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트랙, 다른 레인
큰 키에 긴 머리,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컬리 헤어와 풀메이크업.
블링블링 액세서리, 미니스커트, 또각또각 하이힐.
회사 앞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화려한 외모는 오늘도 돋보인다. 벌써부터 주위의 시선들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단번에 사로잡을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때로 백지같이 순수했고, 가끔은 푼수 같은 소녀였다. 강한 인상과 대비되는 반전이 사람들의 호감을 불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등바등 뭔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이 뻔히 보여도 당당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때로는 ‘배 째라’ 식으로 밀어붙이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또 넘어갔다.
그럴 때, 전전긍긍 어떻게든 해내느라 힘들었던 나는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는 불합리를 만나면 조목조목 따지고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취향은 또렷이 말하면서도 갈등에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적당한 선 안에서의 마이웨이.
나는 눈치를 살폈고, 그녀는 시선을 덜 의식했다.
우리 회사 프로젝트는 매출액 구분이 명확해 부서 간 이동이 드물다. 그런데 옆 실 대리님이 육아휴직에 들어가며 그 프로젝트가 내게 넘어왔다.
이쯤 되면 ‘왜 동기인 그녀가 아닌 내가 됐을까’가 궁금해지고, 일이 많아짐에 대한 부담감도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보니, 하나라도 발을 더 걸치게 된 것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고,
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대리님 프로젝트를 내가 받게 된 이유가 너무 당연한 것 같아서…
앓는 소리는 했어도, 은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인수인계를 위해 대리님과 외근을 나섰다.
말수가 적고 차가운 이미지라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최대한 붙임성 있는 모습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나: “대리님, 임신하셔서 힘드시죠?”
대리님: “네. 아직 들어가려면 좀 남았는데 아기가 커서 그런지 좀 힘드네요.”
나: “그렇군요… 핸드백 제가 들까요?”
대리님: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깐의 침묵 뒤, 대리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리님: “이번 프로젝트 맡은 거, 괜찮겠어요?”
나: “네, 주시면 열심히 해야죠.”
대리님: “음… 마냥 ‘열심히’만이 답은 아닐 때도 있어요. 회사는 원리원칙대로만 흘러가진 않거든요.”
나: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즐겁게 배우는 중이에요.”
대리님: “그게 좋아 보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해맑아 보여서… 김 사원 입장이 조금 다르잖아요.”
말끝이 맴돌았다.
나: “무슨 말씀이세요?”
대리님: “박유나 씨, 계열사 사장님의 딸이잖아요.”
나: “네? 뭐라고요?”
대리님: “김사원 님 몰랐어요? 음.. 내가 괜한 얘길 한 건가?”
대리님은 덧붙였다. 공고를 내 정식 절차로 뽑혔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이력서가 내려왔다느니, 입김이 있었다느니—말들이 돌았다고.
이번 정규직 전환은 1명일 수도 있다는 풍문도 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표지판들이 흐릿해졌다.
‘남자 내정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성별만 달랐던 내정자.
충원 인원이 1명이라던 공지가, 결국 2명이 되었던 일.
점심시간에 그녀가 아버지와 식당에서 마주치곤 했다던 얘기.
엘리베이터에서 임원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던 장면들.
갑자기 신분의 높낮이가 보이는 듯했다.
아등바등하지 않았던 이유—금수저라서였을까.
처음부터 불리한 판에서 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리는 위로 갈수록 적어진다.
그녀가 회사를 나가지 않는 한, 줄어든 자리를 두고 우리는 늘 같은 선에서 뛸 것이다.
이 회사가 그 차이를 지울 만큼 공명정대한 곳일까.
차라리 몰랐던 때가 좋았다.
어깨가 웅크려졌다.
그녀에게 따로 알은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알게 됐다—나만 몰랐다는 걸.
해맑았던 나를, 누군가는 안쓰럽게 보고 있었을까.
원망의 방향을 가늠했다가, 그만두었다.
수저의 색을 내가 바꿀 수는 없으니까.
사실, 지금 당장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은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 뿐이다.
늘 그랬듯 버티고 늘 그랬듯 해낸다.
이곳에는 분명 내 자리가 있다.
나는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