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를 울린 클라이언트

을의 품격

by 봄앤

입사 3년 차.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정규직이 되었다.

일은 익숙해졌지만 아직은 작은 프로젝트를 주로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규모 프로젝트 조정.


대리님이 하던

“까다롭고 요구 많고 세상 힘든 A프로젝트”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팀은 우려했고, 부장님은 짧게 말했다.

“김연수라면 시킬 수 있다.”


갑이 프로젝트의 주인이지만, 프로젝트 운영은 을의 몫—그야말로 을의 마음이다.

대개는 갑도 선을 지키지만, 가끔 깊게 개입한다. 그날이 그랬다.


즉, 갑께서는 그럴싸한 레퍼런스도 없는 사원나부랭이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기고 싶지 아니했다!



칸막이는 소리를 못 막았다.

부장님 통화가 또렷하게 들렸다.

“네, 네, 인수인계 철저히… 총괄 과장님도 챙기고 저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네, 그럼 다음에 소주한 잔..."



통화가 끝나자 내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과장: “김 사원 님, OO의 이 과장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맡으신다고요.”
나: “네. 인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과장:알죠?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협력사에서 사원급이 맡은 적은 없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대리님이 하던 걸 사원에게 넘기죠? 솔직히, 많이 걱정됩니다.”
나: “인력 조정이 불가피해서… 최대한 준비하겠습니다.”
과장: “사원님 보조하셨다면서요. 보조가 전부는 아닙니다. 디테일이 정말 많아서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내부도 제가 인수인계를 막 끝낸 상황이라 부담인데, 양쪽 담당자가 동시에 바뀌는 셈이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긁힌다.)


과장: “그리고 큰 건 경험이 없으시죠? 그게 치명적일 수 있어요. 지금 맡고 계신 일은 몇 개죠? 정리하고 저희에 올인해 주세요. 제 전화는 잦습니다. 자리 오래 비우지 않도록 해주세요.”

나: “네, 일정 조정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열심히는 당연한 거고요. ‘잘’해주세요, 김 사원 님.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그는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팠다.




프로젝트의 선택권은 내게 없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냐.

부장님과 통화도 했으면서 이러는 건…

기선제압이었다.


그의 그것은 통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그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게, 더 세게 달렸다.

‘어디 두고 봐. 내가 더 잘 해낼 거야. 나를 뭘로 보고—’
‘실수는 곧 끝. 잘하자, 김연수.’


담당자가 야근하면 나는 더 늦게.

주말이면 나도 회사.

전화가 오면 즉시 받고, 필요한 자료는 미리 보냈다.


과장: “보고서 봤습니다. 퇴근이 언제시죠?”
나: “야근 계획입니다. 퇴근 시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장: “월요일 아침 보고라 저는 주말에 자료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뭐 꼭 나오시라는 건 아니고요.”
나: “주말 출근 예정입니다.”

과장: “아,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나: “아니오. 아닙니다. 체크해 보시고, 수정사항 있으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속으로) ‘그래, 너 때문이다, 이놈아’라고 하고 싶지만 참는다.



하루, 일주일, 한 달.
회의 안건은 표준화하고, 이슈는 ‘1일 1 리스트’로 묶어 선제 대응했다.

클라이언트가 보던 핵심 지표 하나를 주 단위로 개선했고, 보고 일정은 당겼다.

전화는 여전히 잦았지만, 목소리의 결이 달라졌다.


과장: “이번 분기 결과 보고— 좋았습니다. 지난번 리스크도 잘 수습하셨고.”
나: “감사합니다. 다음 보고는 금요일 오전까지 드리겠습니다.”
과장: “네. 그 속도로 갑시다.”


p.s

시작도 전에 으름장을 놓던 그는, 훗날 가장 의리 있는 파트너가 됐다.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었고, 내 노고를 인정해 상사에게 직접 칭찬했다.

우리 실수로 커질 뻔한 문제를 자기 선에서 막아 주기도 했다.

처음엔 나도 오기였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갑’의 성공을 바라며 일했다.

그 마음이, 프로젝트를—and 나를—살렸다.


때로 버거운 무게가 자라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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