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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Jan 30. 2024

홍익인간전당 이야기 7

세종대왕 전기 (2)- 두번째 꿈

 2. 두 번째 꿈  

   

 두 번째 꿈속의 나는 나 이도(李祹)로 돌아와, 15세(1411년)의 성인(成人)이 되어 원정(元正)을 자로 사용하고 갓을 쓰고 있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성인이 되면 성인식으로 상투를 틀어 갓을 썼는데, 여자는 비녀를 꽂아주기도 했다.      

(1) 세자 등극까지      


 나에게는 시운이 따른다. 다음 해인 1412년 16세,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만에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고, 형들의 행보도 아버지의 눈 밖에 나 미움을 사기 때문이다.


 큰 형인 양녕대군 이제(李褆)가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세자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여러 번의 선위 파동을 벌였는데, 큰 형은 그때마다 말리지 않으면 아들로서는 불효가 되고 신하로서는 역심(逆心)이 되니, 자신은 세자로서 아직 왕좌에 앉을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선위를 하지 말아 달라고 신하들과 함께 부왕에게 간청해야 한다. 


 양녕대군은 세자시절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한 한량으로 아버지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원래 나름 정상적이었는데, 차츰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공포 때문인지 망나니짓을 하기 시작해 계속한다. 

 양녕대군은 이오방·구종수 등과 궐을 나가 기생들과 놀고 매 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하루는 옷을 멋들어지게 빼입은 뒤 옆에 시중꾼에게 잘 어울리냐고 물어봤다가 나에게 정신차리라는 일침을 듣기도 한다. 아버지가 양녕대군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대군이 곡기를 끊어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 라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       


 양녕대군은 1412년부터 1413년까지 결국 부왕의 명으로 1년 동안 대리 청정을 했는데, 이때도 아버지의 선위 파동은 계속해 반복되고, 큰형의 망나니짓은 절정에 달한다.

 양녕대군은 전 중추원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해 왕과 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아버지가 지신사(도승지)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潛然下淚) 한탄을 했을 정도이다.

 양녕대군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어른의 집에 숨겨두고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대군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라며 억지를 쓰는 내용의 글을 올려 태종이 분노를 넘어 황당케 한 일도 있다. 당연하지만 남의 첩, 그것도 고위 양반 원로 대신의 첩을 세자의 권세로 빼앗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름 아닌 천인공노할 폭군의 행태였다. 더군다나 유부녀를 협박해 본처의 친정에 숨겨놓고 범하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군왕무치론이 당연시되던 시대라지만 패륜적인 행동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어리는 그냥 여염집 여성이 아니라 종2품 대신의 첩이었으니 누구보다도 태종이 분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양녕대군은 부왕에게 자신을 호색하던 한고제에 비유하면서 "어질다고 알려진 수양제가 나라 말아먹은 것은 아시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고제는 건드려도 뒤탈이 없도록 오갈데 없는 과부만 건드렸으니 인용이 잘못되었다. 아버지는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이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한다.      


 한편 둘째 형인 효령대군 이보(李補)는 아버지가 효령대군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온화한 성품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다.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로 불가에 뜻이 있어, 당시 불가에서는 술을 금해 차(茶)만 마셨고, 번뇌(괴로움)를 씻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대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기기도 한다.

 효령대군은 후에 가사(袈裟)를 걸치고 거사로 지내며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해 불교공부에 매진한다. 승려가 되지는 못하는데, 조선 건국 초기에 무학대사가 그나마 이성계와 친했기 때문에 그나마 불교 좋아하는 걸 봐준 거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고려시대와 달리 도성출입도 금지되었고 대놓고 양반계층에게 천시와 적대를 당하던 집단이었는데, 명목상 차순위 왕위계승권이 있는 직계 왕자가 출가를 해버리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자체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418년(태종 18년) 1월, 나는 동생 성녕대군 이종(李種)이 완두창(홍역)에 걸려서 위독하자, 아버지는 국사를 며칠간 돌보지 않으며 옷을 벗고 잠을 들지 않고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며 흥덕사에 기도를 올린다. 이 때 내가 의원 원학(元鶴)과 함께 의서를 보며 친히 약을 썼기 때문에 그 지성에 모두 감복하는데, 세자는 이 무렵에 활쏘기를 하고 놀았다. 

