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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Feb 01. 2024

홍익인간 전당이야기 7

세종대왕전기 (3) 세 번째 꿈

3. 세 번째 꿈    

 

 나는 1442년(재위 24년)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고, 국정에서 물러나고 있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 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기는 데다 특별히 몸을 쓰는 사냥 등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비만과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으며,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재위 후반기 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 국정 위임과 죽음


 나는 이후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佛事)를 일으키다가, 문득 백성들이 알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들 결심을 한다. 

 내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기 전까지 조선은 중국어 한자(漢字)와 한자를 차용한 이두(吏讀)를 사용하였고, 어순이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로 서술어가 없는 중국어와 달리, 어순이 주어-목적어-동사-서술어 순서였으며, 한자로 주어-목적어-동사를 쓰고 이두로 어미를 붙여 서술어로 사용했는데, 이는 조선건국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내가 우리글을 만들 결심을 할 당시에 조선에는 고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나는 차녀 정의공주와 불교계의 신미스님을 통해 이를 알아보라 하였고, 그들이 연구한 변음(變音)과 토착(土着) 등의 소리글자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결국 1443(재위 25년)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나는 훈민정음 창제 서문인 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에 한자로 된 해례본과 번역본인 언해본을 실어“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 글자를 창제하였다.”고 밝힌다. 또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하여금 집필하게 해 내가 석보상절의 구절에 부합하는 내용을 운문(가사) 형식으로 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싣게 하였다. 

 더불어 세종실록에 훈민정음 예의본과 해례본을 싣게 했는데, 이 훈민정음 실록본은 내가 직접 지은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어있고,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다.


 1444(재위 26년)과 1445(재위 27년)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세상을 뜨더니, 재위 28년(1446)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세상을 뜨고 만다.      


 1450년(재위 32년) 음력 2월 17일, 나는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승하하는데, 연이은 가족들의 사망 이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고, 결국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한다.  나의 능호는 영릉으로, 나의 비 소헌왕후와의 합장묘이다.



 분명 나는 꿈을 꾸고 있는데 내가 죽다니, 이것이 무슨 상황이지 하는 순간 진실을 알게 되는데, 결국 나는 죽어서 꿈처럼 나의 인생을 되돌아본 것이었다.     


(2) 사후 각성     


 나는 지금 땅에 묻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순간 깨달았다. 맛을 보기 전에는 음식의 진가를 모르듯이 죽어야 비로소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이 보인다. 

 나는 원래 전생의 단군이었다. 산신으로 있다가 삼국시대에 박혁거세로 한번, 고려 때 승려 일연(一然)으로 한번, 이번에 세 번째로 다시 속세에 태어난 것이었다. 아마도 아버지 태종과의 인연은 이전 두 번의 환속 중 어느 한 곳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 맺었던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났고, 내가 평생을 고난에 시달렸던 것은 아버지가 만든 피의 역사를 씻어 전생에 만들어진 나와 아버지의 악연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으며, 결국 내가 태어난 진짜 목적은 한글을 창제하기 위해서였다.

 피로 만든 역사는 피로 갚아야 한다고 했던가, 평생의 노력에도 내가 아버지의 죄를 다 씻지는 못했구나. 아버지가 만든 피의 역사 때문에 앞으로 먼 훗날 나의 핏줄들과 조선의 후손은 크나큰 몰락의 위기에 처할 것이고, 그때 비록 나의 핏줄의 몰락은 피할 수 없겠지만, 내가 만든 훈민정음이 고조선의 정신을 되살려서 조선의 후손들이 언젠가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세종대왕은 32년의 재위 치세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은 물론 한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다. 그만큼 세종의 치세는 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이 이만큼 존경받는 이유는 권력을 위한 통치가 아닌, 백성이 필요한 것을 통치에 반영하였고,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지역의 국경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계에서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들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다. 

 한글은 그 창제 정신이 자주정신(自主)과 애민정신(愛民精神)과 실용정신(實用精神)'에 있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창제 정신과 더불어 제자(制字)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에 있어서도 뛰어나다. 

 한글의 이러한 특성은 국제기구에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고, 유네스코(UNESCO)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다. 이 상의 명칭이 세종대왕에서 비롯된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 문맹자를 없애기에 좋은 글자임을 세계가 인정했기 때문인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언문(諺文)이라고 한 것이 낮추어 부르는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언문의 언(諺)자에는 자랑할 안(諺)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자랑할만한 글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으로 칭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글이 소리글자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사실 소리글자라는 의미의 언문(言文)이 맞다고 할 것이다.

 상형언어인 중국 글의 문장을 한문(漢文)이라 하고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한다면, 음성언어인 한글의 문장은 언문(言文)이 되고 글자는 언자(言字)가 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런데 세종대왕과 사대부 선비는 굳이 낮추어 부르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인 언문(諺文)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소리글자에 해당하는 고유의 언문(言文)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훈민정음의 정음(正音)이 한자나 이두를 글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바꾸어 고대 한글을 되살려 정음(正音)으로 바르게 사용하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는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2333년경부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1,444년까지 한글이 없었던 역사가 약 3800여 년이고, 삼국시대로부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하기 전까지 1,444년간 한자와 한자를 차용한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한국인은 총 3,800여 년간 자신들의 글자 없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웃한 중국의 예를 들어보면 BC 1,600년경(은갑골문자)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는데, 비슷하거나 더 앞선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는 약 3,000년이 뒤진 기원후 1,444년이 되어서야 고유의 의사 전달 수단인 한글을 가졌다. 심지어 기원전 시대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중국대륙에서 서로 경쟁하며 함께 살았던 역사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한국으로부터 4~5세기 경에 글자를 받아들여 만요가나를 만들었고, 9세기 중반에는 가다가나와 하라가나를 만들어 일본글자를 완성하였다. 즉 일본어는 한국으로부터 중국 한자와 함께 한국 이두와 한국의 문자 표현 형식을 받아들여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일본어는 고립어인 중국어와는 달리 한글과 같은 교착어이고, 문장구성 역시 주어'동사'목적어 순서인 중국어와 달리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으로 한글과 같기 때문이다.

