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내용의 "하시 삼위태백 가이 홍익인간(下視 三危太伯 可以 弘益人間)"은 "삼위태백을 내려다봄에 홍익인간할만 하다."는 뜻인데, 유소환웅이 하나님으로서 삼위태백 즉 지상세계에서 이상적 인간상인 홍익인간을 양성하려 했다는 의미가 된다.
홍익인간에는 널리 이로운 인간이라는 의미와 신격을 갖춘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인 신성인간(神性人間)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홍익인간이라는 단어에 대한 좀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1. 단군신화 내용에서 삼위태백을 내려다 보았다는 것은 당시 인류의 모습을 관찰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 인류는 전술했듯이 동물성의 인류인 사람과 지성을 갖춘 원시인류가 살고 있었다. 따라서 홍익인간사상은 단군신화에서 하나님이 곰을 인간으로 만들었듯이 인간은 동물성을 가진 존재인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부터 출발하는데, 이에 의하면 인류는 동물 그대로의 야만적인원시인류→ 지식을 쌓아 갖춘 인류로 에너지 등급이 나누어지게 된다.
삼위태백(三危太白)을 일연스님은 산 이름으로 해석하여 태백산(지금의 묘향산)으로 설명하였고, 흔히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을 구분하여 산 이름 2개와 봉우리 3개를 들먹이기도 하는데, 인간적인 발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신이 우주 전체를 굽어 내려다본다면 지상 세계 전체를 보는 것이 이치이지, 신이라는 스케일에 맞지 않게 작은 산 3개를 보았겠는가? 후술하겠지만, 지상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천부삼인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당시 인류의 모습과는 반대였던 홍익인간은 전술했듯이 신격을 갖춘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인 신성인간(神性人間)이다. 따라서 인간(人間)은 동물성(動物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갖춘 존재인 것인데, 이에 의하면 인류에서 진화한 인간은 지성(知性)을 갖춘 보통인간(普通人間) → 지혜(知慧)를 갖춘 고등인간(高等人間) → 신성(神性)을 깨달아 영성(靈性)을 갖춘 홍익인간(弘益人間)→ 신(神)으로 화(化)한 신성인간(神性人間)로 에너지 등급이 나누어지게 된다.
3. 위 1과 2를 합하여 추론하면 인류는 동물 그대로의 야만적인 원시 인류→지식을 쌓아 갖춘 인류 →지성을 갖춘 보통인간인 사람→ 지혜를 갖춘 고등인간 → 신성을 깨달아 영성(靈性)을 갖춘 홍익인간 → 신으로 화(化)한 신성인간으로 에너지 등급이 나누어지게 된다.
4. 홍익인간 사상에서 다루는 인간상은 지혜를 가진 고등인간과 신성(神性)을 깨달아 영성(靈性)을 갖춘 홍익인간과 신(神)으로 화(化)한 신성인간이 대상이 된다.
5.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신격을 갖춘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인 신성인간(神性人間)이다. 신성인간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道德) 중에 도(道)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내력(忍耐力)과 신통력(神通力)을 바탕으로 하는데, 여기사 말하는 것은 신통력 중에서도 불노장생(不老長生)과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능력이다. 즉 윤회를 할 것인지 영생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윤회면책권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 신성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차력' 기공 등은 물론 현대에는 뇌과학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증명되고 있으니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노장생(不老長生)과 영생불사(永生不死)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신선(神仙)이 이에 해당하는데, 현대과학으로도 불가능하고 일찌기 이루어진 예를 목격한 바가 없으니, 설령 가능하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따라서 하니님은 신성인간 대신 실현 가능한 홍익인간을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다.
6. 널리 이로운 인간이라는 의미의 홍익인간은 깨달음을 통하여 지혜를 넘어 공감능력을 갖춘 인간이다. 홍익인간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道德) 중에 도의 인내력(忍耐力)과 덕(德)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인내와 깨달음을 통하여 지혜를 가진 인간이 되고, 마침내 덕성과 공감능력을 가진 홍익인간으로 진화(進化)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홍익인간의 의미를 살펴보자.
