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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Jan 13. 2024

홍익인간 전당 이야기 6

일연선사(一然禪師) 전기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 이야기는 여섯번째 이야기 주인공으로 일연선사 즉 일연스님을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일연스님은 한민족사 최초로 단군신화를 통하여 고조선 시대의 역사를 처음 밝힌 인물이고, 대한민국의 건국 교육이념이자 글로벌 철학사상인 홍익인간사상(弘益人間思想)과 홍익인간 정치사상(弘益人間 政治思想)을 처음 이야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를 토대로 일연스님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보라색 문장은 각색한 이야기이고, 파란색 문장은 일연스님에 관한 역사이며, 검은색 문장은 일연스님이 살았던 시대의 고려의 역사이다.     




일연스님 전기     


  내 이름은 전견명(全見明), 법명은 일연(一然)으로, 75세 여몽 일본원정 전쟁이 시작될 때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해 76세 여몽 일본원정 전쟁을 끝내는 시점에 초고(初考)를 완성하였다.

 이제 교정과 발간만 남았으니, 필생의 꿈을 이루어 살아서 해야 할 일을 다 해가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낙엽이 흩날리는 늦은 가을날 오색에 물든 운문사(雲門寺) 뜨락을 하늘 가득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를 보며 거닐고 있다. 아마도 아궁이에서는 맛있는 저녁 공양을 준비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76세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는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던가,      

 70세까지만 살아도 아주 오래 산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80을 바라보고 있다.

 살만큼 살았고 해야 할 일도 할 만큼 하며 살았다 싶은데, 갑자기 왕이 정식으로 조정에 들어와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청한다.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지난 세월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1. 현생 

     

(1) 탄생과 유년기


 나는 1,206년( 21대 희종 3년)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일하여 원제국을 건설한 해에 경산에서 태어났고, 내 이름 견명(見明)은 어머니께서 “꿈에 빛이 환히 비치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 김언필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 이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당시는 1,196년 집권한 최충헌의 무신정권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고, 최충헌이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진 교종불교계를 약화시키고 통제할 생각으로 무신정권을 시작하면서부터 펼쳤던 불교 탄압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무인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듯하여 칼을 차고 활보하는 위압감만으로도 공포였는데, 무인들이 말을 타고 사람들이 많은 저자거리를 함부로 내달려 노인이나 아이들이 말발굽에 치이고 다치는 일도 허다하였으니, 그야말로 야만(野蠻)의 시대였다.  


(2) 출가(出家)


  나는 8세(1214년, 23대 고종 2년)에 전라도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대웅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대웅은 스님으로 숨어 살던 은거도인(隱居道人)이었는데, 불교(佛敎)는 물론 유교(儒敎)나 선도(仙道) 등의 학문에도 정통하여 나에게 가르쳐 주었고, 나는 특히 불교에 심취하였다.

 보통 출가하면 스님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출가한다고 무조건 바로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행자승으로 열심히 불경을 외우며 밥을 짓고 물을 긷는 등 불목하니로 일하다, 대웅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히는 과정에서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1216년(고종 4년), 내가 출가한 2년 후 10세가 되던 어느 날, 보살님 들로부터 강동성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른바 강동성 전투로, 당시 보살님들의 말에 의하면 “거란 잔당이 고려를 침략했는데, 몽골 제국이 여진족의 동하와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후요)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쳐들어왔고,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 제국-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했다. 몽골 제국이 이를 계기로 고려에 마치 큰 은혜나 베푼 듯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몽골 제국의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린다.”고 하였다.  

     

 이하 내가 충열왕을 만나기 전까지의 모든 속세 이야기들은 보살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들이다. 흔히 스님들이 세속과 연을 끊고 사는 줄 아는데, 절이란 곳이 원래 권문세가의 안 사람들이 보살을 자처하며 많이 찾아들어 권력과 관계가 깊고, 승려들이 워낙 안 가는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살의 수가 많아 생각보다 세속의 정보가 빠르고 정확한 편이다.       


