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나`이면서 엄마일 순 없는 걸까?
"우욱-!"
"어머, 너... 설마?!"
아침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여자 주인공은 난처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통을 붙잡는다. 뜻밖의 임신 사실은 은유적인 구역질로 통용되어 왔다.
나에게 입덧은 그것보다는 좀 더 무겁게 다가오긴 했다. 왜냐하면 보통 친정 엄마의 입덧 양상이 그대로 유전된다고들 하는데 우리 엄마는 출산 직전까지 입덧으로 고통받았고, 임신 기간 중 도리어 살이 빠졌으며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음식은 콜라였다.
나는 그렇게 나쁜 딸이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렸을 땐 난 절대 임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열 달 동안 입덧하면서 살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란 이런 것일까?
나도 모르게, 임산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 길을 모색한다고 임산부 배지라는 완장을 차게 되자마자 나는 호텔 뷔페부터 예약했다. 보통 입덧은 임신 6~7주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병원에서 나는 5주 차 햇병아리 임산부라고 했기에 그전에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이어트는 다 접어두고 행복하게 모든 걸 먹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먹으려고 하니 먹고 싶은 게 딱히 없었다. 그저 마치 도살장 앞에 선 맑은 눈망울의 황소처럼 나는 임신 6주 차를 기다렸다.
와라, 입덧이여.
내가 어쨌든 온몸으로 너를 견뎌보겠다. 그땐 돈키호테 같은 용기가 불쑥 튀어나왔었다.
"속이 너무 안 좋아."
"근데 이렇게 먹어도 괜찮아?"
"먹어야, 좀 나아."
나의 입덧은 엄마와 조금 달랐다.
그랬다, 먹덧이었다.
임신을 하고 나서야 입덧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입덧은 말 그대로 그냥 '입덧', 여기서 구토를 동반하면 '토덧', 먹어야만 구역감이 줄어들면 '먹덧', 양치할 때마다 구역감이 드는 건 '양치덧', 체한 느낌이 들면서 구역질이 나면 '체덧'... 구역감을 일으키는 종류에 따라 입덧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중에서 나에게 내려진 입덧은 '먹덧'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음식이나 무작정 먹히는 것도 아니었다. 계피맛 오레오 쿠키와 밀크셰이크, 이 두 가지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뭔가 먹기만 하면 바로 체한 느낌이 동반되는 '체덧'이 이어졌다. 먹어야만 살 수 있었지만 먹는 것이 동시에 고통인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임신 당시에는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달달한 걸로만 연명하다 보니 무섭도록 빠르게 몸무게가 증가했다.
그것은 퍽 슬픈 일이었다. 이 뱃속에서 생명이 자라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즐겁게 먹어서 찐 살이라면 그러려니라도 할 것이다. 버티기 위해 억지로 먹었을 뿐인데 살도 빠른 속도로 쪄버리니 야속했다.
그런 데다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인터넷상에서 임산부들끼리 얼마나 살이 덜 쪘는가에 대한, 괴상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12주 차인데 1kg 쪘어요. 저 잘하고 있나요?’
와 같은 질문 글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가 달렸다. 적정 체중 증가량 범위 안에 있거나 덜 쪘으면서도 걱정을 위장한 자랑을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것은 내 마음을 더욱 짓눌렀고 체덧을 가속화하는 것 같았다.
입덧은 흔히 뱃멀미의 느낌에 비유된다. 나는 배를 타본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과음한 다음날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성을 갈아치워야지, 차라리 개가 되겠어,라고 자조적인 반성을 하며 숙취해소제를 찾았었다. 그러면 비로소 그 역겨운 구역감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입덧은 하루 종일 숙취가 심한 날의 연속이다.
임신을 하게 되면 술을 마실 수 없게 되는데, 임신 준비 중일 때는 그 부분이 두려웠다. 술은 나의 동반자인데, 네가 없는 삶은 적적하고 외로울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이게 웬걸?
술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반성하던 지난날들의 날을 모두 이어 붙인, 임산부로서의 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금주는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다.
임산부로서의 삶은, 특히 입덧의 무게는 상당히 묵직했다. 모성보호시간을 써서 2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었음에도 벅찼다. 퇴근하는 길, 차 안에서 나는 숨겨왔던 구역질을 몰아서 하곤 했다. 드라마 속에서 보던 우아한 '쭈욱' 따윈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약간 돼지 멱따는 소리와 유사한 '꾸에에엑' 같은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일터의 화장실에서 해결하자니 민망했다.
그런 날들이 쌓여가자 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여러 의미가 담긴 눈물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더 지독한 입덧을 열 달 동안 겪었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견뎠던 걸까? 난 이것조차 견디기 힘든데 아직 엄마가 되기엔 부족했던 것 아닐까?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구역감이 없으면 또 불안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걸까? 입덧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면 유산 전조증상이라고 하던데.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의 꼬리 마지막에는 억울함으로 점철되었다.
근데 왜 나만 고통받아야 해? 왜 남편은 정자만 제공하고 아무것도 겪는 게 없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의 직장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에 최적이었지만 점점 더 버티기 어려워졌다.
사무실에 직원은 실장님 포함 달랑 4명.
이 중 2명이 이미 육아 시간을 쓰고 있었던 터라 실장님은 나의 조기 퇴근을 은근히 못마땅해했다. 사무실에 직원이 절반 이상 없는 1~2시간이 싫었던 것이다. 한 번은 회식 자리에서
“임신하면 살찌고 못생겨져서 남편 사랑 못 받아”
와 같은, 되지도 않는 말을 하며 나의 임신 사실에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나는 계획보다 일찍 휴직을 하기로 결심한다.
일하면서 소득을 올리는 것이 내 존재 이유였고 때로는 삶의 보람이었다. 그래서 전쟁 같은 직장 생활을 입술 꽉 깨물고 버텨왔다. 쉬고 싶지만 참았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노동하는 인간이 가치 있으니까.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임산부에게 이러한 자아효능감은 때때로 꽤 사치였다.
엄마가 되기 위해선 그 이전에 '나'라는 존재가 점차 사라져야 했다. 그때 당시에는 모든 게 다 힘들었기에 그냥 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알약을 잘못 삼킨 것처럼 씁쓸했다.
'나' 이면서 동시에 '엄마'일 순 없는 것일까?
임신의 첫 관문, 입덧이라는 왕관의 무게는 그렇게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