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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16. 2023

홍익인간 전당 이야기 2

2-2. 재사(再思) 전기 

2. 현생    

 

  꿈 속에서 나의 목이 효수되는 모습과 울부짓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눈을 떴다. 

 내 뺨은 눈물에 흥건히 젖어 있고, 한 켠에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순간 “ 아 나는 그렇게 죽어서 지금 이렇게 조선의 사관(史官)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생각하니 네가 아는 전생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책장의 내용은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 제1 유리왕 편’의 선비족과의 전쟁 대목이다.   

  

 『 BC 9유리왕 재위 11)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고 말하였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용감하기만 하고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하고 물었다. 

 부분노가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는데,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임금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이것은 임금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그는 결국 식읍을 받지 않았고, 임금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문득 꿈에서 내가 죽었을 당시 살아있던 유리왕과 대소왕 갈사왕 도모 등 남은 사람들의 이후 행적이 궁금하여 펼쳐져 있는 책장의 뒷장을 넘겨보았다.     


 서기 4(유리왕 23) 해명태자가 죽은 형 도절 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되었다. 이 해에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할 때, 해명태자는 부왕을 따라가지 않고 졸본(卒本)에 남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로는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고 한다. 

 서기 8(유리왕 27) 봄, 고구려 주변에 있던 나라인 황룡국의 왕이 해명의 무용이 뛰어나고 힘이 세며 용맹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해명은 그 활을 당겨 부러뜨리고는 "내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활이 약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실상 황룡국에 시비를 걸었던 것이라 봐도 무방한데, 아마 "함부로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경고 행위인 듯하다. 어쨌든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한 외교적 결례다.

황룡국 왕이 이를 전해 듣고는 부끄럽게 여기자 유리명왕은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다"면서 화를 내고 황룡국 왕에게 해명을 보내며 그를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3월에 황룡국 왕이 사신을 보내서 해명을 만나려 하자 주변에서 말렸지만, 해명은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황룡국 왕인들 나를 어떻게 죽이겠느냐?"라면서 태연하게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국 왕은 처음에는 해명태자를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직접 보자 기상이 늠름해서 죽이기는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에 예를 다해 대접하고 고이 돌려보냈다. 

 서기 9(유리왕 28) 봄 유리명왕은 "내가 천도한 뜻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해명이 힘이 센 것만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불효하다."면서 자살하라고 명령하며 칼을 내려줬다.

 해명이 곧 자살하려 하자 어느 사람이 말렸지만, 해명은 "지난번에 활을 부러뜨린 것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가볍게 본 것이라 생각하여 보복한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뜻밖에 화를 내고 자살하라 하니 죽지 않을 수 없다."면서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리다 창에 몸을 던져 스스로 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 당시 고작 21세였으며, 사후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이후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유리왕의 삼남인 무휼이 11세의 나이에 태자가 되었다. 

 서기 9(유리왕 재위 28) 8월, 동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대소에게 중국 고사 누란지위(累卵之危)에서 따온 경고를 남겼다. 누란지위는 달리 누란지세(累卵之勢) 라고도 하는데, 알(卵)을 쌓아놓은(累) 듯 위태롭다(危)는 뜻으로, 백척간두, 초미지급, 풍전등화와 의미가 같다. 

 서기 13(유리왕 재위 33) 가을 8월, 임금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서기 13유리왕 재위 33)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했다. 이 학반령 전투에서 부여군은 크게 패배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고,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서기 18유리왕 재위 37) 4월, 유리왕이 총애하던 6남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고 이에 왕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후에 다른 사람이 시체를 찾아냈고 유리명왕은 그에게 상을 주었다. 여진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인지 여진이 죽은 지 1년도 안 돼서 유리명왕은 향년 56세에 두곡의 이궁에서 승하했다. 두곡의 동원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서기 18(대무신왕 1) 무휼태자가 15세의 나이에 유리명왕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다. 

 서기 20대무신왕 3)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붉은 까마귀 사건으로 동부여와 전쟁의 조짐이 일어났다. 

 서기 21(재위 4) 겨울에 군대를 내서 숙적 동부여를 공격했다.  동부여를 공격할 당시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비류수 가에서 물가를 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 나중에 한 장부가 나타나 그 솥은 자신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왕이 찾았으니, 자신이 솥을 지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 후  이물림(利勿林)에서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서 밝은 뒤에 찾아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북명(北溟) 사람 괴유라는 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이 정벌을 하러 떠난다니 자신은 부여 군주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하여 왕이 따르게 했다. 또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라는 자가 나타나서 왕을 따라서 창으로 길을 열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했다. 