 1217년(고종 5년), 내가 출가한 3년 후 11세가 된 어느 날, 본사인 동화사, 부석사, 부인사, 쌍암사, 흥왕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등 교종불교 세력 승려들이 문벌귀족 세력과 연합하여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공격했다.

 최충헌이 공격을 물리친 후, 고려 건국 시 몰락했던 선종 불교와 손을 잡으면서 선종 불교가 회생(回生)되었는데, 스님들은 다행히 운문사가 선종(禪宗) 선사(禪寺)라 오히려 희소식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3) 승려 입적(入籍)과 수행(修行)      


  13세(1219년)에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은거하여 수련하던 강원도 양양에 있는 설악산의 진전사(進箋使)에서 정식으로 입적하여 일연(一然)이라는 법명을 받고 선종(禪宗) 승려가 되었다. 진전사는 821년(신라 헌덕왕 13년)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를 창시한 곳이다.     


 승려가 된 후 산사를 순례하며 수도에 힘썼고, 21세(1227년)에 승과 시험에 합격해서 22년 동안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비슬산 대견사에서 초임 주지를 지냈다. 1237년(31세) 삼중대사가 되고, 1246년(40세) 선사가 되었다.


 내 나이 25세(1,231년)~ 25세(1,231년) 사이에 몽고의 제1차 침입이 있어 많은 백성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어이없게도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했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골군 격퇴의 공을 높이 평가한 조정은 반란을 용서했다. 다만 당시에는 관리들이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처벌하거나 관가의 재물을 빼돌린 후 백성을 대신 처벌하는 일이 많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처벌의 수준 또한 가혹하였다.

 어찌했던 제1차 침입은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우가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었고, 왕정이 사실상 인질로 억류되면서 종료되었다.     


  내 나이 26세(1232년)에 몽고의 제2차 침입이 있었다.

 제2차 침입 때 당시 최우는 삼별초를 만들어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몽고는 서경·개경·남경을 차례로 함락하며 남하하다 처인부곡에서 김윤후라는 승려의 화살에 사령관인 살리타이가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했으며, 이 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

 이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내 나이 29세(1235년)~ 33세(1239년) 사이에 몽고의 3차 침입이 있었는데, 전란 속에서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황룡사가 불에 타서 전소되었으며, 황룡사 대종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몽고군이 경상북도까지 공격했는데,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며 저항했고, 부처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1236년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몽골군의 만행이 극에 달해 아비규환이 되었으니, 가히 지옥과 다름없었다.     


 내 나이 32세(1238년) 겨울, 결국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도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4월에 철수했다. 철수 후 고종은 약조를 이행하지 않고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고종은 그 후 몽골이 입조를 독촉하자,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자신의 아우라 칭하며 대신 보냈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년)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내 나이 41세(1247년)~ 42세(1248년) 사이에 몽고의 4차 침입이 있었다. 1247년 7월에 아무칸(阿母侃: 아모간)이 고려를 침략하여 염주(鹽州)에 진을 쳤지만, 1248년에 구유크 칸이 붕어하고 후계자 문제로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 사이에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며 임시 철군했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고려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뻗대고 있었다. 그러자 1249년 9월부터 1250년 2월까지 몽골의 속국인 동진(東眞)의 군대가 쳐들어와 이를 막아냈으며 그러던 중에 고려의 권력자였던 최우가 1249년 11월에 사망하고, 뒤를 이어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다.


(4) 입신(立身)과 정진(精進)


 47세(1253년)에 남해의 정림사 주지가 되었고, 53세(1259년)에 대선사가 되었다.

 56세(1261년)에 원종(元宗, 24대)의 부름을 받고 강화군 선원사의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보조국사 지눌은 교종과 선종의 갈등 속에서 선종 결사 운동을 주도하였고,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로 대표되는 불교의 사상적 기초를 확립하신 스님이다.


 내 나이 47세(1253년)~ 48세(1254년) 사이에 몽고의 4차 침입이 있었다.

