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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Oct 17. 2024

가려움에 대한 해석.

Autumn Leaves - 빌 에반스

부모님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니?

응.


비극적인 일이었다.



나에게는 늘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었다.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토피를 앓고 있었고, 매 계절이 순환하는 때에는 알레르기로 인한 가려움으로 눈앞머리가 붉어져있었다. 그 모든 가려움이 사라졌던 초등학생 무렵도 잠시, 중학생 때에는 접촉성 피부염, 고등학생 때에는 지루성 두피염,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건선을 앓고 있다. 내 피부를 간지럽히는 건 없는데 살살 가려운 부분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환상인지 착각인지 구분 못 하는 정신병 같다는 생각도 한다. 가려움을 느끼지만 사실상 나를 가렵게 하는 건 보이지 않는다. 과학은 이런 가려움에 대해 면역세포의 과민반응으로써 내 몸의 미시적인 반응체계의 착오가 있을 뿐이라고 설명해 준다. 그러기에 스스로의 정신을 의심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 준 현대의 과학에 감사하다.


*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이야기하셨다.


스무 살 이상이 되면 너는 너의 몸에 책임을 가지게 된단다. 그 말은, 지금은 네가 미성년자고 어리기 때문에 부모인 우리가 너의 건강에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네 몸은 네가 챙겨야 하는 거야. 인상도 그래. 네가 가꾸면서 산다면 네 얼굴은 나이를 들어도 환해질 거야.


나는 부모에게 서운했다. 스무 살이 되어도 나는 언제까지나 그들이 낳은 피조물일 텐데 어째서 그 한계가 스무 살이라는 경계선 상에 정확히 놓여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지.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을 말이기 때문에 건강을 잘 챙기라는 조언의 의도일 테니까. 일곱 살 무렵, 소아과 대기 순번을 기다리면서 부모님이 했던 말에 느낀 씁쓸함에 순진한 표정으로 부모를 그냥 바라봤던 것 같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는 거지?


*


더 이상 너를 책임져주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이제 와서 보니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종종 부모님은 내가 빨리 자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배포가 커다란 가장 완결적인 인간.

부모님은 교육에 엄청나게 투자하셨다. 마치 식물에 성장촉진제를 주는 것처럼 나 역시도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 것이다. 학습지, 학원, 과외…


*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점심마다 아버지는 종종 속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화두로 던졌다.


흠흠, 내 친구 딸내미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말이야. 장학금을 타서 학비가 공짜라네?


그 과학고 갔다던 친구 딸 말이야, 그 친구 포항공대에 입학했다네. 학교 돈 받으면서 다닌대. 기숙사도 공짜로 주고 말이야. 어휴… 좋겠어.


아휴, 우리 딸이 빨리 커서 호강시켜 주면 좋겠네.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아버지 친구의 이야기.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부모님을 사랑했고, 큰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늘 나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효도하는 자식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과학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지 알려고 노력했지만 알지 못했다. 어떤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과학고등학교에 가는지 몰랐다. 그래서 가게일을 하면서도 나의 수학학원, 과학학원 픽업을 도왔고, 어떤 학원이 좋다더라, 하는 정보를 아버지 기준으로 찾아보고 등록해 줬다. 나 역시도 과학고등학교에 가는 걸 목표로 했다. 왜냐하면 그러고 싶으니까. 그리고 나는 운에 기댔다. 이제까지 어떤 계획이나 목표 없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로 가능했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아직도 어떻게 과학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


부모님은 어쩌면 내가 그 자체로 자랑스러웠을 수 있다. 유치원 때 아이큐 지능 검사에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특출 나서 부모를 유치원에 호출했다고 하고, 초등학생 때는 영재원에 합격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사회성까지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었으니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듯싶다.


나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자부심 있는, 자신감 있는 어린이는 삶이 어렵지 않다.


*


학원은 좋았다. 모르는 걸 쉽게 알려주니까.

쉽게 알려주는 것에 익숙해지면 자의적인 해석에 게을러진다.


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학원에 내성이 생겼다. 점차 학원을 관성적으로 다녔다. 그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안 좋았다. 그 시간에 만화책을 보거나 산책을 하고 싶은데 형광등이 빛나는 좁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척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해석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세상살이는 매일매일이 연기 같았다. 모두가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고 믿고 나 역시 매일을 연기를 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희뿌연 연기가 가득해서 진짜가 가려져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모두가 알 수 없는 답에 대한 이야기를 미루고 미루고 또 지연시켜서 모든 게 흩날린 채 공중에 연기가 되는…


 모두가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를 하고 같은 시간에 눈을 떠서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를 빠르게 풀이하는 걸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틀리지 않기 위해 혹은 새로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해설지를 보고 계산하고…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나 조차도 이런 상황에 대해 순응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부모님에게 물어봤다.


