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와 한국고기
한국고기는 기원전 역사의 고대 한국시대인 고조선 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신화'설화' 민화 등을 기록한 책이다.
고대 한국시대에 글자가 없어 역사'신화'설화'민담 등이 구전으로만 전해져왔고, 지금 전해지는 한국고기는 구전을 집필 혹은 편찬한 책이라는 것이 한국사의 정설이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한국고기는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에 해당하는 사찬사서(私撰史書)들에 실려있고, 그것마저도 대부분 구전을 집필 혹은 편찬한 사람들이 없는 이야기를 마치 구전되어 온 것처럼 허구로 꾸며 만든 창작물로 규정하여 위서(僞書)로 인식하고 있다.
야사로는 한자로 된 한자 및 한글로 재구성된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紀)' 진역유기(震域游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환단고기(桓檀古記)' 부도지(符都誌) 등의 한국고기가 있다.
단군신화와 관련있는 역사책으로 정사로는 고려시대에는 한자로 된 삼국사기' 조대기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된 응제시주(應製詩註)'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 등과 조선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조실록' 세종실록' 정조실록' 고종실록' 조선시대 말기의 한자로 된 동사(東史) 등이 있다.
정사에는 단군과 고조선의 존재 사실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야사는 민간에서 개인이 저술한 역사 즉 사찬사서를 뜻한다.
야사에서 단군신화를 다룬 부도지' 환단고기' 산해경' 삼황오제본기 등의 사서는 단군신화 해설을 시작할 때 따로 설명하고, 먼저 그 외 단군신화를 다룬 사서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역유기(1675년대)
고려말 이명이 지은 역사책으로, 고려 초 발해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쓴 역사서이다.
조대기가 실제했던 고기임이 세조실록 등의 정사를 통해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는 실재했던 가능성이 큰 정사라 할 수 있지만, 진역유기와 조대기 책 자체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학계에선 정사로 보지 않고 야사로 보고 있다.
(2) 제왕운기(1287)
고려 후기 문신 이승휴가 원 간섭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률시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 시(詩) 겸 역사서이다.
하권은 단군의 전조선'기자의 후조선'위만의 찬탈' 삼한을 계승한 삼국과 후삼국이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을 담고 있고, 상권은 같은 시기의 중국 역사를 담고 있다. 역사 시에 해당하는 역사 서임으로 사학계에선 정사로 보지 않는다.
제왕운기의 기록은 대체로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환웅의 이름을 단웅(檀雄, 壇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호랑이와 곰의 설화는 없고, 단웅의 손녀가 약을 먹어 사람으로 변한 뒤 단수신(檀樹神)과 소통하여 낳은 것이 단군(檀君)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손이 모계로 이어진 특이한 사례이다.
또한 뒤이어 부여와 비류국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단군과 부여, 고구려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관계로 보았다.
「 ~ 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자로 갔을 때 요하 가에 있는 노변(路邊)에 무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부여 부마(駙馬) 대왕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또 가탐(賈耽)은 "큰 평원의 남쪽의 압록(鴨綠)은 모두가 부여의 옛 땅이니 북부여란 것은 마땅히 요하 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 개국(開國)은 대개 후 조선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명본기(東明本紀)에서 적기를,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 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라고 하였다.
(3) 규원사화(1675년, 숙종2년)
북애노인이라는 노인이 쓴 역사책이다. 전술했던 사찬사서 진역유기를 참고해서 썼기 때문에 기존 사학계에서는 사찬사서로 분류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단군신화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며, 단지 후미에 만설(漫說)이라 하여 우리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며,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 점이 차이가 난다.
세 가지 조건으로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는 지리(地利),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인화(人和),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보성(保性)을 들고 있는데, 인화와 보성은 현대에도 필요한 조건이다.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를 국가역사로 인정하면서도 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의 입장에서 쓰진 종교역사로 깎아내리면서, 다만 상고사의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보다는 한국 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민족적 역사 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사실 단군신화는 기자조선이 아닌 단군조선을 이야기하기 위한 신화이고, 따라서 중국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을 한국역사로 보는 사학계의 입장이 이치에 맞진 않지만, 단군신화를 종교역사로 본다면 기자조선 역시 단군조선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에 포함되긴 한다. 그러나 종교역사를 폄하하는 차별적 시각도 옳지 않고, 굳이 단군신화를 종교역사로 폄하하면서까지 기자조선을 한민족 역사에 넣는 유교식 사대주의로 편향된 시각도 옳지않다.
(4) 단기고사(1905년)
정해박이 한문본을 한글본으로 번역한 것이 전하고 있는데, 발해시조 고왕(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무왕)에 썼다고 전해지는 역사책이다.
본래 발해문으로 씌어졌는데, 약 300년 뒤 황조복이 한문본을 번역하였다곤 하나 전해 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학계에서는 정사로 인정하지 않고 사찬사서로 본다.
최초의 단기고사가 전해지지 않음으로 현존하는 것이 최초의 것과 같은지 다른지는 모르지만, 다른 상고사서와 비교할 때 내용은 비슷하다.
