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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속아주세요.

숲 - 최유리

by 이오십

어설픈 충고가 때로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나는 꼭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뭐가 되어야 하는지 꼭 알고 싶었다.



어제 그녀가 나에게 뭐가 될 거냐고 물었다.

뭐는 괜찮고 뭐는 안 괜찮고...

특히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은 추천할 만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는 나를 너무 좋게 본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그러면서 무언가를 이뤄내길 바란다.


나는 그녀를 좋아해서 힘들다.

정말 뭐라도 돼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미칠 것만 같다.

정작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만 멍하니 8시간 내리 볼 수도 있다.

꼭 명령어가 잘못 입력된 로봇 같다.


말장난 같지만 뭐가 되기 위해서는 뭐를 해야 한다.

냅다 책장을 펼친다.

읽는다.


소설이 좋은 건 엉망인 인간들이 엉망으로 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교훈을 평면적으로 써 내린 책만 읽던 때가 있었다.

동화라던지, 우화라던지, 자서전이라던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한 지침서들.

단순히 내 삶이 뜻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나의 인생은 동화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일 년간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나의 태도가 그녀에게 관찰되었고

그녀는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한 것임에 분명하다.

자격증, 자기소개서, 시험...

나는 좀처럼 움직이고 싶지 않다.

배울 의지가 없다면 조직에 짐만 될 뿐이다.


나는 이런 내가 혐오스러웠다.

혐오를 멈추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언제부터 나는 게으르고 무능력한 걸 혐오했나.


가만 보면 스스로가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편했다.

나는 그녀와 닮았다. 그래서 좋아했나.


스스로의 목을 두 손으로 꽉 졸라봤다.

따뜻했다.

거리로 나가 도움을 청할 용기보다 내 목을 조르는 게 더 쉬웠다.

목 근육이 긴장했고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뿐이지

오히려 살아있다는 사실만 생생하게 느꼈다.


아무래도 죽는 건 싫다.


죽지 못해 사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유능하지 못한 것에 용서를 구하면서 사는 게 더 낫지 싶다.


*


적어도 열정 있는 척하면서 뭐라도 되고 싶다고 욕망하는 게 있어 보이니까 그래야 하는 걸까.

그녀는 내게 열정을 요구한다.

뭐라도 되라는 건 긍정적 자기 변화라는 과도한 열정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냥 되는 일은 없다고 내게 없는 걸 가진 척이라도 하는 게, 결국은 안될 일이라는 걸 알면서.

그녀는 나를 안타까워하고 그것보다는 더 답답해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나를 돕고 싶어 하니까.


근사한 무언가를 꿈꾸고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건 아름답다.

그녀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라고 하는데 정작 그녀는 대충 산다.

그녀를 좋아해도 그녀의 말은 믿지 않는 이유다.

공허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노력해야 한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건 사치다.

나는 사치하고 싶지만 사치할 수 있는 건 글의 세계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것을 아껴서 내게 사치할 기회를 넘겨주고 싶어 했다.

그녀를 위해 노력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를 충분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충분히 사치하고 있다.

그녀가 선호하는 사치재가 아니라서 그렇지.

내 삶에 대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충분히 사치하며 살고 있다.

오히려 그녀는 나의 사치를 걱정하는 게 옳다.


*


그녀는 나의 사치를 보고 있지만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그게 사치가 아니니까.


*



역량을 키우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데에 투자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는 삶을 살고

꾸준히 자신을 개발하고 개발해서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는 말을 그녀에게 듣고 싶었다.


그녀는 20대의 나이는 달려야 한다고 한다.

지금은 달리기 싫은데 자꾸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가 미웠다.

그 말이 노후를 생각하면 달려야 한다는 의도인 건 알겠다만.


*


미워하는 것도 힘들다.

어차피 200년만 지나면 나도 없고 그녀도 없을 텐데.

올해 마무리로 숨을 잘 고르고 내년부터는 뛰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뭘 하던 인생은 허송세월이다.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누군가는 박수를 받고 입에서 입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겠지만 대부분 인간이 어찌어찌 살다가 어찌어찌 간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마음 편히 먹고 잘 먹고 잘 놀다 가는 게 좋겠지 싶다.

그녀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살자. 어쨌거나 듣기 힘들건 마음이 아프건 간에 그녀는 나를 정말 위할 것이기 때문에. 물론 내 맘대로 할 테지만. 그래서 결국엔 내가 아니라 그녀가 미치고 팔짝 뛸 것이다.


푸념일 뿐일 글을 쓰는 게 부끄러워서 그간 글을 올리지 못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글을 써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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