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단군신화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재위:1122~1146) 때의 문신(文臣) 김부식이 지은 역사책이다.
삼국사기는 단군신화가 실린 일연스님의 삼국유사(1281~1283 무렵)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사료이다. 인종의 명에 의하여 1145년 국가적 지원으로 편찬했다고 하는데, 편찬 날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가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 정도 앞서서 편찬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단군신화의 존재만이 인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동천왕 때 수도를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하는데, 여기에 “ 평양이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살던 곳이다. 혹은 왕이 왕험(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고도 한다.” 는 기록을 덧붙였다.
김부식이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의 “위만이 왕이 되어서(王之) 왕험에 도읍하였다(都王險)”를 잘못 기재한 것인지, 단군신화와 사기 조선열전을 짬뽕해서 교묘하게 왜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채호는 이 점을 지적하며 김부식을 비난했다.
현재 역사학계는 김부식이 위만조선의 역사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학계에서 삼국사기에 단군신화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데, 선인 왕검이 왕험에 가서 도읍하였던 위만이 그 후에 왕험에 가서 도읍하였던, 선인왕검(仙人王儉)이 본래 평양에 살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평양에 살았던 것을 도읍한 곳으로 생각하면 단군신화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잘못된 추정이다.
삼국유사가 단군신화로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비해,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부터 후삼국 사이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되는 고조선과 삼한의 역사가 빠져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왜 단군신화를 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진실은 알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에서 선인 왕검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김부식이 단군신화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같은 시대인 고려 후기 삼국유사와 유학자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에도 등장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설령 내용만 몰랐다 하더라도, 140년 정도 역사 빨랐다고는 하나 국가의 방대한 자료를 활용한 김부식이 개인으로 자료를 수집한 일연 스님이나 이승휴보다 수집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인종의 명령으로 뺐을까, 아니면 김부식의 자의였을까. 왕이 굳이 콕 찍어 단군신화를 빼라고 지시할 이유는 없으니, 김부식의 자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고 편찬을 지시했던 인종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유야 어쨌든 인종과 김부식이 한국사 2,000여 년을 빠뜨릴 뻔한 큰 실수를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난 역사를 굳이 복기하여 기록하는 것은 자국(自國) 역사의 뿌리를 찾고, 역사를 기억해 미래의 지표로 삼기 위해서이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한반도에 고려 역사의 뿌리가 되는 한민족 역사는 있었고, 따라서 고려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단군신화가 담긴 고조선을 넣어야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삼한의 역사라도 넣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일연스님이 스스로 삼국유사를 쓴 데 비해, 김부식은 왕의 명을 받고 국비(國費)로 삼국사기를 썼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 했다.
학자들 간에는 김부식이 공자의 정신에 따라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 怪力亂神)' 혹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있는 것을 그대로 적지, 괴력이나 용력과 이해가 어려운 귀신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의미로 역사 기록에 충실하여 단군신화를 뺐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같은 시기의 유학자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신화를 실었으니 아쉽다.
또한 이야기 속에 신화나 전설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역사적 가치 자체를 부정해 정사(正史)가 아니라며 버리는 것은 과오다. 흔히 야사라고 불리는 이야기들은 당대 민중들이 인식하던 역사를 필터링 없이 그대로 담았기에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 있으며, 힘과 권력에 짓밟힌 민중들이 사실을 신화화, 설화 화하거나 연도를 바꾸어 우회적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만큼 사실이 더 많이 담겼을 수 있다. 역사가 권력자들에 의하여 왜곡 기록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주석(註釋)이 달려 있긴 하지만 신화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신화적 요소가 있다고 하여 뺏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국 김부식의 성장 환경을 볼수 밖에 없는데, 그의 가문이 정계에 진출한 것은 아버지 때 부터였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최고의 문장가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를 포함한 아들 4형제는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박학다식 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사대주의 유학자로서 중앙 정계에서 벼슬을 하며 입신양명하였다. 이로 보아 성장 과정에 편모슬하였지만, 생활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단군신화의 전승 과정을 보면, 전제 통치시대의 왕조(王朝)와 기득권 권력층들이 단군신화와 고조선을 왜곡하고 실전시켰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김부식의 행적 또한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아마도 중국 유학 및 유교와 교종불교의 전래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는 불교 교리의 중심사상과 맞닿아 있고, 특히 불교(佛敎)의 참선, 수행에 반영되어 불교 문화의 일부로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 삼국시대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유래와 교종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언제 어떤 경로로 선종이 들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적으로 교종(敎宗)은 불교 교리를 중심으로 한 깨달음을 더 중시하는 교파로 보면 되고, 선종(禪宗)은 참선과 수행을 중심으로 한 깨달음을 더 중시하는 교파로 보면 된다. 교종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 교리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권력층과 가깝고, 선종은 참선과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에 대중과 가깝다. 비유하자면 조선 시대 양반들이 쉬운 한글보다 한자를 사용했고, 민중들은 어려운 한자 대신 쉽게 깨우칠 수 있는 한글을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다.
