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한국시대의 하느님 삼신과 팔선
오늘날 세계신화에서는 마고는 생산과 창조를 담당하는 여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우리한국 민간에서도 마고와 궁희와 소희라는 삼신의 연원을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3명의 신 혹은 출산의 신으로 인식하고 있다. 제물로 밥 3그릇' 국3릇' 정화수 3그릇을 놓는 것으로 보아 무의식 중에 이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리라.
학계에서는 3신의 삼을 태(포태)의 순 우리 말로 해석하는 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는데, 그 역시 출산을 뜻하고 있으니, 결국은 마고와 궁희와 소희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삼신을 여자로 인식한 것은 후세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셋 다 창조주이긴 하지만, 신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신에 대하여 환인'환웅'단군 혹은 웅녀와 환웅과 단군의 3신을 지칭한다는 설, 산신이 음운화 되어 3신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결국 그 연원은 부도지의 삼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환웅' 단군' 환인 혹은 웅녀의 삼신은 기독교와 천주교의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팔선은 8명의 천신으로서 남자에 해당하는 4명의 천인과 여자에 해당하는 4명의 천녀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신화에서 흔히 팔선을 8선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대의 모계사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신은 천녀(天女)인데 남신은 천남(天男)이 아닌 천인(天人)인 것은 후세 유교사회의 가부장적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8선과 우리 한국설화에 등장하는 8선녀는 이 8명의 천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았으면서도 인간계를 벗어난 선계(仙界)의 존재로 생각하여 신선(神仙)으로 부른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중국에서 도교의 선인인 종리권(鍾離權)' 병자를 돌봐 주는 이철괴(李鐵拐)' 악공들을 지켜주는 한상자(韓湘子)' 악극을 후원하는 조국구(曺國舅)' 이발사들을 돕는 여동빈(呂洞賓)' 노인들을 지켜주는 장국로(張國老)' 꽃꽃이의 선인 남재하(藍采何)' 유일한 여성인 하선고(何仙姑)를 팔선으로 하는 사상이나, 고려 전기에 있었던 도교와 불교 혼합의 8선(八仙) 혹은 8성(八聖)을 숭배하는 사상은 모두 후에 중국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형성된 사상으로 한국의 고대 8선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환단고기 등의 한국고기에서는 "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고 한다.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며,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고 전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분신인 궁희와 소희의 자손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는 부도지의 기록과 상통하고 있다. 아마도 나반과 아만은 궁희와 소희를 그린 이야기이며, 아이사타와 구환은 천인들이 만난 장소와 후손을 의미한 것이라 생각된다.
구약의 이야기를 빌리면 나반과 아만 이 두 분이야말로 유대민족이 말하는 아담과 이브보다도 수천 년이나 앞선 현 인류의 진정한 시조인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나반과 아만을 성경의 아담과 이브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성격도 다르고 일치감도 없어 합당치 않다. 그리고 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인류를 끌어들여 성별과 혈연관계 그리고 만남의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신화에 대한 과한 해석으로 그렇게 중요한 사항은 못 된다. 차라리 ”마고로부터 궁희와 소희가 독생(獨生)으로 태어났는데, 이들은 신이므로 남녀의 구분이 없다. 따라서 궁희와 소희가 바로 나반과 아만이며, 이들이 8명의 천신을 낳았고, 어쨋던 신이 있은 이후에 인류가 태어나 자신들에 빗대어 신을 이야기하였으니, 인류의 조상으로 생각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단고기의 아이사타는 부도지의 파라미(parami)로 생각되는데, 특별한 장소가 아닌 그냥 이상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파라미는 현세를 의미하는 차안(此岸)의 반대되는 개념인 피안(彼岸)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천국을 뜻하는데, 불교용어로는 바라밀(波羅蜜) 혹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여 생사유전하는 인간 존재의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해탈하여 도달한 참나의 경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신들의 양식이 되는 땅속에서 솟아나는 지유(地乳)는 아마도 오늘날의 지하수 중에 용천수에 해당하는 생명수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고기에서는 하늘과 땅을 흐르는 물을 천해(天海)라고 하여 하늘이 주는 생명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을 흐르다, 떨어져 식물과 동물과 사람과 대지를 살찌우고 정화하며, 골짜기에서 계곡을 이루러 바다로 흐르며 물고기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는 웅장한 모습을 생각하면 적절한 비유이다.