 몽고는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어 1253년(고종 40년) 황족인 보르지긴 야쿠를 시켜 고려를 침공했고, 고려가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철원)·춘주(春州: 춘천)·양근(楊根: 양평)·양주(襄州: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다행히 충주성엔 21년 전 처인성 전투의 그 김윤후가 있어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1개월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 항전으로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결국 최씨 무신정권의 새 집권자가 된 최항이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했다. 안경공 왕창은 몽골에서 생활하다가 1254년 8월에 고려로 귀국했다.     


 내 나이 48세(1254년, 고종 41년)에 몽고의 제6차 침입이 있었다.

 몽케 칸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했다, 결국 음력 7월 잘라이르 자랄타이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고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다.

 자랄타이는 수군까지 동원하여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른바 다인철소 전투로 이 전투 역시 중앙군 없이 주민들이 향리인 지씨와 어씨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막아냈는데, 이 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하고 다인철소의 천민들도 모두 면천되었다.

 하지만 몽고는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눈앞에 두었는데,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령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다. 그러나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입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여 고려사에서 포로가 206,800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했을 정도였다.     


 내 나이 49세(1255년)~ 50세(1256년) 사이에 몽고의 7차 침입이 있었는데, 사실상 제6차 침입 이후의 연속 전쟁으로 몽골군의 장기 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몽골은 1255년 2월부터 8월까지 지속적으로 국지적인 약탈을 자행하다가 9월에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삼고,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이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군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내 나이 51세(1257년, 고종 44년)에 몽고의 8차 침입이 있었다.

 고려에서 해마다 보내던 세공을 중단하자 분노한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했다. 그 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고려 조정은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의 허락을 얻었는데 몽케 칸은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했다. 하지만 최의는 그 다음해 무오정변으로 김준 일파에게 살해당했다.     


 내 나이 52세(1258년)~ 53세(1259년) 사이에 몽고의 9차 침입이 있었다.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쪽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폈는데,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1개월 만에 자랄타이를 앞세워 또다시 침입을 개시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항전하는 방식을 택했다.

 1259년 7월 고종이 승하하여 태손 왕심(王諶, 훗날 충열왕)이 대리청정을 했고, 그해 8월 대몽고 강화가 이루졌는데, 몽골의 몽케 칸이 붕어하고 몽케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서 칸위 계승 전쟁(툴루이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 왕전(王佺)이 이후 새롭게 제5대 대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내 나이 54세(1260년) 태자 왕전이 귀국하여 승하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고, 태손 왕심은 태자가 되었다. 이때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인 쿠빌라이(세조)가 세조구제(世祖救濟)라하여 원종에게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속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선언을 하였다고 하는데, 백성들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원종은 기나긴 전쟁이 끝나 환도를 원했지만, 고려 조정의 의견 불일치로 개경 환도(還都)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 왕심을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5) 출세(出世)


 59세(1264년)에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원의 속국이 된 백성들을 깨우쳐 나라를 구하고자, 두륜산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偏曹揀五位)를 간행했고, 그 후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오어사로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조동오위설은 중국 선종의 일파인 중국의 동산양개(洞山良介)가 제창한 편정오위설(偏正五位說)을 말하는데, 나는 이 오위설의 편정(偏正)에 각각 군신(君臣)을 대비시켜 군신오위설(君臣五位說)로 설명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② 63세(1268년) 충북 운해사에서 대덕 1백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를 조직해 맹주가 되었다.  


 내 나이 63세(1268년) 때 김준을 살해하고(무진정변) 임연이 새 집권자가 되었는데, 임연은 그해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임시로 즉위시키니 이 사람이 영종이다. 그러나 영종은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에 물러나 원종이 복위하였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임연의 뒤를 이은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했지만. 몽골의 군사적인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경오정변으로 살해되었고,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 지 10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배중손과 김통정 등 일부의 무신들이 친원정책에 극렬히 반대하며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고, 진도와 제주도로 계속 근거지를 옮겨가며 원나라와 고려 왕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와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 세력을 구축했고,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1271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1273년 제주도에서 김통정이 살해된 후, 삼별초가 전멸당하면서 무신정권은 끝이 났다.


