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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30. 2022

PART 2. 중독자의 항변

상처받은 자아의 숨통이 된 중독

중독자는 자신의 변명 안에서 달콤한 위안과 씁쓸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 쇼핑중독 역시 위안과 행복감이 일시적이다. 짜릿한 행복감은 쇼핑백에 담긴 물건이 옷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쇼핑백이 필요한 상태로 필요한 상태로 재부팅된다.  


다음 날 아침 회사를 스치듯 지나 매장으로 직행하는 순간까지 머리에는 전날 사지 못한 옷들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가 내 몫으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에 사로잡힌다. 매장에서 망설이다 사지 못한 옷이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얼굴에 웃음이 만개한다. 옷을 다시 입어 보고 거울 속에서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는 나를 위해 기꺼이 카드를 내민다.     


그때 거울 속의 나는 과연 진짜 행복했을까. 거울 속 ‘나’가 거울 밖 ‘나’를 위해 내키지 않지만, 가엾은 마음에 웃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10대와 20대는 완전무결한 자기 비하 결정체였다. 콤플렉스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굳어져 때로 “너 사회생활은 할 수나 있겠니?”라며 자문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시절 나는 쇼핑중독자였던 30대보다 더 병들어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난 열패감에 사로잡혀있었다. 


높은 지능지수의 오빠, 그보다 더 잘난 엘리트 사촌오빠들, 예쁜 얼굴과 그보다 더 찬란한 미래를 앞둔 동생뻘 나이의 조카들. 나는 집안에서 두뇌, 외모, 학업, 모든 측면에서 늘 서열 최하위였다. 환영받지 못하기는 친가뿐 아니라 외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내 얼굴, 더 정확하게는 까맣고 보잘 것 없는 내 얼굴만 보면 늘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도 나만 보면 하시던 외할머니 말이 귓가를 맴돈다. “괜찮다. 내가 절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결혼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야.” 손녀 얼굴이 여자로서 한참 부족하지만,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면 결혼할 남자 하나쯤은 어디 있을 거다, 라는 이런 뉘앙스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손녀인 내가 아닌 외할머니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말처럼 들렸다. 


엄마도 내 자존감 성장 지체에 크게 한몫했다. 엄마는 조카들을 비롯해 늘 잘난 누군가의 자식 얘기를 내 앞에서 늘어놓아 나를 절망하게 했다. 엄마는 지금도 할머니랑 자신이 언제 그랬냐며 내 기억이 잘 못 됐다고 항변한다. 그러다 결국 외할머니는 원래 다정다감하지 않은 냉정한 성격이고 본인 그냥 그 자식들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나와 비교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될 말인가. 나는 늘 주변에 무수히 많은 잘난 누군가와 비교당했고. 특히 외할머니는 손녀 외모에 대한 실망감을 늘 아주 강력하게 피력하셨다.


내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깊다. 상처 위에 두꺼운 딱지가 앉은 채로 있다. 딱지가 떨어져 새살이 돋지 않아 언제 딱지가 떨어져 다시 피와 고름이 나올지 모른다. 그나마 쇼핑을 통해 옷을 사들이면서 피고름으로 뒤덮인 마음의 상처를 딱지로나마 덮을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사들인 옷들은 염증으로 고름이 생기다 못해 썩어 들어가려는 마음의 상처를 가라앉혀준 항생제 역할을 했던 듯하다.


자기 비하에 휩싸이면 나 자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눈과 뇌에 감지되는 것은 오직 타인의 말과 시선뿐이다. 모든 시선은 나를 안쓰럽게, 무시하듯 바라보고,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나의 못남을 묘사하는 단어들의 나열로만 들린다. 


쇼핑중독의 늪에 빠져보지 않았어도, 실수 없는 삶을 사는 ISTJ일지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자아감이 주는 일상이 순간순간 얼마나 절망감을 주는지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랜 시간 강박구매와 관련 연구를 해온 광고 및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자 Ronald J. Faber는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에 의해 야기되는 불쾌한 감정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일부 개인은 행위에만 전적으로 집중함으로써 주의를 협소화한다.”라는 중독자들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 * ** 


자기에 관한 부정적 개념에서 잠시나마 탈출하려는 노력으로 ‘인지적 협소화’가 이뤄지면 이성적 판단 능력이 함께 마비된다. 찰나의 웅대감에 도취한 중독자들은 옷걸이 걸린 옷들이 마치 나만을 위해 준비된 만찬으로 여기고 기꺼이 자기 몸과 카드를 내맡긴다. 숍 매니저들의 정중하고 친근한 인사가 귓가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순간적으로 압착된 부정적 자기개념이 원형을 회복해 뇌를 꽉 채우지만, 새 시즌 상품으로 업로드된 물건들로 꽉 들어찬 매장에서 인지 재부팅은 실행될 수 없다.    


* Faber, R. J.(2004). Self-control and compulsive buying. In T. Kasser & T. Kanner (Eds.), Psychology and consumer culture: the struggle for a good life in a materialistic world (pp. 169–189). 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 Sunghwan Yi. Shame-Proneness as a Risk Factor of Compulsive Buying. Journal of Consumer Policy volume 35, pages393–4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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