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품격
입사 3년 차.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정규직이 되었다.
일은 익숙해졌지만 아직은 작은 프로젝트를 주로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규모 프로젝트 조정.
대리님이 하던
“까다롭고 요구 많고 세상 힘든 A프로젝트”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팀은 우려했고, 부장님은 짧게 말했다.
“김연수라면 시킬 수 있다.”
갑이 프로젝트의 주인이지만, 프로젝트 운영은 을의 몫—그야말로 을의 마음이다.
대개는 갑도 선을 지키지만, 가끔 깊게 개입한다. 그날이 그랬다.
즉, 갑께서는 그럴싸한 레퍼런스도 없는 사원나부랭이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기고 싶지 아니했다!
칸막이는 소리를 못 막았다.
부장님 통화가 또렷하게 들렸다.
“네, 네, 인수인계 철저히… 총괄 과장님도 챙기고 저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네, 그럼 다음에 소주한 잔..."
통화가 끝나자 내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과장: “김 사원 님, OO의 이 과장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맡으신다고요.”
나: “네. 인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과장: “알죠?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협력사에서 사원급이 맡은 적은 없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대리님이 하던 걸 사원에게 넘기죠? 솔직히, 많이 걱정됩니다.”
나: “인력 조정이 불가피해서… 최대한 준비하겠습니다.”
과장: “사원님 보조하셨다면서요. 보조가 전부는 아닙니다. 디테일이 정말 많아서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내부도 제가 인수인계를 막 끝낸 상황이라 부담인데, 양쪽 담당자가 동시에 바뀌는 셈이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긁힌다.)
과장: “그리고 큰 건 경험이 없으시죠? 그게 치명적일 수 있어요. 지금 맡고 계신 일은 몇 개죠? 정리하고 저희에 올인해 주세요. 제 전화는 잦습니다. 자리 오래 비우지 않도록 해주세요.”
나: “네, 일정 조정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 “열심히는 당연한 거고요. ‘잘’해주세요, 김 사원 님.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그는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팠다.
프로젝트의 선택권은 내게 없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냐.
부장님과 통화도 했으면서 이러는 건…
기선제압이었다.
그의 그것은 통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그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게, 더 세게 달렸다.
‘어디 두고 봐. 내가 더 잘 해낼 거야. 나를 뭘로 보고—’
‘실수는 곧 끝. 잘하자, 김연수.’
담당자가 야근하면 나는 더 늦게.
주말이면 나도 회사.
전화가 오면 즉시 받고, 필요한 자료는 미리 보냈다.
과장: “보고서 봤습니다. 퇴근이 언제시죠?”
나: “야근 계획입니다. 퇴근 시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장: “월요일 아침 보고라 저는 주말에 자료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뭐 꼭 나오시라는 건 아니고요.”
나: “주말 출근 예정입니다.”
과장: “아,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나: “아니오. 아닙니다. 체크해 보시고, 수정사항 있으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속으로) ‘그래, 너 때문이다, 이놈아’라고 하고 싶지만 참는다.
하루, 일주일, 한 달.
회의 안건은 표준화하고, 이슈는 ‘1일 1 리스트’로 묶어 선제 대응했다.
클라이언트가 보던 핵심 지표 하나를 주 단위로 개선했고, 보고 일정은 당겼다.
전화는 여전히 잦았지만, 목소리의 결이 달라졌다.
과장: “이번 분기 결과 보고— 좋았습니다. 지난번 리스크도 잘 수습하셨고.”
나: “감사합니다. 다음 보고는 금요일 오전까지 드리겠습니다.”
과장: “네. 그 속도로 갑시다.”
p.s
시작도 전에 으름장을 놓던 그는, 훗날 가장 의리 있는 파트너가 됐다.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었고, 내 노고를 인정해 상사에게 직접 칭찬했다.
우리 실수로 커질 뻔한 문제를 자기 선에서 막아 주기도 했다.
처음엔 나도 오기였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갑’의 성공을 바라며 일했다.
그 마음이, 프로젝트를—and 나를—살렸다.
때로 버거운 무게가 자라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