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 최호섭
똥 이야기에도 구역질이 나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을 때 주의하세요. 똥, 응가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비위를 상하게 할 의도는 없습니다.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고 이빨로 잘근잘근, 으적으적 씹어서 똥꼬로 응가가 나온다.
허파에서 숨을 내쉬면서 성대가 진동하면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혀와 입술은 소리를 자른다.
시간을 분해하는 것이다. 입과 이빨, 똥꼬는. 초등학생 때 똥은 ‘배설’이 아니고 ‘배출’이다,라는 표현을 듣고 나는 한참 신기했다. 아직도 곱씹는다. 배출… 호스 끝에서 끝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말이다.
나는 변비가 있는 것 같다.
응가를 잘 못 눈다는 건 씹어 삼킨 것을 못 내보낸다는 뜻이다.
장기의 문제든, 정신의 문제든, 먹은 게 문제든…
며칠 전 집 베란다에 놓여있는 내 졸업작품을 엄마가 말도 없이 버렸고 저녁에 그걸 찾으러 쓰레기장에 갔던 기억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는 미안해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나는 말없이 버린 엄마가 이해되면서도 화가 났다. 다시 주워올 수 있다면 다시 가져오고 아니면 미련 없이 버리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분리수거를 위한 공간과 음식물 쓰레기통, 종이쓰레기 버리는 곳, 의류수거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종이 상자 무더기가 넘쳐흐르는 곳 앞에서 멈춰 섰다. 상자더미가 적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아래에 내가 찾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글쎄.. 화가 났었나. 아직은 괜찮았다. 혹시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상자 두 무더기를 치우고 나서 훼손된 작품이었던 것을 발견했고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온갖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늘 정도의 문제다. 이 정도면 다시 복구할 마음이 있는지, 나도 잘 알지 못했다. 사실 졸업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럴 뿐, 그저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쓰레기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걸로 화를 내면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내가 도리어 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나는 작품인지 재활용쓰레기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더 확실히 부쉈다.
외벽이 쭉 찢어진 채 횡압력을 받아 바닥 단면이 비틀려있는 길쭉한 모형을 보고 있자니 슬펐다. 그래서 더 확실히 망가뜨렸다.
그럼에도 만들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 시간을 추억하는 용도로 아크릴 상자를 작게 만들어서 오래 보관하려 했던 게 떠올라서. 내 시간이 무시받은 기분이었다.
*
우리는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눈다.
변기에서 변을 누고 물 내리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응가를 누고 응가를 버리지 못하는 시츄,… 뭐 그런 것 같았다. 만들었던 모형을 버리지 못하는 나와 응가를 먹어버리는 시츄…
똥을 누던 시간을 똥의 존재로 추억하고픈… 뭐 그런 것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울었다.
그렇게 미숙하다.
무엇을 다시 만들 수 있음을 믿기보다도
다시는 그때처럼 바보같이 공들여 해낸다는 게
다시는 하고 싶지 않고, 하지만 그만큼 견뎌냈던 무엇이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
‘그걸 해봤음’을 잊게 되는 게 싫어서 박제하고 싶었다. 사진도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용서도 원망도 다 필요 없었다. 그냥 인정이다.
원래 다 아무것도 아닌 거다.
다 변기 하수구로 흘러갔듯이, 쓰레기장으로 가버리듯이, 흙으로 돌아가듯이 이름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딱 그 그때만이다.
뭐든 오래 쥐고 있다 보면 지금은 아닌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게 해골인지, 원석인지, 썩어버린 찌꺼기인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만들어낸 게 ’ 버려졌다 ‘라는 게 화가 났던 것 같다.
시간 들여 만든 것이 ‘작품’이 아니라 ‘똥‘이었다고 생각하니까, ’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 생각하니까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