불교 특히 선종불교의 참선과 수행은 신선도(神仙道) 혹은 선도(仙道)라는 한국 고유한 신교(神敎, 수두교)의 가르침인 참선수행(參禪修行)과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선종은 중국 선종과 한국선종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선종(中國禪宗)은 육조 단경의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데 '화두(話頭)'를 중심으로 하는 참선 수행이고, 한국선종(韓國禪宗)은 고조선의 종교인 신교(神敎)의 수행법인 선도(仙道) 혹은 신선도(神仙道)에서 비롯된 미륵선도(彌勒仙道)로 부터 시작되는데 정신 집중을 중심으로 하는 참선 수행이다. 달마대사(?~495, ?~528)가 소림사 무공을 창시하였지만, 신선도(神仙道) 혹은 선도(仙道)의 참선수행은 이미 무공을 포함하고 있었다.
신교(神敎)와 불교(佛敎)가 결합한 미륵불교(彌勒佛敎)가 한국선종의 하나이다. 한국역사에서는 한국선종을 찾아볼 수 없고, 종교역사로 보면 미륵불교의 근원으로 미륵선도와 역성혁명으로 고려에 나라를 빼앗겼던 태봉의 궁예가 믿었던 미륵선도의 이단인 미륵신앙을 예로 들 수 있다. 미륵선도를 근원으로 하는 미륵불교는 신라의 화랑도, 백제의 무절, 고구려의 선인 등 낭가(郞家)의 맥으로 거슬러 올라 가고, 뒤로는 조선의 선가(仙家) 및 도가(道家)의 맥과 현대 단학(丹學)과 활법(活法)' 선무도(禪武道,仙武道) 등의 불교 무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 참고로 불교를 인도 석가모니가 창시했다곤 하지만, 불교 중에서도 교종불교에 속하며, 정작 인도의 국교는 불교가 아니다. 불교의 시원이 고조선이라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있는데, 특히 선종 불교와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고조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사찰의 삼신각(삼성각)에 모셔져 있는 단군상과 대웅전, OO암 등의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된다.
고려 초기의 불교는 교종이 우세했다. 그래서 교종 승려들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고, 6대 성종(981~997) 때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해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제의 기틀을 세우면서 문신(文臣) 출신의 문벌귀족들의 힘이 강해졌고, 척신세력들과 함께 강력한 양대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김부식은 개경파 문벌귀족으로 권력을 누리며 교종세력과 대립했다.
인종 때 인종의 외할아버지 이자겸은 둘째 딸을 인종과 혼인시켜 인종의 장인이 되었고, 1222년 예종이 죽은 후 자기 집에서 성장한 14세의 인종을 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척신으로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그 후 다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일 경우 실권이 축소되는걸 막기 위해 셋째딸과 넷째딸을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자신의 친족은 물론 사돈인 무신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을 병부상서로, 아들 척순을 내시로 궁에 넣고, 아들인 승려 의장을 수좌로 삼아 교종 불교계(敎宗佛敎系)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등 궁을 장악하여 마치 왕처럼 행동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인종은 측신을 보내 척준신과 척순을 죽인 다음 시체를 내다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 그리고 의장이 이끄는 군대와 승군(僧軍)이 쳐들어와 궁을 불태우고, 인종을 이자겸의 집에 연금시켰다. 이를 이자겸의 난(1126)이라고 하는데,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인종이 양위조서를 내렸으나, 이자겸은 양부로서 눈치가 보여 사양했다. 그만큼 고려시대 불교세력을 등에 업은 척신세력과 문벌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했다.
어느 날 이자겸은 도참설에 기반한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소문과 동요를 듣게 되었다. 이 소문과 동요는 이씨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이에 이자겸은 자신이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넷째 딸을 시켜 인종에게 독이 든 약을 먹이려 했는데 딸이 일부러 넘어져 실패했고, 다시 독이 든 떡을 주었는데 딸의 도움으로 인종이 떡을 까마귀에게 대신 먹여 실패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를 이간시키고, 천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자겸의 딸들은 폐비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귀향을 갔고,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척준경은 이후 권세를 누렸으나, 서경파 정지상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고, 개경파 김부식이 이자겸의 뒤를 이어 개경파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자겸의 몰락으로 교종불교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개경파는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 있는 교종불교 세력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1107년 대각국사 의천이 선종과 교종을 융합한 천태종(天台宗)을 찬종하면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고려 국내에서 선종이 일어났다는 것은 선종의 힘이 커지면서 교종과 선종간의 세력 다툼이 심해졌다는 뜻이며, 이와 함께 대중들의 인식이 선종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족이 금나라(1115)를 세워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쫒아버리는 등 위세를 떨치며 외교적인 압박을 하고 있었으며, 몽고족들이 남하하면서 여러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며 세를 키우고 있었다. 북방의 이런 변화는 국내에 큰일이 일어날 징조이기도 했다.
