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To Heart - 포미닛
부모님과 살다 보면 간혹, 아니 자주 생기는 불편한 지점이 있다. 십여 년 전에 고부갈등이라던지, 제사를 지내는 종갓집에 대한 문제라던지. 그런 것들과 결이 비슷한. 그 세대에서는 충분히 유머코드나 상대방 기 세워주기용 립서비스일 수 있으나 자식인 나의 입장에서는 전혀 유쾌하지 않은 그런 류의 입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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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64년 용띠로 김제 가난한 집 일곱째 아들로 태어나 새벽 네시에 기상해 어머니를 도와 수박밭을 매고 학교에 등교, 학교를 마치면 또 돌아와서 두 세시 뙤약볕에 잡초 뜯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실업계 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예식장 사진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교 학비를 벌고 또 집안 농사를 돕고, 어느 보험회사에 취직해 회사에서 마주친 경리 여직원과 결혼했다. IMF 무렵 회사를 나와 딸 하나를 낳고 2년 뒤 둘째를 가졌다. 그 둘째가 나다. 그 무렵 동네에서 명함 및 판촉물 디자인 가게를 인수받아 김제에서 전주로 이사했고, 사업은 번창하여 애 둘을 잘 먹이고 기를 정도의 형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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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서 2025년까지, 대략 60년, 10 간과 12지가 조합되어 굴러가는 인간의 시간 한 바퀴가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된다는 말도 다 옛말이다. 64년 용띠 아저씨도 아침에 일어나면 30분 동안 유튜브 쇼츠를 보고, 저녁에 집에 와서 틱톡을 본다.
유치한 면도 있다. 아버지가 나를 길러준 것은 알지만 크고 보니 아버지가 인간으로서 애정을 갈구하는 방식이 어른스러운 체하지만 유치하다던지(조금은 징그럽다.), 경제적인 면에서 모순적인 데가 있다던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린 부분이 있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검소하게, 형편껏 살자. “라고 말하며 안분지족 하자 하지만, 가끔은 벌 수만 있다면 개인적 부를 한껏 키워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아껴야지, 하면서도 최신 스마트폰은 써보고 싶다던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어플의 기능에 대해 설명해 주길 바란다던지, 딸이 나서서 다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던지, 몸에 좋다는 건 딸이 알아서 챙겨주길 바란다던지… 뭐 그런 것들. 물론 아버지는 최신 스마트폰을 시기마다 바꾼다던지 하는 부류는 전혀 아니었고, 알아서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드시는 부류의 사람이다.
60대가 되고 나서는 다 써보고 싶고, 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최신형 태블릿도 하나 장만하셨고, 지금은 중단하셨지만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도 공부했다. 가끔 아버지가 자신은 하나도 해보지도 못했는데 니들(언니와 나)만 좋은 거 다 해보고 사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고 느낀 순간이 생긴다. “왜 좋은 건 니들만 하냐.” 이런 말을 하실 때 그렇다고 느꼈다.
안 가져봐서 그렇다… 결핍에서 기인한 콤플렉스가 나의 눈에 보일 때는 안타깝기도 하고, 민망스럽다. 요즘 아빠와의 관계에서 가장 문제 되는 부분은 비언어적/반언어적 습관이다. 아버지는 나를 볼 때 그리 밝은 표정도 아니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나 역시도 그리 밝게 대해주지 못한 점이 아빠에게 죄송스럽다. 누적된 작은 순간들의 불편함이 건드려질 때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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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버지의 지인분과 자리를 함께 할 때가 있는데, 가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듣고 감정이 상한다. 자식 된 입장으로 아버지에게 감정 상한다는 게 마냥 유쾌하진 않다. 상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분이 상한다는 게 얼마나 소모적인 순간인지 모른다. 상대가 상처 줄 마음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뱉는 말인데 나 혼자 불끈 주먹 쥐게 되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한 게 아닌가, 혹은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점점 이러다 보면 아버지와 깊은 대화는 나누기 어렵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래 세 문장(*1, *2, *3)은 지난주 아버지와 지인분이 만난 자리에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문장들이다. 여섯 시에 기상해서 물리적인 힘쓰는 노동을 2시간 동안 하고,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 지인의 가게에 들러 1시간가량 나눈 대화에서 내가 감정 상했던 문장 세 개를 추려봤다.