천신들의 천음을 듣고 오가는 것이 자유롭고 수명이 끝없는 모습은 인류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삼신' 팔선 등의 신으로 묘사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 작품이다.
사람들이 신화를 만드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다. '신화처럼 울고, 신화처럼 사랑하라'를 쓴 송정림 작가가 "신화 속에는 인간이 불행하다는 인식과 신들은 행복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하며, 신화를 읽어야하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떠올린 생각이다.
사람들은 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모습으로 작품화하여 신화를 만든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 인간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 그런 신들만이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는 생각 속에서 신화를 통하여 대리 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마고(麻姑)에서 궁희(穹姬)와 소희(巢姬)가 태어나 삼신(三神)이 되고, 삼신에서 천인(天人)과 환웅(桓雄)이 태어나 다시 삼신을 이룬다.
따라서 마고와 궁희와 소희가 동일한 하나로 삼신일체이고, 삼신과 천인과 환웅이 동일한 하나로 삼신일체인데, 이것을 삼신일체 사상 (三神一體 思想)이라고 한다.
또한 마고율려는 마고의 생명에너지 율(律)과 물질에너지 려(呂)와 마고 즉 율려의 생태에너지 율려(律呂)로 나누어지고, 생명에너지 율이 신 (神)' 물질에너지 려가 정(精)' 생태에너지 율려가 기(氣)가 되어, 율'려'율려의 삼원(三元)과 정'기'신의 삼신(三神)이 마고에 속한 하느님의 에너지로써 삼원일체(三元一體)와 삼신일체(三神一體)가 된다. 마고 즉 율려를 기(氣)로 설명한 이유는 한국고기에서 하느님을 천기도인(天氣道因)이라 표현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삼신일체와 삼원일체를 함께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쳐 부르기도 하는데, 삼신일체와 삼원일체의 관계는 크게 보면 삼신일체이고 작게 보면 삼원일체로 같은 이야기만, 주로 삼위일체를 많이 사용한다.
삼신일체사상과 삼위일체 사상은 환인·환웅·단군(檀君)과 환웅·단군·웅녀(熊女)의 삼신일체와 삼위일체로 이어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삼위일체와 의미가 통하며, 불교의 불(佛)·법(法)·승(僧)의 삼보귀의(三寶歸依)와도 의미가 통하고, 힌두교와 브라만교의 브라흐마·비누 슈· 시바의 삼신(三神)과도 의미가 통하고,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지(知)·언(言)·행(行)의 세 가지 요소와도 관계가 깊다.
삼신일체사상과 삼위일체 사상은 삼신일체 홍익사상(三神一體 弘益思想)이라고도 한다.
삼신일체로 나와 너와 다른 제3자가 모두 한몸 하나의 존재라면, 하나가 죽으면 모두가 죽고 또 모두가 살아야 하나도 산다. 따라서 나와 너와 제3자 모두가 서로 도와야 삼신일체로 된 나와 너는 물론 제3자까지 모두 살 수 있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홍익(弘益)과 같은 의미가 되고, 삼신일체 사상은 곧 홍익사상(弘益思想)과 같은 의미가 되며, 합쳐서 삼신일체 홍익사상이 되는 것이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의하면 서로 돕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죽이는 약육상식(弱肉强食)의 법칙은 천도(天道)에 어긋난 행위로 역도(逆道)가 된다. 우리는 흔히 약육상식(弱肉强食)의 법칙을 자연의 순리라고 하지만, 자연의 순리에도 잘못된 것은 있다. 따라서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라 잘못된 자연의 법칙을 바로 잡아야 천도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삼신일체 홍익사상(三神一體 弘益思想)을 통하여 과학적 영역과 철학적 영역은 물론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 속한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삼신일체 홍익사상은 우주와 지구와 인간과의 관계에도 성립된다.
