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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Jan 20. 2024

홍익인간 전당 이야기 7

세종대왕 전기 (1)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이야기는 일곱 번째 이야기 주인공으로 세종대왕을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세종대왕을 홍익인간 전당 이야기의 일곱 번째 주인공으로 올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나 조선시대에 태어난 첫 임금으로, 31년의 재위 치세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고, 역대 한국사 군주 가운데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이 통용되는 군주이기도 하며,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과 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세종은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토대로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파란색 문장은 각색한 이야기이고, 검은색 문장은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역사이야기이다.  

      




세종전기     


 내 이름은 이도(李裪), 조선 백성들을 다스리는 세종대왕이다.    

 

 나는 지금 나의 꿈을 보고 있고, 꿈 속의 나는 현실처럼 지나간 세월의 수많은 일들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잤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면서 나였다가 때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고 있고, 꿈을 보는 나는 꿈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기뻐하거나 혹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오열하기도 하는데,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나인지 꿈속의 내가 나인지 알 수 없다.      

 어찌했던 이제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꿈속의 나를 따라 나와 아버지의 삶으로 들어가 보려한다.    

 

 1. 첫 번째 꿈     


 꿈속의 나는 이방원,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난다.

 나의 형제는 장남 이방우·차남 이방과·3남 이방의·4남 이방간·6남 이방연으로 5명이 있다.   

  

 1384년, 나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고,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때 까지만 해도 나의 삶은 순탄하다. 

 조선 개국 직전인 1392년, 내 나이 26세 되던 해, 나의 어머니였던 정비(正妃) 한씨(韓氏)가 사망하여 당시 계비(繼妃)였던 강씨가 정비가 되고, 조선 개국 후 어머니에게 절비(節妃)라는 시호가 내려지며, 개국 당시 정비였던 강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라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된다.     


 내 나이 27세(1393년), 첫째 형이었던 장남 이방우는 날마다 술을 좋아해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다가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이미 사망하고, 28세(1394년) 조선 개국 1달여 만에 이복동생인 차남 이방석이 불과 10살의 나이로 신덕왕후의 욕심과 태조의 입김에 따라 장성하고 쟁쟁한 형들을 죄다 밀쳐내고 왕세자가 된다. 

 아버지는 이복동생인 형 이방번이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라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고, 아마도 당시 왕후의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의 입장을 보아 그랬던 것 같은데, 나와 형제들은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소외감과 위기감을 느낀다.     


 특히 나는 위화도 회군에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등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고려 충신으로 남겠다며 끝까지 적으로 맞섰던 정몽주를 죽여 고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등 조선건국에 지대한 공을 많이 세웠음에도 새파랗게 어린 막내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게 되고,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 어찌보면 나에게는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당시 나의 친형들은 정치적 기반이 없어 정계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이복동생인 이방번과 이방석은 겨우 10살쯤으로 어렸지만, 나는 당시 28세로 능력도 뛰어나고 추종자도 많아서 만약 다음 왕을 고를 경우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는데, 만일 장자 계승의 원칙 따라 방우나 방과가 세자가 된다면 나는 왕좌에서 완전히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했던 나는 아버지가 왕이 되어 왕자로서 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지만, 정작 정몽주 척살로 인해 아버지에게 미움을 샀는지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된다. 

 물론 이유는 있다. 정몽주 척살 모의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참가했으나 아무도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았고, 결국 내가 척살을 실제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아버지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나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의 역성을 돋구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정몽주를 아꼈다는 것과 그렇게 대들다가는 그 날로 아버지 손에 끝장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살려두기에는 정몽주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를 죽이고도 감정적 동요가 없는 사이코패스가 되어야 하고, 또 누군가 아버지의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면 내가 되어야 한다.   



 (1) 제 1차 왕자의 난     


 1396년 내 나이 30세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명분으로 병권 집중화 운동을 벌여 사병 혁파가 시작되어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다음 해인 1397년 내 나이 31세에 아내인 군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6남인 막내 이도(李祹)를 낳았는데, 아명(兒名)을 막내를 의미하는 막동(莫同)으로 지었고, 위로 다섯 명의 형이 있었으나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조선건국 전에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란다.  