서경에서 태어나 인종 때 왕실 고문까지 올랐던 승려 묘청이 몰락한 서경파 문벌귀족들의 선두에 서서 서경천도·칭제건원·금국정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묘청의 난(1135)이라고 하는데,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이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한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아 선종 출신의 승려로 추정된다.
묘청이 선종승려라 추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반란에서 묘청이 서경파의 선두에 선 이유가 교종과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종과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면, 단순히 서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유학자들의 문벌귀족이었던 서경파의 선두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황으로 보아 아마도 서경파와 묘청의 선종 세력 vs 개경파와 교종세력이 각각 편을 이루었던 것 같다.
묘청의 난에 대해 인조가 묘청과 서경파를 이용해 비대해진 개경파를 견제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묘청이 유교의 사대주의를 몰아내고 불교를 통해 국격을 찾으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기존 역사학자들의 견해이고, 후자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견해인데, 신채호는 민족주의학자들 편에 서서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기존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틀린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개경파를 물리친다 해도 서경파나 불교 선종 세력이 득세하니 왕권의 입장에선 마찬가지이고, 묘청이 선종이라면 민족주의적인 입장일테니 신채호의 주장인 후자가 옳다고 생각된다. 결국 인조가 묘청의 선종세력과 서경파 & 교종세력과 개경파의 세력 다툼을 이용해 '이기는 편 내편' 작전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개경파 문벌귀족의 힘이 더욱 강대해졌고, 선종세력은 상대적으로 힘이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개경파 문벌귀족의 힘이 더욱 강대해졌다는 것은 기존의 종교세력이었던 교종세력이 선종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계속 강세를 유지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묘청의 난 당시 묘청이 서경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의 내란 상태까지 이르렀고, 문벌귀족 사회 아래 축적되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고려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가 이 시기에 종말을 고했다. 삼국사기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왜 단군신화를 뺐을까?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짐작해보자.
고려는 왕건이 918년 주군이었던 태봉의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고 세운 불교국가였는데, 전술했던 것처럼 성종 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도입했고, 인종 때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태평성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유교 사회의 문제점은 왕과 문벌 권력 또는 문벌 권력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이는 조선의 사대부로 인한 당파싸움을 거쳐 현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악습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서 단군신화가 빠진 이유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불교를 권력 투쟁에 이용하였던 왕과 문벌권력들이 만든 유교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였다. 아마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된 김부식은 이런 문제점들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학계에서도 인종이 김부식을 시켜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를 "유교 정치로 생겨난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역사학자들은 인종이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한 이유가 '교종 불교사회에서 유교 사회로 바뀌면서 생긴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점을 가리고 현실 비판과 역사 정리를 통하여 떨어진 자존감을 찾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불교를 배격하고, 고조선 역사를 제외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① 전술했던 것처럼 불교 특히 선종불교는 그 근원이 고조선과 맞닿아 있어 삼국사기에서 배척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고려의 전신이었던 태봉의 미륵신앙이 선종불교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역시 고려사에서 배척을 받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② 묘청이 선종이었다는 가정하에서 보면 민중을 선동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지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대주의에 반한 것이니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또한 선종은 전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귀족 종교였던 교종과는 달리 민중종교였다. 전제왕조국가의 문벌귀족사회에서 민중의 깨달음은 통치에 독(毒)이 된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③ 당시 김부식은 교종불교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의 중심에 섰고, 묘청의 실패로 교종이 더욱 활발해진 것 또한 이유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사실 삼국유사에 불교적 색체가 가미 되었다고는 하나, 곰이 사람이 되는 단군신화의 내용과 같은 신이한 이야기는 선종불교의 색체이다. 따라서 별로 부족함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사대주의 유학자로서 성공하여 승승장구하며 권력욕에 불탔던 김부식의 입장에서 선종불교 색체가 짙은 단군신화가 마뜩치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을 입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증후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태봉의 궁예는 교종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골품제를 증오하였으며, 고려는 태봉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대신 신라 경순왕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장인 사위의 관계가 되었고, 고려 초기는 미륵선인신앙과 미륵불교의 변종인 태봉의 미륵신앙 등의 선종불교 대신 교종불교를 선택하였다.
둘째로 고려는 개국(918) 이후 120여 년 동안, 즉 묘청의 난 이전까지는 문벌귀족과 교종세력 중심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국력과 위세를 뽐냈고, 묘청의 난 당시 유교 사회의 문제로 잠시 국운이 기울며 선종이 잠시 빛을 보았으며, 묘청의 난 이후 문벌귀족과 교종세력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면서 국운이 기울고 있다.
셋째로 교종불교 사회에서 삼국사기를 썼던 김부식은 단군신화와 불교를 배격했지만, 다른 유학자들이 쓴 제왕운기는 물론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지리에는 단군신화가 등장하고 있다.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등은 유학자들이 무신정권(1170)이 들어선 이후의 선종 불교사회에서 쓴 책이다.
단군신화가 삼국사기에는 실리지 않고, 140년 뒤 삼국유사에 실리는 이유는 이런 사실들 외에 단군신화와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의 이야기를 통하여 좀 더 심도깊게 접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