천문학의 발달로 지금도 수많은 천체가 생겨나고 또 사라지고 있으며, 지구도 언젠가 그 수명을 다하면 사라진다고 한다. 지구가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의하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이 하나의 몸임으로 지구가 사라져도 인간은 우주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삼신일체 홍익사상에서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人間)이 홍익인간을 넘어서 신이 되어 지구와 함께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되는 길은 힘들고, 누군가 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알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대신 홍익인간(弘益 人間)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고대에는 우주와 지구가 서로 돕게 하여 영생하는 길을 인간이 도를 닦거나 종교를 믿어 천도(天道)에 도달하는 방법을 통하여 찾았다면, 현대에는 천문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찾고 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방법은 다르겠지만, 천문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라 자연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둘째로 삼신일체 홍익사상은 인간의 생사관에도 관계 된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의하면 하느님에 의해 삼신일체의 우주 상(像)이 생겨났기 때문에, 인간은 물론 존재하는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하느님 그 자체이다.
또한 삼신일체로 모두가 하느님의 에너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하는 삶과 죽음은 인간의 한계가 가진 짧은 인식에서 생긴 오류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無)에서 탄생하여 유(有)가 되거나 죽음으로 유가 무가 되는 일은 없으며, 죽고 산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다른 에너지 차원으로 옮겨가 저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자.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로 없어지거나 얼어서 얼음으로 변해 형태가 바뀐다고 하여 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가 보는 물이 수증기나 얼음으로 변하는 과정은 차원 이동의 과정을 시간의 변화로 인식하는 것뿐이다. 생사(生死) 역시 마찬가지로 차원이 바뀌는 것이므로 시간은 애초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나 미래는 단지 장소와 현상만 바뀔 뿐 현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계에서 차원의 변화는 망각으로 나타나는데, 에너지 차원이 바뀌면 다른 차원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전생(前生)과 내세(來生)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둘러보는 당신의 주위에 보이는 다른 사람' 동물' 식물' 별과 달 등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것과 당신이 살고 있는 과정 자체가 당신의 다른 차원의 삶 즉 전생(前生)과 내세(來生)인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가 다하여 다른 차원으로 차원 이동을 할 때에는 홍익사상에 따라 서로 이로운 쪽으로 끌어당기는데, 도(道)와 덕(德) 즉 도덕(道德)·선연(善緣)·선업(善業) 등에 따라 움직이는 좋은 에너지는 따뜻한 기운과 활기찬 에너지의 형상을 띄며 서로 끌어 당기고, 재물·악연·악업 등에 따라 움직이는 나쁜 에너지는 음습한 기운과 뭉치고 짓눌리는 에너지의 형상을 띄며 서로 끌어 당긴다. 즉 나쁜 에너지는 나쁜 에너지를 끌어당겨 나쁜 에너지로 태어나는데 에너지가 음습해지고 뭉치고 짓눌려 그 끝이 식물(植物)을 넘어서 물체(物體)나 물질(物質)이 되는 것이고, 좋은 에너지는 좋은 에너지를 끌어당겨 따뜻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며 좋은 에너지로 태어나는데 그 끝이 동물을 넘어 인간이나 홍익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은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을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당신이 태어난 모습과 삶의 모습 즉 지금 당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겪고 있는 모든 것이 곧 천국과 지옥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위해 차려진 밥상과 같은 것이니 결코 낙담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행복에 겨워 밥상에 똥 싸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라 현재의 고통은 행복과 자아만족(自我滿足)의 차원으로 나가기 위해 주어진 기회이고, 현재의 행복 역시 자아만족에서 타아만족(他我滿足)으로 나아가 완전한 행복의 차원을 얻기 위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삼신일체 홍익사상은 천국과 지옥의 명확한 모습을 설명해준다.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중간계(中間界)라고 하는데, 민간설화에서는 이 중간계를 망자(亡子)가 건너는 강이나 다리로 표현하고, 불교에서는 49일로 표현하며,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요단강을 건넌다고 표현하는데, 민간설화에서 천상의 거울 앞에 서서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에 의해 인과의 결과를 심판받는 과정이나 기독교와 천주교의 휴거(携擧, Huger, Rapture)나 불교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열반-해탈(涅槃-解脫)의 과정도 이에 속한다.