 서기 22(재위 5) 봄 2월에 동부여국을 멸망시켰다. 당시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그때 부여의 대소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하였으나 군대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지고, 급기야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참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왕의 죽음에 분노한 부여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고구려군을 둘러싸 위기에 빠졌는데, 대무신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안개가 피어올라 7일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기를 쥐여 거짓 군사를 군영에 만들어 놓은 다음 샛길로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신마 거루와 비류수에서 얻은 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루는 이듬해 3월에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서기 22(재위 5) 대소왕 사망 후에 동부여는 분열되어 크게 쇠퇴하였다. 대소왕의 동생 도모는 마한의 일부 지역에 남부여를 세웠고, 막내였던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피난하였다.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발견하여 그를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22년 음력 4월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나라를 갈사국 또는 갈사부여라 부른다. 속일본기에 “ 엔랴쿠 8년에 백제인들이 직접 전한 백제 부여씨 왕실의 출자에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해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는데, 황태후는 곧 그의 후손이다.”라는 대목이 있고, 위서에서도 “나는 태양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我是日子, 河伯外孫)이다.”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으며, 부여인들의 대표 성씨인 해씨(解)가 순우리말 해(태양)을 음차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도모왕은 아마도 금와왕과 유화부인 사이의 아들로서 대소와는 배가 다르고 동명왕과는 씨가 다른 형제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서기 26(재위 9)에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고, 같은 해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서기 28(재위 11)에 한 요동 태수가 공격해왔으나 위나암 성에서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굳게 지켜서 막아냈다. 

 서기 32(재위 15) 사신을 파견해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왕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같은 해 최리의 낙랑국의 항복을 받으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로 유명해졌고, 호동왕자 자신도 계략을 통해 낙랑을 정벌했듯이 계모인 원비(元妃)의 계략으로 모함을 받아 왕명으로 자결했다.     


 역사를 보니 유리왕으로부터 그 아들인 대무신왕까지 외침(外侵)과 권력투쟁으로 피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외침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나, 서로 상부상조하며 이로움을 추구하던 신교의 전통이 동족과의 권력투쟁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유리왕이 가정을 꾸리는 모습이나 무휼태자에 대한 이야기조차 비정상적이기만 하다. 

 유리왕이 자국인인 고구려 골천(鶻川) 사람 화희(禾姬)와 외국인인 전한(前漢) 사람 치희(稚姬)를 동시에 후실로 들이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명색이 그래도 일국의 왕인데, 국적이 다른 두 명의 여인을 동시에 들여서 굳이 문제를 만드는 것은 모자라거나 정신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무휼태자에 이르러서는 10세에 학반령 전투에서 부여군을 모두 격파하여 죽이고, 11세에 태자가 되는 데, 무휼을 태자로 만들어 후에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역사를 위조한 듯한 의혹이 든다. 더욱이 유리왕 때에 첫째인 도절태자(서기 1년)가 사인 불명으로 죽고, 이어서 유리왕이 둘째 해명태자(서기 4년)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 모습 역시 단순한 죽음이 아닐 것이라는 의혹이 들게 한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 해명은 왜 아버지 옆에 안 붙어 있고 구도에 남아 있으면서 무용을 즐긴다는 소문이 퍼지게 해서 유리명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유리명왕은 아들이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고 가르칠 일이지 왜 내버려 두고 감정만 키우다가 폭발하자마자 한 마디로 죽였느냐? 그렇다고 죽는 해명의 행동 역시 너무 과격하다. "고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고 있다. 한 마디로 아들은 행동을 잘못했고 아버지는 교육을 잘못시켰다는 것이다. 

 김부식의 비판에는 문제가 있는 게, 당시에도 그랬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제군주시대에 왕이 자기 마음에 맞는 아들을 세우기 위하여 패륜을 벌인 사례가 부지기수로 많으며, 아들이기 이전에 신하이기를 강요했던 시대 상황에서 아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조선 시대 성호 이익은 "나라가 막 세워졌고 주변 국가들을 막 병합해 나라를 불려가는 참인데 용맹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구도에 남은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애초에 태자로 삼기는 왜 삼았냐, 다른 나라와 척지는 것이 걱정이었으면 나중에 부여 사신한테 개긴 무휼은 또 왜 안 죽이고 놔뒀냐" 며 유리명왕의 행동을 비판했다.     


 조선 시대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은 모두, 해명태자의 죽음에 무휼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해명태자가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졸본성에 남아있던 점과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비류국 송양의 딸임을 감안하면, 둘은 동복형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보다 해명태자가 자결할 당시 무휼은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로, 해명의 죽음에 배후라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따라서 무휼이 배후이긴 하지만 원인은 무휼의 외가에 있을 것이다. 사실 직접이던 간접이던 무휼이 배후가 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유리왕의 마음이 무휼의 편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해명태자의 죽음은 묘하게 조선의 소현세자 및 사도세자와 겹치는 면이 있다. 