홍익인간은 남의 어려움을 이해할 줄 아는 배려정신(配慮精神)이 강한 인류상이다. 배려정신과 함께 인내심이 있으니 당연히 역지사지심이 있고, 따라서 남다른 지혜(知慧)로 사물의 이치를 궤 뚫을 줄 아는 통찰력(通察力)을 갖추게 된다. 지성은 누구나 배우고 경험하여 지식을 쌓으면 이룰 수 있지만, 지혜는 배우고 경험하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지성이 되면, 지성으로부터 통찰력과 배려심이 생기기도 한다. 통찰력으로부터 창조하는 마음과 개척하는 마음이 생기고, 배려심(配慮心)으로부터 양보(讓步)하는 마음과 봉사(奉仕)하는 마음이 생긴다. 인간이 진화하여 신성(神性)을 깨달아 영성(靈性)을 가지면 홍익인간이 되고, 영성에 의해 때로 도의 신통력에 해당하는 영력(靈力)이 생기기도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뛰어난 공감능력(共感能力)으로 남의 어려움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줄 아는 이타정신(利他精神)이 강한 인간상이며, 내가 넘치게 가진 것이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의 몫임을 아는 평등정신(平等精神)이 강한 인간상이다. 배려심과 양보심과 봉사심이 습관이 되어 덕성으로 자리 잡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덕성과 공감능력(共感能力)이 곧 영성(靈性)이 되고, 이타정신과 평등정신이 곧 영성(靈性)이 된다. 이타심(利他心)으로부터 사랑하는 마음과 희생(犧牲)하는 마음이 생기고, 평등심(平等心)으로부터 욕망(慾望)을 절제(節制)하는 마음과 고난을 이겨내고 극기(克己)하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의 인류가 지혜와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처럼 하나님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7. 홍익인간은 신성인간이 아니니 생사(生死)의 윤회(輪回)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홍익인간사상은 삼신일체 홍익사상과 인연법칙이 인간을 중심으로 적용된 사상이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깨달음으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回)와 인연의 법칙을 깨달았으니, 삼신일체 홍익사상과 인연법칙에 따라 인간계를 윤회하지만, 생사(生死)의 윤회(輪回)에서 일어나는 삶의 여정을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미루어 알 수가 있다. (6)에서 설명한 영력에 의한 것이다.
홍익인간은 윤회를 알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이던 무의식이던 삶에서 능히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할 줄 알며, 삶의 고난은 신성인간으로 가기 위한 기회의 장이기에 오히려 행복과 즐거움이 되고, 죽음 또한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되기에 삶과 죽음에서 초연해질 수밖에 없다. 즉 홍익인간에게 윤회는 기정사실이지만 차원을 오가는 것이기에 이 생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고, 죽음은 차원을 오가는 삶에 있어서의 행복결정권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8. 후술하겠지만 하나님의 홍익인간사상은 웅녀를 통해 단군에게 신성(神性)으로 전해져 홍익인간의 영성(靈性)이 된다.
홍익인간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홍익인간의 씨앗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불성(佛性)이 바로 이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한알의 밀알의 죽음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홍익인간의 씨앗이기 때문에 홍익인간의 영성인간(靈性人間)이 될 수 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이 바로 이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聖靈)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홍익인간의 씨앗임을 의심치 말라.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당신이 한국문화에 이유없이 매료되어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당신의 삶을 사는 것처럼 만들고 싶다면 홍익인간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혹자는 마음대로 생긴대로 살면 되지 왜 굳이 하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이 약 80년이라고 생각해 볼 때 언뜻 긴 것 같지만,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을 빼면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살려고 태어났고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데, 살기 위해서 살아 남기 위해서 밥먹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에 일생의 대부분을 낭비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혹은 내가 왜 이렇게 살고있지 하는 고민 속에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의 인생이 너무 가치없고 가엽지 않은가?
혹자는 또 부귀영화(富貴榮華)와 고대광실(高大廣室) 같은 집 등 실질적인 것들도 많은데, 왜 굳이 돈 안 되는 홍익인간인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답은 간단하다 행복하기 위해서다. 죽으면 버리고 갈 것들 아니 죽음의 순간에 오히려 짐이 될 것들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짓을 굳이 할 필요가 있는가?