 한글 창제가 AD 1,444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일본이 무려 500여 년이 앞선 것인데, 일본인이 500여년 동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동안 한국인은 유에서 500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머물렀다는 이야기로 이치와 상식에 어긋난다. 

 한국의 벼농사 역사가 확인된 것만으로 기원전 2,000년경인데 비해, 일본은 기원전 3세기 야요이 시대에 한국으로부터 벼농사를 전해 받아 야만에서 벗어났고, 4~5세기에 한국으로부터 문화는 물론 전술했던 것처럼 글자를 받아들여 일본어를 만든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일본에 글자와 문명문화를 전한 한국이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한글에 상응하는 문자를 가졌다가 이 시기에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한자와 한글과 이두문을 병행 표기해 놓고 걍우의 수를 따져보자.             


① 한문  :   蠶     陽物            大惡水氣       故      食      而   不飮

②이두문 :     陽物是乎等用良 水氣  大惡   桑葉叱分 食爲遣  飮水 不冬

③한글표기: 蠶는   陽物이온들쓰아 水氣  大惡   桑葉만   食하고  飮水 안마신다

④현대한글: 누에 양물이므로     물기  싫어해 뽕잎   먹    물을 안 마신


 첫째: 삼국시대에 한자를 도입했을 때 고대 한국글자가 없었을 경우

 이 경우 당연히 말과 글이 다르게 될 것이다. 이 경우 글이 무기가 되는데 굳이 한자로 어미를 달아 말에 맞출 필요가 없다. 어차피 글을 아는 사람끼리는 글로 통하면 될 일이고,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로 전하면 될 일이다. 글을 알아 한자만으로도 통하는 사람들이 굳이 한자의 음을 빌어 복잡하게 어미를 단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일이 아닌가?     


 둘째 원래부터 한자와 한국 고대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을 경우

 이 경우 당연히 말과 글이 같을 것이다. 즉 한자로 주어-목적어-동사를 쓰고, 한국 고대어로 어미를 다는 형식이다. 즉 원래 한자로 쓰고 한국 고대어로 어미를 달았었는데, 한자를 쉽게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반대로 한국 고대어로 된 어미를 굳이 한자로 고쳐 어렵게 만들어 글자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한국 고대글자는 한자와 가림토문자를 합쳐 사용한 것이 되고, 가림토문자=어미가 되어 이두가 가림토문자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은 개인의 몫이지만, 한민족은 삼국시대로 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2,000여년간 전제통치시대의 왕조들에 의해 인권을 박탈당해 인간개발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을 정도로 우수한 민족이다. 이런 한민족의 우수성으로 보아 충분히 중국처럼 글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후술하겠지만 그런 정황도 있다.     


 한'중'일 역사를 되돌아 보면 기원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기원 후에는 중국-한국-일본의 순서로 글자와 기술 등의 문명문화가 전달된다.

 그런데 기원전 시대에 중국인과 한국인이 3,000년 이상을 함께 살았는데 한쪽은 글자가 있었고 한쪽은 글자가 없었으며, 일본에 문자를 전한 한국이 일본보다 1,000여년이 늦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가졌다. 그렇다면 최소 일본에 글자를 전한 기원전 4-5세기 이전, 최대 중국과 같은 기원전 1,600여년 정도에 글자가 있었다가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자나 이두가 사용되었던 삼국시대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이의 역사는 한자가 생활수단이 되는 사대주의 시대여서 그렇다치더라도, 문제는 삼국시대 이전의 기원전 시대에 한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기원전 시대는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해 볼 수 있는 추정이 전술했던 한자와 고대 한글을 고루 사용하여 주어와 서술어를 쓰고 고대 한글로 어미를 붙였고, 삼국시대 들어오면서 고대 한글을 이두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서 한글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글이 단군신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한글 사용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즉 훈민정음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이고 세계 문자 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1,444년 이전에 한글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궁(宮)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평생을 한자만 접하고 산 세종대왕이 밑도 끝도 없이 애민정신 하나만으로 혼자의 힘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집현전 학자의 도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정설로 가르쳤는데, 최근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전술했듯이 훈민정음 창제 전에 우리 민족은 한자와 한자를 차용한 이두를 사용했는데, 이두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기원 후 1,444년을 중국어에 기대어 살다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한글을 갑툭튀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세종대왕을 성군이라 칭하며 천재로 부르는 이런 이유 때문인데, 원래부터 한국 고대글자가 있었고, 세종대왕이 성균관 학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혹은 밝힐 수 없는 자료에 근거한 고대글자를 이용해 한글을 창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 홍익인간전당 이야기 7. 세종대왕전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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