(5) 단군세기(1363, 고려 공민왕)
한단고기에서 고려말 이암이 엮었다고 하는 단군조선의 연대기를 쓴 사찬사서이다. 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와 같은 이유로 위서로 규정하고 있다.
이암은 일찌기 고려시대 진역유기를 저술한 이명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과 더불어 경기도 양주 천보산에 올라 갔다가 태소암에서 소전거사로 부터 진기한 고서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때 얻은 고서를 읽고 이 책을 엮은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이 책은 태백진훈' 농상집요와 함께 이른 바 행촌 삼서로 꼽히는데, 서문에서 고려 때 강화도 해운당 에서 저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6) 북부여기
환단고기에서 범장이 지었다고 하는 우리나라 상고시대인 북부여에 대한 사찬 사서이다. 사학계에서는 한단고기와 같은 이유로 위서로 규정하고 있다.
범장은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제자로 복애거사 혹은 휴애거사로 알려져 있는데, 증손 범석희가 출사한 범장의 저서 '화동인물 총기'에 의하면 복애거사가 맞다. 범장이 이암'이명과 함께 고서를 얻은 이야기는 전술한 단군세기와 같고, 이후 가섭원부여기를 썼다 고 한다.
(7) 조선상고사(1880~1936)
신채호가 서술한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사찬사서로, 1931년 동아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의 계승 과 단군-기자-삼한-삼국으로 계승되는 역사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한 사서다. 후술하는 이종휘의 동사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8) 금오신화(金鰲新話)
금오신화는 조선전기 학자·문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의 5편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이다.
금오신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다.
「 홍생(洪生)이라는 개성 부상(富商)의 아들이 고조선의 옛 땅인 평양에서 놀다가, 대동강 가에 있는 부벽루(浮碧樓)에서 신녀(神女)와 만났다. 홍생은 그녀로부터 선계의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그녀가 지은 시를 감상하다가 돌아온 뒤에 상사병에 걸렸다. 그러던 중 꿈에 신녀(神女)로부터 선관(仙官)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죽었는데, 그의 시체가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시해(屍解)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신녀의 내력이 흥미롭다. 그녀는 기자(奇字)의 후예로 본래 고조선의 왕족이었다. 위만에게 나라가 망해 준왕이 도망갔을 때 자신도 매우 어려워졌는데 한 신인(神人)을 만나 신녀가 됐다고 하면서 그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 홀연이 어떤 신인(神人)이 나를 위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나라를 다스린 후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어 죽지 않은 지 수천 년이 됐다. 네가 나를 따라 자부(紫府) 현도(玄都)로 가 즐겁게 사는 것이 어떠하냐?" 내가 승낙을 하니 나를 이끌고 살고 계신 곳으로 가 별당을 지어 대우해 주셨다. 나에게 현주(玄州)의 불사약을 먹이니 복용한 지 며칠 만에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나서 뼈 마디마디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신인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라를 세우고, 신선이 되어 죽지 않은지 수천 년이나 되었다는 내력을 보면 단군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구절 이전에 나오는 홍생의 시문에도 단군이 언급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부(紫府)라는 지명은 신선도를 연구했던 중국 학자 갈홍(葛洪) 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중에서 황제(黃帝)가 동방 청구(靑丘) 땅에 가서 자부선생(자부선인, 紫府先生)을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어갔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9) 청학집(靑鶴集)
청학집은 조선 중기(1588년 전후)에 조여적(趙汝籍)이 찬술한 선가서(仙家書)로, 청학상인(靑鶴上人)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한 선파(仙派) 인물들의 행적과 담론을 잡기(雜記)형식으로 기술하였다. 분권되지 않은 등사본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6년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청학집에서 도인인 금선자(金蟬子)는 변지(卞沚)의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금선자가 말했다. 변지의 기수사문록이라는 책은 우리 동방 동방 도인들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환인진인(桓仁眞人)은 명유(明由)로부터 도를 배웠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로부터 도를 배웠는데 광성자는 옛날의 선인이다. 환인은 동방 선파의 시조가 되었는데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로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실천함과 아울러 풍우(風雨)와 오곡 등 360가지 일을 주관하여 동방의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단군이 그 일을 잇고 교화를 행한 지 10년, 구이(九夷)가 모두 받들어 천왕(天王)으로 세웠다. 단군은 쑥대풀로 엮은 정자와 버드나무로 지은 궁궐에서 살며 머리를 땋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상을 주관하기 1,048년에 아사산(阿斯山)에 들어가 선거(仙去)하였다.
