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직장인의 끝

송별의 미학

by 봄앤

나의 대학원 동기들.

박 부장, 송 이사, 오 상무 그리고 나 김 부장이 모였다.

함께 졸업을 했고, 똑같이 취업의 문을 통과했으며,

모두들 열심히 살아온 덕에 각자의 계단을 한 칸씩 올라온 사람들이다.


그 옛날—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졸업논문을 쓰고,

제일 싼 소주와 김치찌개로 흥을 즐기던 우리.

이제는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가격을 보지 않고 주문한다.

나이도 먹었고, 돈도 벌었으니까.


요즘 우리의 가장 뜨거운 화제는 제2의 인생이다.

"나중에 뭐 할 거야?"

“글쎄… 뭐 하며 살지?”

"기술을 배워야 하나?"

"나는 다음 학기부터 박사과정 들어가. 강의하려고."

"나는 조그맣게 회사 차리지 않을까? 지금까지 해온 일로 먹고살지, 뭐.”

"어이, 막내— 김 부장은?"

“…글쎄… 나, 밖에 나가면 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안다.

지금 자리가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 소지품 상자 하나 들고 이 빌딩을 조용히 떠나는 날이 온다는 걸.

높은 곳에 오르면, 멋진 경치를 즐기며 몇 개 남아있지 않은 계단을 열망하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보다 아래가 더 눈에 들어왔다.

앞서 떠난 사람들의 그때가 자꾸 떠올랐다.


강등 통보 뒤 석 달을 버틴 이도,

조직 개편 물결에 밀려난 멘토도,

임원의 자리에서 빛나던 최 상무도

모두 송별회 없이 사라졌다.


한때는 모두 찬란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떠밀린 이별은 늘 조용했다.
이곳에서의 '안녕'이 끝은 아닌데도… 씁쓸하고 외로웠다.

그때 알았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쉬쉬하며 서로를 마주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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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연수 부장입니다."

나는 한동안 이렇게 나를 소개하면서 꽤나 행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해서 금수저 동기에게 주눅 들고, 공채 출신에 치이고, 남자 후배에게 밀렸어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냈던 시간들을 대견해했고,

여자 상사의 두 갈래길에서 최 상무님의 길을 선택했던 나를 곱씹으며 뿌듯해했다.


김 부장이 된 나.

나는 소심해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늘 힘들었다. 작은 팀이 아니라 부서 전체를 이끄는 자리는 눈치도 더 보고, 사람도 더 많이 챙겨야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는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따뜻하게 보듬는 일엔 애정이 있었다. 대범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리더로서의 과감한 의사결정이 어려웠다. 디테일은 강했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내가 누구였던가. 잘 버티는 캔디 아니었나.

부장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정말 노력했다.

지금까지의 나도,

부장으로 살아가는 나도,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참… 그 별명이 딱 맞았다.


문서의 한 줄을 고치느라, 커서가 깜빡이는 작은 화면 앞에서 벚꽃 시즌을 통째로 놓치던 여자.
그때의 나는 “열심히 하면 언젠가 알아봐 주겠지”라는 말을 신앙처럼 믿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순간, 그 믿음은 나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끝까지 가는 용기만큼, 멈출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늦게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곳에서의 마침표를 준비했다.

더는 캔디로 살지 않기로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출근하기 위해 일어난 아침.

유난히 상쾌했고, 막히던 도로도 술술 뚫려 평소보다 빨리 도착했다.

덕분에 향기로운 커피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전날 밤까지 막히던 내년도 사업 계획이 거침없이 풀려, 상무님 보고까지 무사히 마친 그날.

모든 것이 너무 잘 풀려 완벽했던 그날, 생각했다.


때론 힘겹게,

때론 폼나게,

나는 내 계단을 잘 올랐다.

남은 계단을 다 올라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사직서를 썼다.

그리고 마지막 출근 날을 정했다.

대학원 동기들처럼 제2의 인생에 대한 가닥을 잡지도 못했고,

최 상무님처럼 유리천장을 뚫고 임원이 되어 보지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건강검진의 경고,

총량의 법칙에 따라 소진된 열정,

버티지 않아도 될 만큼 두둑해진 통장,

더 높이 오르기엔 모자란 나.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남이 아닌 내가 내 끝을 정하고 싶었다.


왁자지껄, 화기애애한 송별회가 끝났다.

출근 마지막 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 눈을 맞추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부서 직원들의 선물을 챙겨 들고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눈시울이 붉어진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품은 채,

그렇게 나의 회사에 안녕을 고했다.


왜 그날 아침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서를 썼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20년을 버티며 키워 온 맷집이라면

무엇이든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 그만하면 됐다.

최선을 다한 선택에는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았다.


나는 활활 타올랐던 기억을 안고

내 삶의 다음 장으로 향한다.


첫 출근의 그날처럼—

햇살이 좋다.

힘차게 걷는다.



#퇴사

#직장생활마지막

#퇴사송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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