홍익인간이 되면 나의 이로움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좋으니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로운 나를 좋아해주니 내가 즐겁다. 내가 즐거우니 스스로 행복하고, 너가 즐거우니 아도 행복하며, 이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우니 이 또한 행복할 수 밖에 없다.기왕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면 좋지않겠는가? 그기다가 다른 사람들 까지 덩달아 행복해지니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뿐인가? 당신이 사후에 인간계의 차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홍익인간의 에너지이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신의 인생이 벼랑 끝에 섰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당신을 좋아해 주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발길이 가지 않을까? 역으로 셍각하면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당신을 끌어당겨 당신을 거기로 가게 하는 것이다. 윤회 또한 마찬가지 원리로 생각하면 된다. 윤회는 인간계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당신을 배척하고 당신도 싫어한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9. 홍익인간사상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종교처럼 어렵고 복잡한 철학사상이나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고도의 수련과정이나 지나친 숭배와 몰입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익인간사상에서는 종교의 오묘한 교리나 철학사상의 심오한 이치를 한마디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불과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남들과 관계가 이루어질 때 역지사지심(易地思之心)으로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배려하고 베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삼신일체 홍익사상과 인연법칙에 따라 내가 모르는 가운데 자연히 인간계로 돌아오게 되어 영생불사(永生不死)가 절로 이루어지는 효과를 얻게 되고, 생사에 연연하지 않아 심신이 편하니 늙음은 자연의 순리일 뿐 마음은 청춘이 되어 불노장생(不老長生)을 누리는 효과 역시 절로 누리게 된다.
10. 위 3의 에너지 등급은 정'기'신(精'氣'神)의 에너지 등급과 관계있는데, 아래로 갈수록 정(精)에 가깝고, 위로 올라갈 수록 신(神)에 가까워진다.
인체로 비유하면 정(精)의 에너지 등급은 오장육부의 정기가 모여 있는 단전(하단전)에 해당하고, 기(氣)의 에너지 등급은 생각과 자율작동의 자리인 머리(상단전)에 해당하며, 신(神)의 에너지 등급은 마음의 자리인 심장과 폐(중단전)에 해당한다. 보통 상단전과 중단전을 정신(精神)으로 묶어 설명하는 것은 이런 까닭인데, 여기서 정신이란 신(神)이 정(精)에 예속되어 생각을 일으키고 몸을 움직이는 사고(思考) 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중단전은 하느님과 하나님이 내린 홍익인간의 신성 즉 성령(聖靈)이 머무는 자리이고, 상단전은 전술했듯이 생각을 일으키고 몸을 움직이는 정신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성령 즉 홍익인간의 마음인 공감능력은 진여(眞如) 혹은 진아(眞我)로 우리말로는 '참나'라고도 하는데, 중단전에서 일어나 해마(海馬, hippocampus)를 통해 상단전에 관여하여 천도에 어긋나는 인간의 정신을 통제한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나 행복하고 즐거운 행동을 할 때 마음이 아프거나 따뜻해지면서 고통과 전율을 느끼는 것은 이런 이유인데, 만약 신(神)이 정(精)에 지나치게 예속되어 존재감이 사라질 경우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게 된다.
11. 마지막으로 지혜를 가진 고등인간은 홍익인간사상의 실패작으로 오늘 날 리더-격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업적도 있고뛰어난 점도 많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스로 쌓은 인연의 악업으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回)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불행한 인간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삶의 짐이 버거울 수 밖에 없고, 질병과 죽음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참나에 반대되는 자아(自我) 즉 에고(ego)의 자리로 동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 이기심으로 가득차 물욕(物慾)과 권력욕(權力慾)이 강하다. 물욕(物慾)과 권력욕(權力慾)이 악업을 만들고 성령을 가려서 생사유전하는 윤회의 악순환을 계속하다, 악업이 쌓이고 쌓여서 인간계가 아닌 다른 치원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무지(無知)와 공감능력 결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12. 흔히 홍익인간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한다." 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간 중심적인 지극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해석이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인간이라고 특별히 다른 대접을 하겠는가? 하느님과 하나님이 육성하고 보호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여 하느님과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도울 홍익인간이다. 여기서 역사(役事)는 하느님의 일을 다루는 의미의 역사이지, 인류사회의 흥망과정을 다루는 역사(歷史)가 아니다. 즉 홍익인간은 자신이 알던 모르던 하느님과 하나님의 일을 돕는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