 유리왕과 인조와 영조 셋 다 부왕의 왕위계승에 논란이 있었던 점(동부여에서 굴러들어온 돌이었던 유리명왕, 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한 인조, 무수리의 아들 영조)이 비슷하다. 그리고 인조를 제외한 두 군주 모두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발휘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경우 둘 다 부왕(고구려 동명왕, 조선 인조)의 심기를 거슬러서 부왕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의혹과 죽음을 맞았다는 점과 대신 다른 후계자가 부왕의 뒤를 이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경우는 둘 다 형(고구려 도절태자, 조선 효장세자)이 죽은 뒤,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되었고, 힘이 세고 무예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하지만 해명태자는 수없이 환관과 궁녀를 죽이고 그도 부족해서 본인의 후궁중 한 명인 경빈박씨를 때려 죽인 상습살인범 사도세자와 달리,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묘하게 소현세자와 더 겹치는 인물이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도 비슷하게 부왕의 의심을 사서 자결하는데, 이런 걸 보면 고구려 초기의 왕실 문화는 꽤나 거칠었던 것 같다.      


 어쨋던 BC 33년(동명왕 4년) 주몽이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어 전제 군주 시대의 서막을 열고, 유리가 그 뒤를 이어 유리명왕(瑠璃明王)으로 전제 군주 시대의 토대를 만들고, 3대인 무휼이 전쟁의 신· 큰 무예의 신· 북국신왕(北國神王)이라 불리며 정복전쟁으로 고구려 초기의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전제 군주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는 것은 신교(神敎)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유리왕이 무당과 무속을 믿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실임을 알 수 있는데, 한민족 최초의 민족정신 말살이라 할 수 있다. 동명왕이 스스로를 단군의 후예로 칭하면서 초심을 버리고 전제 군주 시대를 열어 민족정신을 말살한 대가는 동명왕과 대무신왕 대에 권력다툼에 의한 아들들의 죽음과 정복 전쟁에 의한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난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덧없는 인생, 잘 못살면 다시는 태어나지 못하는 불안한 인생이고, 그런대로 살아서 다시 태어났다 하여도 요행히 단 한 번 사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가엾은 인생인데, 단군의 자손으로 태어난 동명왕은 초심을 버리는 대가(代價)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유리왕과 대무신왕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질 만큼 가졌는데, 그렇게 욕심을 부려 더 얻어진다 한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 잊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욕심으로 생명을 잃은 혈육과 백성들의 한(恨)이 되어 피가 인과(因果)의 실타래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내가 왜 이렇게 고구려사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겠다. 

 전생에서 선배 선인들은 나와 무골과 묵거에게 옛날 홍익인간의 지상천국이 있었음을 이야기 하며 누누이 권력을 멀리하라고 가르쳤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명왕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도왔다. 내가 당시 무골과 묵거와 함께 동명왕을 도운 것은 중국에서 한족(漢族)들에게 밀려 한반도로 쫒겨 났던 우리 신도들과 한민족의 백성들이 그저 서로 도우며 안락하고 이롭게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결국 동명왕은 왕이 되자 “아버지의 나라로 가서 그런 나라를 세우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깨고, 권력의 대물림으로 자신만의 나라로 만들어 자기 입맛에 맞는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으며, 그 아들과 손자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죽음의 순간에 그들의 최후를 보기를 염원했고, 그래서 지금 조선 세종 시절의 역사가로 다시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시를 못 맞추어 잘못 태어난 것 같은데, 세종임금의 치적을 보면 성군이기는 하나, 지금의 조선은 사직 종묘 제사가 국가 중대사인 유교 사회이고, 특히 세종은 천자의 고유권한이라는 이유로 원구단의 제천의례까지 폐지한 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제군주국가에서 말단 역사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전생에 이어 두 번째의 실패인 것 같다.       


 역사에서는 동명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고 유리왕을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 하여 성스럽다거나 현명했다고 기록하지만, 순간적인 일신의 영달을 위한 업적이었을 뿐 과연 무엇이 성스럽고 현명했는지를 모르겠다. 그 손자이고 아들인 대무신왕 역시 마찬가지로 전쟁과 무예신왕(神王)이라는 이름 뒤에는 무자비한 피의 살육과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이 숨어있다. 

 어쩌면 성왕(聖王)과 명왕(明王)과 신왕(神王)이라는 이름보다는, 지옥을 만든 귀왕(鬼王)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원했던 결과는 아들들의 한 맺힌 죽음과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이었음을 그들은 몰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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