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김 부장이 되다.

긴 터널 끝의 스포트라이트

by 봄앤

“김연수 부장님,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리본이 달린 작은 초콜릿 상자, 반듯한 글씨의 메모.

출근과 동시에 책상 위의 작은 풍경이 나를 반겼다.


억지로 팀장이 되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사람이었다. 똘똘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서로의 일을 알아서 챙기는 팀원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배려. 인복은… 있었다.

가끔 선배에게 먼저 커피 한 잔을 건네는 따뜻한 마음. 그 사소함이 팀의 공기를 바꾼다.

그런 따뜻한 마음을 받으면, 나는 보통 두 배, 세 배로 갚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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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저녁, 인사 공지가 떴다.

외부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 팀원에게서 먼저 소식을 들었다.

[김연수 부장]

내가 부장이라니.

정말, 내가?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 했는데,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회사는 기본적으로 근속연수가 긴 편이었다.

나처럼 계약직이 아니라 공채로 들어오면 대부분 만족하고 오래오래 다니는 좋은 회사.

그런데 쭉 평온할 것만 같았던 우리 회사도 "위기"가 찾아왔다.


실적 하락이 길어졌고, 결국 회사는 결단을 내렸다.

“위기”에 대응하는 경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CEO는 우리 부서의 수장을 새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대대적인 물. 갈. 이.

충성의 시대에서 성과의 시대로.


능력이 부족해도 남자가 우선이던 분위기는 물러나고,

원칙주의와 능력주의가 표준이 되었고,

비용 절감과 최대 효율을 추구했다.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공기에 걸맞는 인재는 최 과장님이었다.

우리 부서 최초의 여성 임원.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서, 내가 한때 후회했던 선택도 조용히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새 수장은 팀장들과 1:1 면담을 예고했다.
“김 팀장님, 팀은 어떻습니까? 문제의 프로젝트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는 문제없습니다. 예전엔 그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이 많았지만, 정상화한 뒤, 재계약했고, 매출도 늘었습니다.”
“오랫동안 리스크가 컸던 걸로 아는데… 지금은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네. 재발 방지를 위해 분석 프로세스와 보고 체계를 재정비했습니다. 이번에 적용한 방식으로 재작업률이 크게 낮아져 현재 다른 프로젝트로의 도입을 검토 중입니다.”


면담은 길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그 프로젝트의 뒷얘기까지 새 수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디테일들—문제가 있었고, 내가 새로 맡아 수습했고, 그 이후를 어떻게 굴렸는지.

내부 보고와 바깥 평판이 맞물린 순간이었다.


불을 뒤집어쓰듯 투입됐던 진상 프로젝트.

밤이 짧아지고 새벽이 길어지던 시간들.

보고 체계를 갈아엎고 판을 새로 짜던 주말들.

그때는 그저 “해야 해서” 했던 일들이었다.


사실, 그 프로젝트를 맡은 이후 많은 날을 후회했다.

“대체 왜 내가 이걸 수락했지?”
하지만 불만이 잦아들면서 재계약으로 연결됐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나를 보는 눈을 바꾼다는 걸.


그리고 어젯밤, 인사 공지.
팀장 3년 차, 부장 승진. 파격 인사.

억지로 달았던 팀장이었지만,
버팀은 빛으로 돌아왔다.
도망치지 않는 용기, 요구할 줄 아는 용기, 그리고 팀을 믿는 용기—그 셋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새 수장은 말했다.
“변화는 쉽지 않을 겁니다. 김 부장 같은 중간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더 높은 곳을 올려다봐도 되는 걸까.

욕심이 나면서도 두렵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올라가고 싶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만, 내가 나와 지켜야 하는 약속.

빠름에 취하지 않고, 느림에 주저앉지 않기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내 일을 하기로.


내가 가진 것은 결국,

해낸 일뿐이었다.


퇴근길, 어깨를 곧게 편다.

“안녕하세요. 김연수 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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