 나중에 양녕대군이 애첩 어리의 일이 들통나서 크게 혼날 때 태종이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복동생(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해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책하는데, 결국 성녕대군은 만 12세 7개월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양녕대군의 비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지자 왕과 중신들은 충녕대군을 전폭 신뢰하였고,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는 뜻)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돌아다녔으며,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을 정도였다.  


  1418년 6월, 세자가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결국 폐세자가 되고, 나 충녕대군(忠寧大君)이 형을 대신하여 새로운 세자로 책봉된다. 

 아버지는 작은 형인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제외하였다. 즉 군주의 자리에 앉기에는 성품이 너무 순한 데다가, 술을 못 마셔 융통성도 없어 도저히 후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도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불가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거나 계승권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는 처음에 세자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朴訔)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나를 세자로 지명한다. 사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2) 반쪽의 왕위 등극     


 태종 18년(1418) 8월 10일, 부왕은 나를 세자로 책봉한 지 두어 달만에  전격적으로 나에게 양위하고, 내가 왕명 세종(世宗)으로 즉위한다. 

 태조(조선), 정종(조선), 태종(조선)이 고려 왕씨 왕조의 군인으로 지내다가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뒤엎고 왕위에 올랐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 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 된다.      

 나는 비록 임금이 되긴 하지만, 나의 즉위 과정이 험난했는데, 아버지 태종이 실권을 잡고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내가 즉위하면서부터 역시 선위 파동은 계속되었고, 신하들은 '이번에는 태종이 또 얼마나 오래 충녕대군에게 선위 파동을 할려나?'라고 서로 속삭였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왕만 입을 수 있는 면복(冕服)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나를 보고 군말 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에 참석했다. 

 면복은 제왕의 정복인 곤룡포와 면류관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면복을 입힌 것이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랬는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인지는 모르나, 이전부터 선위 파동을 일으켜왔던 것으로 보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나의 아버지 태종은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양위)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으면서도, 나에게 병권 외 나머지만 모두 이양한다.

 즉 아버지가 병권을 쥐고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직접 처리하였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궁궐을 수비하는 금위군을 둘로 분리하여 태종의 거처인 수강궁과 세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수비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고 나의 재가를 받았으나, 정작 병권을 가지고 있는 태종에게 군사 관계에 대해 보고하지 않는다.

 상왕 태종이 이 일로 진노하고, 반대 세력이었던 박은 등은 중간에서 이간하여 보고한다. 결국, 이 사건은 아버지가 친히 병조판서 강상인과 나의 장인인 심온의 동생 심정(沈泟)을 국문하여 함경도 관노로 귀양 보내면서 일 단락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나의 장인 심온을 영의정과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킨 후, 명나라 사신으로 떠날 때 권력의 실세였던 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아버지는 이에 위협을 느낀 박은 등 반대 세력의 이간으로 또다시 분노를 일으켰고,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 이조판서 심정,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사건을 키웠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 죽였고,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하여 결국 자복을 받아 1418년 11월 사약을 내렸으며,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켰다. 나의 아내 소헌왕후는 폐출이 제기되었으나, 나와의 사이에 많은 자손을 낳았고, 나와 금슬이 좋아 임영대군을 임신 중인 임산부여서 다행히 폐출을 면하게 된다. 

 결국, 아버지는 심씨 가문의 세력과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헌왕후가 나의 왕비라는 이유로 그 아버지인 장인 심온을 비롯한 처가를 공격한 것이다. 사실 이는 명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을 처형해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외교상 명나라에서 분명히 불편해할 가능성은 물론 불경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한다.