중간계에는 광명계(光明界)와 혼돈계(混沌界)가 있는데, 자신이 쌓은 인연(因緣)과 업(業)에 따라 광명계나 혼돈계 중 하나를 지나가게 되며, 이 때는 물질계와 생명계와 생태계가 서로 통하여 각자의 인연과 업(業)에 따라 스스로 만든 삼생(三生)의 잔영(殘影)을 보게 된다. 광명계와 혼돈계는 설화에서 옥상황제의 천국과 염라대왕의 지옥으로 가는 길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현대 천문학에서의 화이트 홀(white hole)과 불랙혹(black hole)이 이에 해당한다.
광명계 즉 화이트 홀은 좋은 에너지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천도(天道)에 일치함으로 밝은 영체로 변해 빛속으로 걸어가거나 봄날 꽃밭을 노니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곧 우리가 아는 천국(天國)의 실체이다.
혼돈계 즉 블랙홀은 나쁜 에너지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천도(天道)에 어긋남으로 영체가 어둡고 거의 없다고 할 적도로 작아서 영혼의 상태로 암흑이나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캄캄하고 차갑고 고통스런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나는 느낌을 받는데, 이것이 곧 우리가 아는 지옥(地獄)의 실체이다.
한갖 느낌일 뿐인데 천국과 지옥이 뭔 상관이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옥은 삼생 (三生)이 훤히 보여 자신 만들고 저지른 악연과 악업들이 생생히 보이는 가운데, 육체가 없으니 전해지는 고통의 감각을 영혼(靈魂)으로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어 더욱 강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지옥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다리가 없는 사람이 느끼는 통증이 다리가 있는 사람이 느끼는 퉁증보다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가렵거나 혹은 통증을 느낀다 하더라도, 다리가 없으니 긁거나 아픈 곳을 어찌할 수가 없어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국에서 역시 삼생 (三生)이 훤히 보이는 가운데, 영혼이 영체(靈體)로 변해 빛 속으로 걸어가거나 봄날 꽃밭을 노니는 등의 따뜻하고 포근함을 느끼니 느낌이 배가 될 것이다. 또한 설령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영체가 육체를 대신하고 있으니, 다리가 없어도 긁거나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어 문제가 없다.
중간계에 속하는 광명계와 혼돈계를 지나면 역시 현생의 차원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당연히 자신의 업(業)과 연(緣)에 따라 혼돈계를 거친 사람은 지옥의 삶을 살게 되고, 광명계를 거친 사람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된다. 선택은 본인의 몫으로, 진짜 지옥은 끊임없이 같은 악순환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생에는 재물(財物)을 선택하는 길과 도덕(道德)을 선택하는 길, 두 개의 길이 있다.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은 재물을 선택하는 삶이 지옥을 선택하는 길임을 알았기에, 도덕을 완성하는 삶을 천국 혹은 피안과 영생으로 통하는 길로 생각하고 평생을 바쳐 도(道)를 닦고 덕(德))을 행했다. 누구에게나 천국을 선택할 기회는 공평하게 있는데, 도돌이 표처럼 지옥을 선택하는 악순환은 인생의 크나큰 비극이다.
혹자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생각할 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지옥을 달게 받는 것도 자신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인데,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만만하겠는가? 미안하지만 끊임없이 지옥의 업을 쌓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즉 인간계에서 영원히 사라져서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 진정한 죽음은 이처럼 모든 것이 끝나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현생에서 악행(惡行)을 저질러도 내마음만 편하면 그만이고, 사후(死後)의 일은 모르니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위안할 필요는 없다. 악행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영원한 죽음으로 결과가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고, 인간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동물계나 식물계나 물질계의 차원으로 간다면 다른 생명체의 먹이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술할 천도신앙(天道信仰)에서는 이러한 차원의 변화와 악행에 대한 경고(警告)를 홍익인간의 인연법칙으로 풀어낸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은 이처럼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지만,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까지 적용해 교육계의 잘못된 모습도 재조명 해 볼 수도 있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라 홍익(弘益) 즉 서로 이로우려면, 구속(拘束)을 참을 줄 아는 인내심(忍耐心)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역지사지심(易地思之心)과 대의(大義)를 위해 소아(小我)를 양보할 줄 아는 희생심(犧牲心)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는 참지 못하는 마음을 참도록 구속(拘束)하는 곳, 역지사지하지 못하여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처벌(處罰)하고 훈육(訓育)하는 곳,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도록 격려(激勵)하고 칭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학교에 구속하고 처벌하고 격려할 선생님이 제도나 학부모의 간섭으로 제구실을 못 한다면 학교는 무법천지가 될 수밖에 없고, 무법천지 학교 속으로 아이들을 보낸다면 당연히 끔찍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전술했듯이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르면 인연과 업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됨으로 서로 돕고 하나처럼 잘 살아가려면 나쁜 인연과 악업이 생기지 않도록 구속과 처벌이 필요한데, 구속과 처벌이 없다면 양육 강식이 판을 쳐서 무법천지가 되기 때문이다.