그 후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산에 살았는데 환한 얼굴에 모난 눈동자로 능히 단군의 도를 터득하였다. 영랑(永郞)이란 사람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이다. 나이 90에도 어린애의 얼굴빛이었으며 해오라비 깃의 관을 쓰고 철죽(鐵竹) 지팡이로 산과 호수를 소요하였는데 마침내 문박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마한(馬韓) 시절에는 신녀 보덕(普德)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다녔고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불렀는데 용모가 마치 가을 물의 부용꽃과 같았다. 그녀는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군신화가 도교와 결합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이후 1666년 조선 현종 때 홍만종이 저술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는 한국 단학(丹學)의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10)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오계일지집은 이의백(1711년 ~ ?)이 지은 신선 설화집이다.
여기에서 단군을 신선인 동시에 임금으로 취급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기록에 의하면, 구월산(九月山)에 팔대(八臺)가 있는데 산꼭대기의 비서갑비(匪西岬妃)가 여기에 와서 노닐 제 상서로운 기운이 무지개와 같았다고 한다. 단제(檀帝)가 비서갑비를 맞아 왕비로 삼고 성자(聖子) 3인을 낳았는데 장자는 부소(扶蘇), 차자는 부루우(扶婁虞), 삼자는 부여(扶餘)라 하였다. 중국의 요 임금 25년, 무진년에 왕검(王劍)이 임금이 되어 아사달(阿斯達)을 서울로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이분이 최초의 단군이었다. 제위한 지 93년, 경자년에 신으로 모셔졌고 태자 부루가 임금이 되었다. 아사달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은 나라 무정 임금 8년, 갑자년에 금린(金麟)을 타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
하루는 한휴휴(韓休休) 선생을 따라 백년산(白寧山)을 지나다가 백학(白鶴) 두 쌍이 봉우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여쭙기를 "이 산에 학이 삽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것들은 학이 아니라 옥판(玉版)의 정(精)이니라. 저 봉우리 바위 틈에 돌 궤짝을 숨겨 놓았는데 궤짝 속에는 옥판이 4개가 있다. 옥판 위에는 금자(金字)로 글을 써 놓았으니 단군 시절 문박(文朴), 대왕(大往), 신지(神誌) 등의 성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모두 변화, 장생의 비결들이다."라고 하셨다.」
문박은 청학집에도 등장했던 옛 신선이며, 신지는 고려 때 유행하던 참서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작자로서 이름이 전해져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신지비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아 어떤 책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권7 세조 3년조(1457)에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책의 목록 중 하나로 나오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를 신지비사로 보는 (신채호, 1948)의 견해가 있다.
그 외에 오계일지집에는 환웅성선(桓雄聖仙)이 창작하고 해모수(解慕漱) 선인이 정리했다는 현묘결(玄妙訣) 등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정사는 관찬사서를 비롯해, 동아시아 전제군주시대에 왕조에서 정통성을 인정한 일부 사찬 사서와 기존왕조가 전 왕조에 대하여 편찬한 사서를 말한다.
정사에서 단군신화를 다룬 삼국사기는 단군신화 해설을 시작할 때 따로 설명하고, 먼저 그 외 단군신화를 다룬 사서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응제시주(1462년)
응제시주는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의 응제시에 손자 권람이 주석을 붙여 엮은 역사책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옛날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웅(雄)이라 하였다.
인간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桓)은 혹은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명, 병,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하였다. 범과 곰은 그것을 먹고 금기하였는데,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지만 곰은 금기를 잘 지켜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부루를 낳았는데 이분이 동부여왕이다. 하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에 기자가 와서 분봉받았다.」
삼국유사에서 언급했던 해부루와 동부여로 이어지는 설을 채용하고 있으며, 기자 조선과의 연결도 있다. 그러나 요 임금과 한날 한시에 즉위했다고 하므로 단군을 요와 동일시하려 한 듯하지만, 결국 통합되지 않았다.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는 자주적 모습과 유학자적 면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조선 초기 학풍을 잘 보여준다.
(2) 조대기 (700년경)
조대기(朝代記)는 대조영의 명으로 그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저술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근거로 한 대진국(발해)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수거 대상 목록으로 책 이름이 나오므로 정사로 추정된다.
내용은 환단고기에 합본된 태백일사의 환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大振國本紀)에 인용되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이명(李茗)이 조대기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썼고,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노인(北崖老人)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 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역사'지리서로서, 태종실록' 세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정조실록' 고종실록 등의 편년체 사서이다.
① 태종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변계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000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②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③ 세조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조실록(1455~1468)은 고조선사와 관련된 고서에 대한 수거대상 목록으로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과 노원과 원동중의 삼성기 등의 고대 사서목록을 전하고 있다.
고조선사와 관련된 고서 대부분이 이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정사
그 외의 정사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다.
① 동국여지승람(1481년): 조선 성종 때 완성한 지리서
②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조선 중종 때 이행'윤은보'신공제' 홍언필'이사균 등이 증수 편찬한 지리서
③ 동국통감(1485년): 조선 성종 때 문신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아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사서
④ 동국역대총목(1706년): 조선 숙종 때 홍만종이 단군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한 역사책
⑤ 동사강목(1756년):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안정복이 쓴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통사적인 역사책
⑥ 동사(1803년): 조선 후기 실학자 이종휘가 쓴 역사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