 이른바 강상인의 옥사(姜尙仁─獄事)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결국 나의 아버지 태종은 나의 처가인 소헌왕후 심씨가문마저 멸문했는데,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내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으로,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시대 왕가에서 외척의 정치적 발호를 견제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즉위 후 4년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실권을 쥐고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3) 왕권 획득     


 나는 즉위한 지 4년 후 26세가 되는 1422년, 아버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왕 다운 왕이 된 것인데, 그때 서야 비로소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아버지와 어머니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준다. 

그러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신하들의“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에 의하면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라는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버지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에는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우의정 정탁,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아버지의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온 옥사 재수사가 아버지의 측근들을 몰아내 물갈이를 하기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으나, 이들 때문에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못한다. 다만 아내 소헌왕후는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심지어 임산부였기 때문에 이 일로 개인적으로 마음고생을 했을 가능성이 큰데, 결국 1446년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 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결국, 아버지가 세종 4년(1422)에 숨을 거두었지만, 조선 조정은 아직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신하들은 초장부터 나를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나의 말에 따르지를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대군에 관한 일이다.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가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을 통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때 내용 중에는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다. 나는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같은 해인 1422년(세종 4년),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중 나에게 1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사건이다. 

 김도련은 양인이 된 자들을 다시 자기 소유 노비로 만들기 위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에 달했을 정도로 가히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사건인데,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는다.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은 4년 뒤인 1426년(세종 8년)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는데,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나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유배에 처해진다. 나는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린다. 이로 인해 나는 아버지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우게 된다.     

 

(4) 본격적 치세

 . 

 내 나이 30세가 되던 세종 8년(1426년) 2월, 아버지가 만든 피로 얼룩진 역사를 태워버리기라도 하듯 한양 대화재가 발생하는데,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으로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인데, 이날 경시서(京市署)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탄다. 

 당시 나와 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하는데, 금성대군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해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한다. 나는 다음 날인 16일에야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돌아와서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한다. 

 큰 화재는 잡히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나는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한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는다.      


 나는 이듬해인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한다.     


 1427년(재위 9년) 5월, 박연이 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든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9월에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운다.      


 1429년(재위 11년)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한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한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1430년(재위 12년) 2월 농사직설을 반포한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한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형(鞭背荊)을 금지한다.      


 1432년(재위 14년)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여 각 도(道)의 연혁·고적·물산(物産)·지세 등이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특히 마니산 참성단에 대해 기록하여 조선민족역사의 원천을 밝혔다.

 마니산 참성단은 단군이 봄, 가을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해지는데, 고려 권근의 양촌집에 고려 태조 왕건 이전부터 이미 여기서 단군에 제사를 올렸다는 구절이 있으니, 최소한 1천 년 넘도록 지켜온 풍습이다. 이 풍습을“ 마니산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석단(石壇)이다."라고 기록했다.      


  1434년(재위 16년) 이천(李蕆)에게 지시해 갑인자, 재위 18년(1436)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한다.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여 주조한 재위 2년(1420)의 경자자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1437년(재위 19년) 장영실을 발탁하여 이천과 함께 해시계 앙부일구와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도록 했는데,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귀화인으로 노비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 신분을 따라서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였다.      


 나는 꿈속에서 형님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자라고, 세자가 되어서는 아버지로부터 형님과 같은 일을 똑같이 겪고, 겨우 왕위에 오르나 아버지의 횡포에 시달려 끝내는 외가까지 잃는 일까지 겪다가, 결국 아버지가 붕어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왕도를 걷는데, 세자였던 양녕대군 형님이나 불가에 귀의한 효령대군 형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문득 아버지가 피의 역사를 쓰지 않고, 태조 할아버지와 정도전의 역사가 계속되었다면 지금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비록 지금처럼 왕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까?   나는 스스로 왕도를 세울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피의 역사를 씻어내려 노력하였고, 어쩌면 내가 그런 노력을 하였던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문득 지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비몽사몽 간에 꿈에서 깨어나는 듯하다가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홍익인간 전당이야기 7 은 "세종대왕전기 (3) 세번째 꿈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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