    

 결국 나는 다음 해인 1398년 형제들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데, 왕명에 의해 세자의 친형 이방번이 거느린 시위대 외에 모든 왕자들의 시위대 폐지가 공포되어 시위대를 모두 잃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나는 친형제들과 방계 종친들을 설득해 정도전의 사병 혁파 등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 이들과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1392년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할 때 가담하여 나를 도왔던 왕후의 오빠인 민무구와 동생 민무질이 반란의 일등공신이 된 이숙번을 만나게 해주는 등 나를 도왔고, 특히 나의 아내 원경왕후는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하고, 이방원과 형제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나의 반란군이 경북궁으로 진입할 때 나를 지지하던 관군들이 함께 하고, 세자 이방석이 친위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다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 감히 저지하지 못하며, 결국 반란군은 정궁인 경복궁을 쉽게 점령한다.

 정도전은 사병 혁파 등 급격한 개혁으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하고도 큰 경계를 하지 않았던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이 실행되던 당일에 남은과 태평하게 남은의 첩실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잡혔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나는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왕위를 찬탈하며 정안공(定安公)이 되고, 이복형제인 왕세자 이방석과 왕자 이방번을 죽이고, 태조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정도전 일파 개국공신을 숙청하며, 이때 나의 여동생이었던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대의 중진이었던 이제(李濟)도 살해된다.   

  

 그로부터 2달여 뒤 아버지는 당시 장남이 되었던 차남 이방과에게 양위하고, 이방과가 왕이 되어 정종으로 즉위하며, 나는 적장자가 없는 형 정종의 왕세자로 책봉된다. 형의 뒤를 잇는데 왜 세제(世弟)가 아닌 세자(世子)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냥 무시하고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라며 반박하며 화통하게 나를 곧바로 세자로 책봉해 준다.

 나의 권력 장악으로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원로 개국공신 및 나의 심복인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 등이 실권을 잡았고, 정종은 내가 세자가 되어 실권을 모두 쥐고 있기에 허수아비에 불과해 격구나 사냥을 즐길 뿐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아마도 왕자 시절에도 직접 왜구를 소탕하러 가는 등 일생 대부분을 무인으로 살아왔다고 하는 그에게 궁궐에서 격구나 사냥으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삶이 성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2) 제 2차 왕자의 난     


 내 나이 34세(1400년), 형 이방간이 나의 참모인 박포를 앞세워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전절제사로 있으면서 나에게“정도전(鄭道傳) 등이 정안공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큰 공을 세운 무신이었다. 

 나는 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 논공행상에서 정략 상 당시에 나에게 무릎꿇은 것 말고는 딱히 한 일도 없는 조준과 김사형 등의 원로들을 일단 1등 공신에 올리는 반면, 정작 나의 최측근으로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핵심실세들인 박포·이숙번·민무구·민무질 등은 일단 모두 2등 공신으로 내린다. 

 박포는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뒤에서 떠들다가 나에게 등을 돌리는 입장이 되고, 박포는 마침 나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방간에게 접근하여 '방원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꾀며 나를 쳐내고 대권을 차지하라고 부추긴다. 박포의 이런 행동이 나의 지시나 충동질 때문이었는지 박포의 단독행동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은연중에 그를 충동질했던 것 같다.     


 어찌했던 이방간이 주동하여 친형제들과 함께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데, 원래부터 대군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내가 대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대권 욕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박포의 꾐에 빠져 대권에 욕심을 내게 되었는 알 수 없으나, 사병을 동원해 나를 직접 치러 나서게 된다. 

 이방간은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은 다음에 나를 치러 나서서 개경 시내에서 두 부대 간의 접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정종에게 거병 사실을 알리고 상왕전을 지나면서 태조에게도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정작 이방간을 충동질했던 박포는 당시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집에서 자고 있었으니, 내가 충동질 한 것이 맞는 것 같다.

 태조와 정종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방간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길 수 없으며 권력욕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고, 이방간을 돕기는커녕 죄다 대놓고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냐며 다들 절규에 가깝게 뜯어말리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방간은 전의를 상당히 상실한다.      


 결국 이방간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거병을 해버린 마당에 해산시킬 수도 없어 결국 단독으로 나를 치기로 결정한다. 