* 1.
“얘 그냥 이 집에 줄까 봐요. 데려가요. 이 집 아들한테 시집/장가나 가면 좋겠네. “
상황 : 지인의 아들/딸 직업이 전문직/대기업/공기업/공무원/그 외 어른들이 끄덕이는 직종인 경우, 또는 그 자식이 돈을 잘 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대방(지인)에게 하는 말.
아버지의 의도 : 상대방(지인)에게 자식 잘 키웠다고 공치레 하기.
그 말을 들은 나의 감정 : 자식이 부모 소유물도 아니고 주네, 마네 하는 것부터가 이해 안 됨. 아버지 마음대로 ’ 시집보낼 수 있는 ‘ 어떤 대상으로 본다는 게 기분 나쁨.
나의 대응 : 지인 분께 아들 칭찬을 이어서 했다. “아드님이 공부 잘하셨나 봐요~ 어머 좋겠다. ^^” 등등.. 아버지는 이런 ’사소한 말‘로 기분 상해하는 걸 이해 못 한다고 입장 정리를 해오셨기에.
*2.
“새로 나온 좋은 지식이라던지, 기술이 있으면 옆에 붙어가지고 하나하나 알려줘야지. 어린애들도 공부에 재미 붙이기 전에 부모나 선생이 옆에서 하나하나 알려주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한테 좋은 정보 있음 하나하나 천천히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얘 언니는 그래도 좀 잘 알려주는 편이고, 얘는 그런 거 잘 안 알려줘.”
상황 : 아버지와 동갑인 지인이 손목에 스마트 워치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하다가 나온 말.
아버지의 의도 : 딱히 없고 불평하기.
그 말을 들은 내 감정 : 요즘 나한테 불만이 많나? 왜 지인 앞에서 굳이 자식 트집을 잡지. 또 내가 불편했던 건 언니/동생 간의 비교였다. 언니의 직업(초등학교 교사)에서 아버지가 느끼는 자부심-내가 교사를 키웠어/친척들 앞에서 면이 선다 등-이 상당하며, 언니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난 뒤 아빠가 언니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것을 느끼기에 아침에 아버지의 일을 도와준 나를 좋게 말해주는 것보다 까내리는 것에 서운하다. 자라면서 느낀 건데 아버지는 비교를 참 많이 하신다.
나의 대응 : ”나도 아빠가 물어봐서 알려달라는 건 다 알려줬지. 지난번에 pdf 문서 단어 수정하는 것도 (세 시간 걸려서) 대신했잖아요”, “내가 아빠에게 유용하겠다 싶은 어플이 있으면 나서서 알려주지, 그런데 나도 모든 어플을 다 알고 쓰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니까 나서서 하나하나 알려줄 순 없는 거지.”라고 적당히 대응했다.
내가 봤을 땐 언니가 도움 주는 거나 나나 비슷하다고 느끼는데 실제 체감은 다를 수도 있지만 사실이래도 말을 서운하게 한다.
*3.
“나는 말이야, 내 부모, 어머니가 불쌍해서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 말하자면, 공백이 없었다고. 매일 집에서는 새벽같이 나가서 밭 매고, 학교 나가서 공부하고, 대학도 알아서 가고 말이야. 근데, 너는…”
상황 : 집 가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느낀 불편함-아버지를 도와 휴일에 노동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나온 말,
아버지의 의도 : ‘나(아버지 본인)는 참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며 이 정도까지 자라왔는데 너는 부모를 돕는 것에 대해 당연하지 않은 거라고 주장하는 게 이해되지 않음‘, 의 표현일 수 있겠지 싶다.
내 감정 : 아버지가 겪은 환경적인 결핍, 그에 대한 보상을 자식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건가? 황당하다.
나의 대응 : “아버지가 참 고생 많으셨네요. 근데 아빠가 겪은 결핍을 자식인 내가 똑같이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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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아빠에 대한 안 좋은 기억만 꺼내놓는 것 같아서 자식으로서 죄송스럽다. 분명 아버지도 자식인 내가 아버지의 말에 하나하나 토씨 단다고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안다.