공부를 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득 보는 게 많아.


선생님도 똑같은 말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손해 볼 것 없다. 좋은 대학 가면 네 인생이 바뀐다.


‘공부’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서로 논의가 필요했다. 대화를 시도하는 적극성을 보이는 등,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팠어야 했다. 오해를 받더라도. 대개는 소통오류로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동문서답. 아예 입을 닫고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


과학은 내 가려움을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해설했다. 하지만 나는 해결되지 않은 갑갑한 심정이 내 피부를 뚫고 나와 나를 가렵게, 따갑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자라고 싶어서 이것저것 영양제를 맞았는데 어떻게 나는 더 허약해졌는가…라는 게 나의 물음이었고 그 문장 안에 답이 있다.


거칠게 말해서 스킬을 배우고 숙련된 무언가를 그렇게까지 많이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관계, 문장 사이의 함축된 의미, 기호의 약속을 학습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


부모님은 성실함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돈을 괜찮게 벌었다. 가성비를 추구한다. 저녁 여덟 시까지 늦게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는 날이면 부모님과 나는 불 켜진 김밥집에 가서 가장 싼 김밥 두 줄과 라면 한 그릇 주문해서 먹고 중고 카렌스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아침 여덟 시면 제깍제깍 학교로, 일터로 복귀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내가 어떤 의미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 의미 없다. 부모님, 주변인이 나에게 실망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그건 실망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나의 지식적인 교육에 투자를 해온 돈과 시간은 그 한 번의 실패로 사라지는 값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피워내기엔 충분했다. 나는 사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순위권에 들만큼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걸 공식적으로 증명받은 것이니까.


그때는 그런 타이틀을 떼어내는 게 그렇게 아쉽고 자신을 잃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일찍 자기 틀에 갇혀버리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


덧붙여 진짜 ‘실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나는 그게 아직까지 인생에서 감사한 점이다. 나는 아직 부모에게 진짜 실망을 안겨주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가려움. 나중에 누군가에게 정말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면, 혹은 ‘실망’하게 된다면 그때 나는 실망을 정확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려움과도 다르고 발작과도 다를 것이다. 한숨과 가장 닮아있을 것 같다.


괜찮은 삶이라는 건 부모님에게 성실과 정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 때를 잘 맞추는 것. 그게 괜찮은 삶이라고 나는 부모님에게 배웠던 것 같고, 그래서 제 때를 잘 맞추지 못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나이에 대한 강박을 느낀다는 건 뭘까. 가끔 나는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스탠더드’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용서, 아니 용납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세상이 갑갑하고 무거워진다. 심각하다.

그럴 때면 다른 언어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놀랍게도 그러면 속이 편안해진다.


언어에는 언어 사용자들의 생각패턴이 깊이 녹아있다. 시점도, 관점도 언어마다 비슷하거나 아예 다르다. 인칭도 다르고, 시간에 대한 개념도 다르고. 그렇게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쨌거나 우린 다 다른 언어를 써도 모두 보편적인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니까.


내가 생각해 온 대한민국의 표준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심지어 다 구간마다 적절한 시기가 정해져 있다. 쓰고 보니 생계유지, 밥벌이를 하면 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사회에 기여하고… 어른이고 철든 행위를 하는 것 말이다.


표준이라는 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이드라인을 주기도 한다.


*


문제는 이런 거다. 일단 스탠더드를 충족시키고 너의 개성을 삶에 추가해라.,라는 사고방식.

현재 우리나라에서 내가 생각하는 표준을 충족시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요즘은 어른들도 이해하는 것 같다.


내가 자라온 세대들은 하고 싶은 것을 미루기를 사회의 미덕으로 삼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로 더 이상은 미루지 않을 거야, 하는 반항심리도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는 나름의 시간감각이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님 역시 나에게 미루기를 ‘은근히’ 종용했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은 그 어떤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룬 것이라는 ‘말’이며,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은 거리를 두라며 텔레비전을 없애버린 것 하며, 당장에 해보고 싶은 어떠한 독서행위, 글쓰기 등을 시험 기간 이후로 미루라던지…


부모님은 나에게 괜찮은 삶을 살길 바랐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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