을 해놓고 나갔기 때문이다.


오늘의 셰프가 생각보다 늦는다 싶어 살짝 신경이 거슬릴 때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본인도 점심식사가 늦어질까 똥줄이 좀 타기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장모님이 어디쯤 오시는지 아냐는 둥, 열심히 뛰어 내려가고 있다는 둥 하며 내 눈치 보는 소리를 하겠거니 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휴대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편의 것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119 구급대원입니다. 남편 분께서 부상을 당하셔서 지금 OO병원 응급실에 와 있는데요, 병원 접수 때문에 필요한 인적사항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

갑자기 모든 소음이 멀게 느껴졌다. 두 손이 떨렸다.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 듣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첫 번째는 둘째 출산 직후 들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슨 정신으로 질문에 답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문답을 마치고 정신력을 끌어 모아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많이 다친 건가요? 지금 어떤 상탠가요?”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쪽으로 오셔서 의료진과 말씀 나누세요.”

아, 전화로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구나. 어쩌면 의사소통이 불가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건지도 모르겠다. 구급대원이 대신 전화를 건 것을 보면. 나는 어떤 불운을 예감했다. 역시, 불행은 이렇게 느닷없이, 꺾인 골목길에서 끝에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입원 시 필요한 물건들을 서둘러 챙기기 시작했다. 수건, 속옷, 휴지, 생수... 또 뭐가 필요하려나. 열심히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는데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KKK”     

???!!? 이것은 우리 사이의 “ㅋㅋㅋ”. 틀림없이 그 사람이 타이핑한 건데.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당장 통화버튼을 눌렀고, 그가 아주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산에서 다쳐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간 것은 맞는데,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불구가 될 가능성도 없단다. 예감이 틀려서 이렇게 기쁠 때가 또 있을까! 일단 마음을 쓸어내리고, 하늘에 감사했다. 그다음엔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이렇게 맨 정신이면 직접 연락을 할 것이지, 왜 구급대원이 소식을 전하게 해서 날 놀라게 하는 거얏! 이게 재밌어?!”

당장 응급실로 달려가 다쳤다는 다리를 꼬집어주고 싶었다.     


때마침 도착한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맡긴 뒤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어떤 초췌한 몰골의 외국인 하나가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앉아 있었다. 발에는 붕대를 감고, 얼굴에는 반갑고 민망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안심하는 미소를 띠고서. 베시시. 저 꼴이 귀여워 보이는 건 또 뭐람. 얼굴을 보니 마음이 탁 놓였다. 다행이야.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편은 산 정상에 올라 잠시 앉아 쉴 곳을 찾다 어이없게 발을 접질렸다고 한다. 사고는 이렇게 방심했을 때 발생한다나. 다치자마자 예삿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절뚝거리며 바로 하산을 시도했으나, 통증이 심해지고 발도 점차로 부어올라 신발을 벗기에 이르렀고, 결국 구조대의 도움을 청했다고. 그렇게 산악구조대 X 119구조대 콜라보로 남편은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구조대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 네가 걱정할까 봐 알아서 다 처리하고 집에 가려고 했어. 그래서 연락을 안 했어. 그냥 발을 삔 것뿐이니까. 근데 나한텐 신분증도 없고 카드도 없더라. 그래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

타국에서 병원신세 지는 것이 가장 서러운 일 중 하나일 터, 문자 그대로 가진 것 하나 없고 한국말도 서투르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아이고... 이 짠한 양반. 안아주고 싶단 생각이 드는 그때 남편이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근데, 한국 119구급차 정말 쾌적하고 좋더라. 이렇게 앉았는데 의자가 자동으로 지익- 올라가면서 내가 차 안으로 쏙 들어갔어. 내부도 완전 최첨단에 깨끗하고, 대원들도 친절하고.”

등짝을 한 대 후려쳐야 할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말로만 한 대 때렸다.

“여보, 그렇게 좋으면... 또 타^^”

남편은 그렇게 한 달간의 목발 라이프를 시작했다.   



*산악 구조대원 여러분과 119 구급대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 글은 좋은생각 2023년6월호 vol.377에 실렸습니다.

*2021년 브런치에 올렸다가 놀라운 조회수를 기록해서 놀란 마음에 실수로 삭제했다가 다시 올립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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