 나는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했으나,“어찌 아우가 형을 칠 수 있겠냐”며 소리치다, 이화의 “어찌 사사로운 정에 국가의 대사를 저버리려 하냐”는 아주 그럴듯한 대응에 마지못한 듯 나왔고, 갑옷을 입고 나와 말에 타서도 울면서 "정녕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 방간에게 화살을 쏘는 자는 베겠다.“는 명을 내려 방간을 살려줄 뜻을 확실히 보이면서 병사들을 감동시켰다. 

 내가 쇼로 연기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친형과 싸우는 대의명분에 어긋난 일이었기에 진심도 있었다.      


 2차 왕자의 난 때도 왕후의 오빠인 민무구와 동생 민무질은 나를 도왔고,  아내인 원경왕후 역시 사가의 말이 홀로 집으로 오자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걱정되어 창을 가지고서 말을 타고 가려다가 시녀들이 말린 일도 있었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나를 도왔다. 


 결국 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의 워낙 준비가 부족했고 편들어주는 사람도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난이 진압된 후 박포는 원래는 방조범으로 죽을 죄가 아닌데도 당연히 처형하는데, 친형인 방간을 죽일 수는 없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해서다.

 이방간은 정종과 태조의 간청과 그간 형제의 정과 민심을 의식하여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말만 유배지지 식읍까지 주었기 때문에 그냥“정치에서 손 떼고 시골가서 여생을 마치라”는 명령에 가까웠고, 유배지에서 폐서인으로 군역을 치르며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가 죽는다.  

 다만 방간의 아들 이맹종(李孟宗)은 반란을 일으켰던 날 아침에 직접 나의 저택으로 염탐을 오는 대담한 모습까지 보였는데, 활을 잘 쏘고 간사하고 꾀가 많은 등 능력이 있어 아버지와 다르게 나에게 상당한 경계를 받았다.     



 (3) 왕위 등극     


 나는 35세(1401년)에 드디어 왕위에 올랐고, 장남 양녕대군 이제(李褆)는 장자 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나는 궁을 형제들의 피로 물들이며 왕에 된 만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형제애로 인간다움을 보여야 했고, 즉위한 뒤에도 동생으로서 정종을 형이자 상왕으로서 톡톡히 대접했다.     

 내 나이 36세(1402년), 나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내명부의 권한)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이겠다며 거창하게 혼례를 올리려고 전 성균악정 권홍에게 단자 9필·견 20필·정5승포 250필·쌀과 콩 각각 1백 석을 내려 주어 가례(嘉禮)의 혼수를 해주려 했는데, 상왕으로 물러나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형이 아니라 물러난 상왕으로서 나에게 "금상(今上)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는가? 내 비록 아들(적자)이 없어도 소시(少時, 젊었을 때)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금상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충고를 해서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여 그 뜻을 따랐다.        


  나는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 말살에 힘썼는데, 나와 아버지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된 외척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경왕후는 수많은 사람들이“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극진한 찬사가 있을 정도로 좋은 아내였고, 서로 의지하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으나, 내가 왕이 된 후 축첩과 후궁을 들이는 문제로 항상 크게 다투었고, 왕후는 한번도 나의 여색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나와 왕후는 일방적인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였고 그만큼 나에게 어마어마한 지원을 하였다. 

 원경왕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후기 급부상한 권문세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분류된 15가문 중 하나였다. 아버지 태조가 넷째, 다섯째를 여흥 민씨 집안 여식과 혼인 시킨 것도 혼맥을 정계 안착에 활용하기 위해서였고, 외가댁은 사돈이자 나의 처가로서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 막대한 지원 사격을 퍼부었으며, 왕후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인 나의 권력 획득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럼에도 즉위 이후 공신들을 매우 경계하였던 나는 특히 왕후의 오빠인 왕후의 오빠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이 왕의 외가이자 개국공신·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의 3공신으로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에 더욱 심하게 경계했다.  

    

 결국 나는 왕권 강화책으로 종친과 대신들을 이용해 민무구(閔無咎)와 동생 민무질(閔無疾)을 숙청한다. 

