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일연스님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는 2책 5권으로 되어 있는데, 단군신화는 제1권 기이편(奇異篇) 고조선조(古朝鮮條)에 실려 있고, 고조선 이전과 이후 삼한, 부여, 고구려와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역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일연스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일연스님은 고려 최씨 무신정권(1170~1270)의 포악무도한 폭정시기와 충열왕이 원의 부마(1271)가 되어 그들의 명에 따르는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해 백성들이 짓밟히는 치욕스런 역사를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일연스님의 이런 생존 시기가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실은 계기가 된 듯 하다.
일연스님은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일하여 원제국을 건설한 해(1206년)에 탄생했다. 일연스님의 속명은 전견명(全見明)으로, 어머니가 꿈에 자신에게 빛이 환히 비치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견명은 9살(1215)에 절에 공부를 하러 들어가 불경에 푹 빠졌다. 이름 외에 밝혀진 바가 없고 어릴 때 절에 보내졌으니, 한미하고 가난한 집안 출신었던 것 같다.
고종 4년(1217) 최충헌의 무신정권하에서 최충헌이 문벌귀족 세력과 연합한 동화사, 부석사, 부인사, 쌍암사, 흥왕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등 교종불교 세력 승려들의 공격을 받고 물리친 후, 고려 건국 시 몰락했던 선종 불교와 손을 잡으면서 선종불교가 회생(回生)했다.
절에 들어간 지 5년 후인 14살(1220년)에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은거하여 수련하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일연(一然)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일연스님이 선종불교계 스님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시점이다.
22세(1228년)에 승과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44세(1250년)에 남해의 정림사 주지가 되어 55세(1261년)에 중편조동오위(重偏曹揀五位)를 저술했다.
고려가 몽고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였던 1차 여몽 원정 전쟁(1271~1273년)이 끝난 4년 후인 72세(1277년)에 충열왕(재위 1274~1308)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지냈고, 1281년 2차 여몽 일본원정 전쟁이 시작되었다.
76세(1283년)세까지 충열왕의 자문역할을 하면서 여몽원정 전쟁을 끝냈고, 78세(1285년)에 왕을 따라 개성으로 돌아가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불리는 고승이 되었다. 국사가 된 후, 종신직이라 개경에 머물러야 했지만, 이듬해 고향인 군위의 인각사로 은퇴하여 국사가 된 지 4년 만인 1289년에 입적하였다. 경북 군위가 삼국유사의 고장이라 칭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고장은 경북 청도로 추정되는데, 청도가 일연스님의 전성기에 머문 곳인 동시에 화랑정신 발상지였고, 동시에 청도를 중심으로 경주'건천'경산 등지에 김유신 장군의 유적들이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집필 시기가 1281년~1283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확실하다. 실제로 세속에 얽매어 전쟁에서 싸워야 할 화랑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이름 및 살생유택(殺生有擇) 정신과 김유신의 수도법 등 화랑도의 정신과 유습은 선종 불교의 정신이나 유습과 유사한데, 현대에는 불교활법, 경주 골굴사 선무도, 단학, 선무도 등에서 그 맥을 찾아볼 수 있다.
일연스님이 충열왕의 측근인 동시에 국사(國師)였던 점에서 소위 잘나갔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으로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사회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지위로서, 지금으로 치면 영향력으로 따져 김수환 추기경과 성철스님을 합친 정도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연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이전까지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삼국유사 스타였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보면, 삼국유사가 유명해진 것은 단군신화가 실려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일연스님 역시 유명해졌다. 결국 일연스님은 단군신화가 만든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는 자신의 특기가 있어야 한다. 피겨스타 김연아에게 피겨스케이트를 뺄 수 없고, 차범근에게 축구를 뺄 수 없듯이 일연 스님에게서 단군신화를 뺄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일연스님에 대해서 물으면 그의 생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단군신화의 깊은 의미를 아는 사람은 더욱 없다. 누구나 알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데,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물며 일연스님의 가계와 생몰연대 그리고 주요활동이 자세히 적혀있는 한문으로 쓰여진 1,200자 가량의 꽤 긴 내용의 비문이 번듯이 남아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에 비하면 꽤 풍부한 자료가 있는 셈인데,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올랐던 고승에 대해 왜 이토록 무신경했는지 의아할 만큼, 다른 기록과 비교 교차하여 입증할 자료가 없다.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꾸어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꾸어 놓은 책"이라고 평가된다.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사람이 일연스님이다.
일연스님이 13세기에 이룩한 민족의 발견, 그리고 지배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세계의 역사를 민중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획기적 발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일연스님이라는 한 사람의 인연으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이 위대한 이야기를 한국국민은 감사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