가끔 내 주변에 매일같이 마주치는, 가까이 사는 상대방의 흠이 보이면 주제넘은 일이지만 그걸 지적하는 게 옳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 상황이 같지는 않겠지만 쉽게 비유하자면 상대방의 이빨에 고춧가루가 껴있는 것/바지 지퍼가 내려가 있는 것/코에 코털이 튀어나와 있는 것/… 등을 상대에게 말해주냐, 하지 않느냐와 비슷하지 싶다. 물론 고춧가루는 떼어내면 되고, 지퍼는 올리면 되고, 코털은 깎으면 되는 일이지만 언행과 같은 상대의 인품을 지적하는 일은 앞의 사건들과 경중이 다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상대의 언행에서 비롯된 불편함, ”당신의 투박함이 내겐 상처가 된다. “, 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에 참 고민되는 지점이다.
나는 두 가지 기준으로 말을 할지, 안 할지를 결정지었다.
첫 번째, 상대방과의 관계가 죽을 때까지 우호적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관계인가.(지속성)
두 번째, 상대방이 내가 기분 나빠하는 지점을 알고/모르고 있는가.(고의성)
첫 번째 기준에서 상대방이 내 인생에서 잠깐 마주치는 정도의 사이면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꾸준히,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면 두 번째 기준으로 판단이 넘어간다.
두 번째 기준에서 상대방이 알고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를 따져본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모르고 계속하는 것이라면 그 순간을 보내고 이후에 이야기를 꺼낸다. 능숙하지 못해서 다퉈도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에 기분 상해도 나 역시 상대방의 언행에 기분이 상했기에 주고받은 거라고 본다.
어쩌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네가 뭔데 내가 가진 언어습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말을 놓는 것인가, 왜 내가 고쳐야 하는가, 에 대해서 반발심도 들 수 있고 말이다. 이것도 자식인 내 입장에서 이기심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이랑 있으면 불편하다고 이야기 듣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꼭 말을 해야겠지 싶었다.
아버지는 매일 보고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사이고, 아버지가 그런 류의 말씀(*1, *2, *3)을 하시는 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겪어왔기에 - 그동안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내가 불편한 걸 말하지 않기를 선택해 왔다.- 요즘은 조금씩 불편한 사항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상대방(나)이 기분 나빠하는 지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나는 이미 나이 들어서 이렇게 돼버렸는데, 젊은 네가 나한테 맞춰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맞춰주기 참 힘들다면서, 이럴 거면 입 닫고 말지 하고 들어가서 틱톡을 보신다.
일단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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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투자한 돈이 얼만데, 갚아라.”
이건 또 다른 말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나는 종종 아버지의 이 말이 참 싫었다. 지나가는 세월에 구호함이라도 제작하듯이. 어머니는 “아이, 그거 갚지 않아도 된다. 건강하게 잘 자라면 된다.” 이야기했지만 간혹 언니와 아버지가 다툴 때, 그러니까 언니가 아버지의 말에 대한 부당함에 토로하고 아버지는 언니에게 자식이 싹수없게 말대꾸한다고 호통치는 레퍼토리를 겪을 때면 아버지는 꼭 끝에 이 말을 했다. “니네들 교육 안 시켰으면 우린 매년 해외여행 다니고 놀러 다녔어.”
나는 그 문장의 진위를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달에 한 번씩 꼭 들으면 죄책감도 들고, 실망스럽지 않게 자라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그게 꼭 나쁘지만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사실이긴 한데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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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함없는 인간이 어디있겠는가. 내가 잔뜩 아버지의 못난 점을 써내려갔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나에게 좋은 아버지로서 있어주셨다. 과일도 깎아주고, 고기도 구워주고,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이게 아주 작은 일부다. 좋은 기억의 아주 작은 일부. 좋은 기억은 더 많다. 초등학생 때 주말이면 함께 등산다니고, 힘들면 업어주고.
복수나 용서, 미움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가정 내에 이런 불화는 참 사소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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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무주상보시 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내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것.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문장인데 아버지와 함께 다큐를 보면 좋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