 1405년 막내 이도의 동생 이종(李種)이 4남으로 태어나 이도가 3남이 되고, 1406년 8월 내가 세자 양녕대군에게 갑자기 선위할 뜻을 밝히자, 조정의 대신들은 극구 반대하였지만, 민무구 형제는 은근히 양위를 바라면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민무구 형제는 나의 계략에 걸려든 형국이 되었고, 어린 세자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세력으로 몰리게 되었다. 

 당시 왕후의 오빠 민무구와 민무질이“아버지 민제와 동생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친다.”는 종친과 대신들의 상소가 계속되고, 민무구 형제들은 1407년 궁중에 들어가 종친에게 무례할 뿐 아니라 종친간에 이간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탄핵 되어 유배되었다. 

 나는 후일을 대비할 겸, 1408년 막내 이도를 나이 12살에 보란 듯이 충녕군에 봉했다. 막내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능력과 인성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을 겸비하여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중하여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내가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하라.”고 했을 정도로 단군이래 최고로 독서에 몰두한 독서어택(讀書御宅)이었고, 스스로 폭넓은 지식과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1410년, 후일 양녕대군이 보위를 이었을 때 민씨 형제들의 세가 막강해 질 것을 우려해 그들을 처형해야 된다는 상소가 끝이지 않는 가운데, 민제가 사망하자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들이 형들을 구해내기 위해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다 발각되었고, 나는 민무구와 민무질을 제주도로 유배한 후 사사하였다. 원경왕후가 결국 병으로 앓아 눕자,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안을 왔다가 양녕대군을 만났는데, 이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며 두 형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였다. 

 당시 세자 양녕대군은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민무회는 어이가 없어하며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인데,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 했다고 한다.  

    

 결국 세자는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을 고변했고, 민무휼 등이 잡혀와 고문을 당한 뒤 유배되었으며 결국 사사되었다. 4형제가 모두 죽은 뒤에 그들의 처자는 먼 지방으로 안치된다. 

 결국 나는 세자의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갖은 이유로 끝까지 멸문해 토아구팽한 것이다. 

 세자 역시 내가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걱정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정작 당시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 버리듯 외면했다. 


 나는 또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혁파· 관제정비와 전제개혁·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등 국정에도 힘썼다.

① 사병혁파: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모조리 혁파하여 군권을 일원적으로 삼군부에 재편해 주었는데, 아버지와 내가 사병을 이용해서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병을 철저히 분쇄해 모두 국군으로 재편했고,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② 관제정비와 전제개혁: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대간과 사관 등의 언론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어 관제를 정비하고, 의정부를 만들어 자문 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6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의 전제개혁을 시행했다.

③ 경제정책: 37세(1403년)에 금속활자 주조와 인쇄를 담당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처음으로 설치하여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고, 태조까지만 해도 백성들이 빈곤했고 물물교환이 주를 이루어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는데, 영농장려정책과 함께 명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시킨 화폐 개혁을 하였다. 화폐개혁은 크게 실패하였으나, 농산물이 풍부해지고 생활 수준이 높아져 백성들의 삶이 한결 평화로워지고 국고가 가득찼다.      




 내가 보고 있는 이버지의 모습은 그야말롤 악마의 탈을 쓴 인간이었다. 

 1, 2차 왕자의 난 당시에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수 많은 문무대신들 외에도 천륜을 어기는 왕의 행동을 지탄하던 백성들 역시 수없이 살해당했는데,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행동이 누구에게선가 들었는지 사초에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저지르는 일들이 너무나 사실로 느껴져 “왜 저러지”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왕이 되어 감사하고, 국정에 힘쓰는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 여기지만, 솔직히 아버지가 국정을 위해 힘쓰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왕권을 위한 것인지 알기 힘들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패륜적이고 잔인한 모습들을 보며, 참담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복형제가 세자가 되는 순간 느꼈을 위기감과 불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태조 할아버지가 현재 왕비로 있는 계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친형제까지 죽이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고, 조선 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숙청된 개국 공신들과 그 가족들이 겪었을 참담함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만약 아버지가 실패했다면, 당시 강보에 싸여 있던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왕권에 집착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권력의 비정함에 대한 공포감으로 두려워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복형제는 물론 친형제들까지 죽이면서 왕이 된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일로 이해할 수 없다.


 도저히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깨어나려 몸부림치는데, 잠시 깨는 듯 싶다가 다시 꿈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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