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 you - Sasha Sloan
적당히 욕심부리면서 살고 싶은데 어렵다. 누군가는 가장 바쁜 인생의 시기를 맞아서 미래의 체력을 끌어다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누군가는 할 일이 없어서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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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젊은 사람치고 욕심(야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곡을 찔렀다.
도무지 자랑스러운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나의 내면에서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하는 노력이 불편했다.
스스로가 불에 타다 만 장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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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는데 나에게는 그냥 2024년 13월 같은 기분이다. 1월 1일이 새로운 계획과 기대로 흥분되지도, 그렇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딱 어제와 같은 오늘 같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주변 어른들에게 자주 물었던 질문이 있다. “새해에는 뭘 하고 싶어? “
어른들은 그냥 웃으면서 “작년처럼 지내겠지.”라고 대답하거나 “글쎄…”라는 애매모호하게 말 끝을 흐렸다.
그때 나는 그런 어른들이 왜 그렇게 소망이 없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계절이 오고 가는 한 분기점마다 새로운 기대를 했다. 그리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간극을 크레바스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내년엔 정말 새 사람이 되기를.
지금 내가 “새 해, 뭐 별 건가.”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붕 뜬 기분도 아닌 것이 오히려 편안하다.
작년에 부족했던 나를 올해는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그런 의지보다 그냥 어제 같은 오늘이 될 거라는 안정감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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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불에 타다 만 장작은 이상하게 우울했다. 원래 나는 활활 타오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요즘 스스로에게 감정적으로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쉽게 화가 났던 것 같다. 누군가가 미울 수도 있고, 부러울 수도 있고,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내 감정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것보다 우선시 되니까 내가 내 감정을 무시한 것 같아서 혼자 기분이 저조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왜 내 마음은 아무도 몰라줘?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타인에게 친절하기 전에 나를 잘 돌아보는 게 참 중요한 것 같다.
올 해에는 스스로의 감정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고 싶다. 상대방을 믿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상대 역시 내 감정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겠지,라는 믿음.
시간을 대나무 마디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챕터가 끝나면 또 다른 챕터가 시작되는 책처럼 생각했다. 요즘은 넘실대는 파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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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욕심껏 살아가는 것 같다.
욕심이 많을수록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얻고 산다. 삶이 내 뜻대로 잘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땐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원래 그 정도 노력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고등학생 때부터 무엇 하나 보고 달려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런 질문부터 하는 나는 벌써부터 경쟁에서 뒤처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맞지 않나.
어떤 자격증이나 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집중해야 한다. 집중한다는 건 삶의 일부분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선택한다는 것이다.
밥을 대충 때운다던지, 샤워는 이틀에 한 번만 한다던지, 운동을 하지 않는다던지, 내 저녁 시간을 공부에 쓴다던지…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아서 빨리 어른이 되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내 삶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면서 살고 싶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다. 제 철에 맞는 음식을 손수 지어먹고, 텃밭을 가꾸고, 이웃들과 소통하고… 하지만 부모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일정한 범주의 사회, 경계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집중하라고 이야기했다. 미룬다는 말도 이상하다. 그냥 네 삶이 편해지기 위해서 네가 노력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고, 나도 맞는 말이지,라고 수긍하며 몇 해를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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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다 간 아무것도 잡지 못할 것이다. (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낭만적이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아직도 이상적인 꿈 얘기나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부모님은 여전히 나를 철없는 아이처럼 본다. 그리고 그게 맞을 것이다. 부모님은 현실을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부모님의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 말의 반대말이 거짓인 것도 아니다. 부모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본 것도 아니니까, 세상엔 또 다른 맞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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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지금보다는 경쟁이 덜한 사회다.
만날 아이스크림 먹고 소파에 앉아서 감자칩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건강한 음식이나 좀 먹으면서 속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다.
누군가(아마 공대생?)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는 미터기를 발명해줬으면 한다. 그러면 누군가 억지로 되지도 않는 일을 끝까지 억지로 해낼 필요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 끝없이 좌절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기회비용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없다. 그리고 없는 게 맞다. 누군가의 운명을 운운하며 삶의 크기에 제약을 건다면 환경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비단잉어와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다. 그 잉어는 자기 자신이 작던, 크던 살고 있는 연못에 적응해서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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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내 깜냥을 몰라서 이리저리 튕겨지고 있다.
자신을 믿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것조차도 참 쉽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스스로 욕심이 작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기회비용을 걱정하며 과감한 투자조차 어려워 질질 끌고 있는데 이게 내 삶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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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사주를 봤다.
주변을 생각하면서 에너지가 다 나가고, 정작 내 건 실속이 약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다 놓기도 해서 내 것부터 하는 연습을 하라고 한다.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죄짓는 기분 느끼지 말라고 하는데 위로가 됐다.
이름도 바꾸는 게 좋다고 그러던데, 아직 이름은 안 바꿨다.
사주를 보는 것에 솔직히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제삼자가 처음 보는 나에 대해 ‘어떤 사람’ 일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쭉 듣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들이 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부분도 누군가의 입에서 나의 귀로 흘러들어오니까 새롭다. 차마 어떻게 생각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을 때, 내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어떤 평균의 마음을 가지는 게 좋을지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심리상담과 비슷한 효과가 있지 않나 싶다.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종종 사주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