  원종은 무신정권이 끝난 이후,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 칸의 요구로 일본 원정을 위한 대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해 원나라로 가는 공녀(貢女)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원종은 1271년(원종 12년)  왕권 강화를 위해 원에 통혼을 요청하였고, 6개월 후 왕녀인 정화궁주와 혼인하여 장성한 자녀까지 둔 유부남이었던 태자 왕심은 천여 근의 금을 마련하여 원나라로 갔고, 1년 반쯤 지난 뒤인 1274년(원종 15) 5월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1274년 원종이 고려 왕조가 몰락으로 향하던 시기를 지켜보다가 향년 56세를 일기로 붕어했고, 태자 왕전이 돌아와 즉위해 충열왕이 되었고, 이때부터 몽고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종은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宗)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아들인 충렬왕은 제30대 충정왕까지 모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忠) 자를 붙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충열왕은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충렬왕의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부왕 원종 시절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쿠르겐)가 되면서 대칸의 간섭이 더 심해졌지만. 사실 충렬왕은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나름대로 나라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대칸 겸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아들 충선왕보다도 서열은 낮았지만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었으며, 원나라의 사신과 다루가치들도 충렬왕으로부터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로 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충렬왕 즉위 원년(1274년) 고려는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정복한다는 정일론(征日論)을 방침으로 세워 일본 가마쿠라 막부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쿠빌라이 칸이 충열왕 즉위 즉시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훈둔을 사령관으로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여몽연합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태풍 카미카제(神風, 신풍) 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 왕사(王師)


 1차 여몽 원정 전쟁(1271~1273년)이 끝난 4년 후인 1277년, 72세의 나이에 당시 경주에 와 있던 충열왕(재위 1274~1308)의 부름을 받았다. 충열왕에 대한 소문이 너무 좋지 않았기에 너무 연로하여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핑계 대며 거절하였으나, 대신 난세의 환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왕은 수차례 찾아도 계속 거절당하자, 어느 날 나를 청도 운문사(雲門寺) 주지에 앉히며 법문이라도 강론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못해 수락하고, 왕에게 1년 가까이 법을 강론하면서 왕의 고충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속세의 권력 다툼에 끼이고 싶지는 않아도 거절했다.

 왕은 몽고의 지배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서 도와달라고 간청하였고, 결국 나는 1278년(73세)에 백성들이 무신정권과 몽고의 칼날과 말발굽 아래 짓밟히다 이제 끝끝내 원의 속국이 되어 여인들이 공녀로 차출되기까지 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1278년(73세)~1283년(78세)까지 5년 동안 운문사에서 충열왕의 자문역할을 하면서 백성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려 애썼는데, 몽고 침략의 후유증과 여몽 일본원정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고, 백성들을 일깨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였다. 삼국유사 초고(初考)를 끝낸 것도 이때의 일이다.


 내가 왕명을 받들기로 한 다음 해인 74세(1281년), 쿠빌라이 칸은 일본 정벌 직전 군사령부로써 요양행성의 요양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2차 여몽 일본원정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 원정에 참여한 김방경조차 직접 반대의 표문을 올릴 정도로 정벌의 필요성보단 오히려 회의를 느낀 전쟁이었는데, 애초에 고려 땅 늘리자고 하는 전쟁도 아니라, 원나라 땅 늘려주자고 하는 전쟁이었지만, 원의 부마국까지 된 처지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피해가 적었을 뿐이지, 일본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굶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부역에 끌려간 백성들도 사고 혹은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면서 사회 전체가 파괴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다만 원나라 역시 속국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공급)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고,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하느라 제주도에 말이 많아졌다.


(7) 은퇴(隱退)


  1283년(78세) 왕이 계신 개성으로 올라가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불리며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었다. 국사는 종신직이라 개경에 머물러야 했지만, 애써 노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은퇴를 청해 고향인 경상북도 군위에 내려갔는데, 그해 반년 만에 어머니가 아흔여섯 살로 숨을 거두었다.