집에서 부모가 아이를 구속하고 처벌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라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를 구속하고 처벌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부모는 선생님에게 아이의 양육을 맞겨야 한다. 하느님까지도 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우주 대자연과 인간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르도록 맡기는데, 한갖 인간에 불과한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간섭해서야 교육이 바로 서겠는가?
또한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르면 우주에서 가장 힘이 약한 말단조직인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과에 따라 서로에게 이롭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하느님이 이것을 간섭한다면 결과는 창조주인 하느님에게 돌아가고 결국 하느님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홍익인간을 내세워 자신을 대신하게 하는 이유이다. 교육계에서 홍익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선생님이므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은 선생님이 아닌 교장과 교육청에 있다.
과거에는 교육계에서 학생이 가장 말단조직이었으나, 현재 사회에 만연한 금쪽이 현상으로 교육계에서 가장 말단조직은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아이에 의해 다른 학생이나 선생님에게 피해가 가게 되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따라서 학교에서 금쪽이가 저지른 일은 선생님이 아닌 금쪽이를 만든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고, 교장이나 교육청은 선생님을 거친 같은 교직자로서 교사를 보호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학교에서 아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선생님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며, 교장이나 교육청은 선생님을 보호하여 교육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삼신일체 홍익사상에 따라 삼신일체가 되면 부모와 선생님과 학교장과 교육청은 하나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학생보다 약한 곳에 있는 선생님을 보호하는 것이 도리이고 순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종교의 영역이지, 신화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종교의 영역에 머무른다면 신앙과 복종만 있을 뿐, 삶의 지혜를 배우고 카타르시스를 얻으며 감성을 키울 수는 없다. 기독교나 천주교의 경우도 하느님 대신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시 하고, 그의 고행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배우고 카타르시스를 얻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인 하느님을 인격화하여 신화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은 아마도 한국 천도신앙이 유일할 것이다. 혹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고 보아서도 안될 숭고한 하느님을 인격화된 신으로 전락시켜 작품의 소재로 삼아 신화화 하는 것을 외경된 행위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숭고하고 전지전능하다 한들, 인간이 없거나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는가?
한국 천도신앙의 하느님은 인격으로 신화화 되는 것은 물론 인간이 되기까지 하면서 인간을 지켜준다. 그것도 신이(神異)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인연 법칙에 따라 순리적으로 도움을 준다. 폭력적이고 탐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군림하기만 하는 다른 신들과는 격이 다르다.
한국 천도신앙이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인지, 한국신화에는 유일하게 도깨비 외에는 다른 신의 이야기를 다룬 신화가 별로 없다. 그리고 이 도깨비조차도 그 유래는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고, 그 특징이 인간과의 친밀성으로 하느님과 닮았다. 물론 저승사자' 여자귀신 특히 처녀 귀신' 조상신' 애기귀신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외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잡신들인데, 이들까지도 때로 인간을 돕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다른 나라의 신들과는 달리 모든 신들이 이처럼 인간적으로 그려지는 한국에는 좀 더 많은 신화가 필요하다.
신화가 쌓이면, 역사를 변화시킨다. 파괴적인 신화는 파괴적인 역사를 만들어 내고, 긍적적인 신화는 긍정적인 역사를 만들어 낸다. 하느님으로 부터 파생되는 더 많은 한국신화들이 생겨나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생산성있는 신화들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