 1284년(79세)에 군위에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를 연 후 인각사로 돌아가 삼국유사를 출간하였다.    




2. 사후(死後) 열반(涅槃)     


  문득 상좌승이 “큰 스님 공양드실 시간입니다.”고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다 보는데, 수많은 사부대중과 보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의 다비식(茶毘式)이 거행되고 있다.    

  분명 운문사 뜨락을 걷고 있었는데 무슨 상황이지 생각하다가, 문득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전생에 산신(山神)이 된 단군이었는데, 첫 번째에 박혁거세로 환생하여 한반도에서 고조선의 신교(神敎)를 부활하려다 실패한 후, 두 번째에 일연으로 환생하여 인각사(麟角寺)에서 열반에 들면서 잠깐 운문사에서 삼국유사 초고를 완성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와서, 낙엽이 흩날리는 늦가을날 굴뚝에서 하늘 가득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보며 오색에 물든 인각사 뜨락을 한 바퀴 돈 후, 입적(入寂)하였던 것이다.

 죽기전에 열반에 이르러 모든 것을 깨닫게 되어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불교 속에서 성취를 이루었으니 이또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일연으로 살면서 국사가 된 지 4년 만인 1289년(84세)에 입적(入寂)하였는데, 내가 살던 시대는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쪽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선종 불교가 일파가 되고, 사대(事大)를 국시로 삼아 압록강 이내에서 편안하게 지내자는 교종불교와 유교도가 다른 일파가 되어 대치하고 있었고, 산속에 숨어 승려로 은거하여 사는 선도의 화랑 무사 파가 있었는데, 무신정권과 그 이후의 문신과 문신의 다툼 외에 유교와 불교 그리고 불교 종파 간에도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 안팎이 온통 파탄에 빠져 있었다.        


 당시에는 불행하게도 나라 안팎으로 파탄이 가득한 이런 총체적 난국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이 없었다. 삼국시대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단군신화의 역사와 정신이 당시에는 거의 사라져 보이지 않을 만큼, 힘 있는 자들과 식자층(識者層)은 권력 다툼에 눈이 멀어 우매했고, 백성들은 삶의 고난에 빠져 우매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역사(歷史) 기록으로 너무 권력과 유교적 사대주의에 치우쳐있었고, 우리 민족 고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비스런 선도의 화랑 무사나 불교적인 요소들이 너무 배재되어 있었기에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삼국유사(三國遺事) 책 이름에 ‘버려져 있지만 남겨야 할 사실'이란 의미의 유사(遺事)를 사용한 이유이다.  

    

 나는 어둡고 참혹했던 시절을 백성의 일원으로 함께 하면서, 불교와 민족 고대사 특히 단군신화를 통하여 잃어버린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긍지를 일깨워줌으로써 파탄에 빠진 백성들과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삼국유사 외에도 앞서 언급한 중편조동오위(重偏曹揀五位)·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어록(語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등 많은 불교 저서를 남겼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민족 고대사인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실은 일이다.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가 아니라도 찾을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뿌리가 되는 단군신화는 오직 삼국유사에만 있기 때문으로, 내가 삼국유사를 쓰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과 고조선의 종교인 신교(神敎)와 신교의 가르침인 선교(仙敎)의 홍익인간 사상(弘益人間思想)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인데, 삼국유사를 쓰면서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기전 열반에 들면서 깨달은 것을 보면, 이곳으로 오기 위해 소비한 영력이 75년의 공부와 84세의 인생 경험을 모두 써야할 만큼 컸나 보다.


  어쨋던 나는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다시 산신의 차원으로 돌아가겠지만, 지금의 고려 백성들이 단군신화를 통하여 몽고의 압박과 권력투쟁으로 인한 고난의 역사에서 벗어나 이 어려운 시대를 이겨내기 바라고, 고려 이후의 역사에서도 후손들이 단군신화를 통하여 힘을 합쳐 닥쳐오는 역경을 이겨내어 홍익인간 정신으로 대대손손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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