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ssy - 조성진
한 캔에 3200원.
허기지다. 위장도, 마음도.
참치 캔 뚜껑 따서 기름 쏟아내고 젓가락으로 한 입, 두 입 먹는다.
이러면 조금 가신다.
허기질 땐 참치 한 조각이 너무 커다래서 눈물이 난다.
캔이 비어갈 때마저 난 아직도 배고프다.
내 위장이 잘못된 건가
참치 캔이 잘못한 건가.
참치캔 하나
그거마저 없었더라면.
아냐.
참치캔이 너무 얕아서 그런 거다.
절대 내 위장은 잘못이 없다.
캔 하나를 따도 또 다른 캔 하나 더
이러는 내 마음은 잘못이 없다.
찬장 속 참치 캔이 다섯 개 남았다.
누가 찬장에 참치를 넣어뒀나.
왜 내 심장엔 마음이 있나.
쥐어짜도 나올 건 기름 밖에 없는 건 내 몸도 마찬가지다.
참치 덩어리가 캔에 남아 버티고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엔 응어리진 허기가 남아 버틴다.
*
누구나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
혁명의 불씨는 배고픔이다.
유난히 나는 배가 고픈 걸 못 참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내 허기짐을 제 때 채워줄 거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탓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본성이지만 나는 나의 허기짐 못 참는 버릇을 부모에게 돌린다. 부모는 나의 허기를 제때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대부분의 이유가 일을 늦게까지 하느라 바빠서 그랬다, 가 전부이지만 - 부모의 사정을 이해하긴 하지만 - 대부분의 저녁에 기다림이 길었다.
부모는 최선을 다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배달시켜주기도 하고, 강낭콩을 수북이 넣어 최소한 밥은 건강하게 먹게 했다. 그럼에도 성장을 멈추지 않던 그때에는 크고 작은 실망이 쌓였고, 더 이상 스스로의 배고픔을 참기 싫어질 때 되어서야 성장이 멈췄다.
*
고루한 소원이라 생각해 스스로 인정 안 했는데 나는 이제까지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바라왔다. 그냥 문장 그대로다. 일하는 엄마 귀찮으랴 번거로우랴 생각 안 하고 "오늘 저녁엔 제육볶음이 먹고 싶다" 하면 저녁 밥상에 제육볶음이 있는 식탁을 갈망했다. 여기서 왜 아빠는 빼고 엄마에게만 그러냐, 한다면 나도 사회적 산물에 불과해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라는 관념이 강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아래 이야기는 오직 엄마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아빠도 해당된다.
나는 마음속에 그런 소원을 담아두고 입은 꾹 다물었다. 나는 화가 나면 장을 봐서 밥을 해 먹었다. 배가 고프면 화가 나니까. 화가 나면 슬퍼지니까 늘 맛있는 밥을 해 먹는 게 내 20대의 한풀이였다.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하면 엄마도, 아빠도 같이 내가 한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들이 맛있다고 칭찬하는 소리보다 내 분노가 삭히는지가 중요했다. 밥 앞에서도 나는 분노했다. 원망일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나의 욕구는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엄마 아빠는 식탁 앞에서 내가 얼마나 허기져 있는지, 얼마나 분노해 있는지, 왜 요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묘한 아이러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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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은 사무실에서 골방 한편에 서너 살 무렵의 나를 두고 일을 할 때였다. 나는 몸을 겨우 가누며 앉은뱅이 걸상으로 돌진해 뚜껑이 반절 따인 참치캔을 맨손으로 퍼먹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작업의뢰서에 여러 사장님의 디자인 의뢰가 날림으로 써 내려가고... 참치캔 날붙이에 손 베이는 것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참치를 탐했다. 엄마는 그 풍경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갔다고 한다. 참치캔 하나가 텅 비어있고, 이불에는 기름자국이 진한 얼룩으로 남아있고, 고사리 손에는 생채기가 나있고...
배는 불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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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를 마치면 늘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맛있어서 먹었다. 아마 지금 내 키는 라면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양라면, 진라면, 신라면, 맛있는 라면... 나는 야채후레이크가 다양한 맛있는 라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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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를 원망하는 게 너무 싫었다. 부모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해왔는지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 지독한 성실함이 지겨웠고, 존경스러웠고, 감히 투정할 수 없었다. 자식들에 관해서는 서툴긴 해도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저녁에 차려진 밥상의 부족함이 보여도 그게 최선의 밥상이며 부모의 사랑이 있는 시절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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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게 모르게 편식이 있다. 김칫국에 있는 검초록색 배춧잎을 싫어했다. 찌꺼기 같은 게 연상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나의 선호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고, 해줄 수 있는 걸 해주는 게 중요했다. 김칫국을 일주일 내내 끓여 먹기도 했고, 시래깃국을 한 달 내내 먹기도 했고, 가끔은 분식집에서 오징어덮밥을 시켜 먹기도 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엄마는 내 선호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선호라는 건 있는 것에서 고르는 것이 전부였고, 아쉬울 새도 없이 그냥 있는 대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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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생이 되어서는 집에서 밥을 혼자 먹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로 둘이서 밥을 먹었겠지만 나는 집에 있는 밥솥에서 아침에 아빠가 안쳐둔 밥을 한 주걱 퍼서 계란프라이 하나와 먹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에도 엄마와 아빠는 바쁘니까 언니와 함께 밥을 먹었다. 언니는 요리를 책임감에 하는 사람이었다. "요리는 내가 할 테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
고개를 끄덕이고 탄맛 나는 계란말이를 케첩에 푹 찍어 먹었다.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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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맛있는 게 먹고 싶어지면 유튜브에서 요리 영상을 찾아봤다. 스스로 해 먹었다. 토마토 새우 파스타도 해 먹고, 잔치국수도 해 먹고, 김치볶음밥도 해 먹고, 수플레 팬케이크도 해 먹고,...
나는 엄마에게 "이걸 해줘."라고 부탁해 본 적도 없고, 엄마로부터 원하는 걸 먹어본 적이 드물다. 엄마는 "뭐가 먹고 싶니?" 물어보긴 했어도 대부분 돌아오는 답이
"그건 집에 재료가 없잖아, 있는 걸 해달라고 해야지.",
"그건 너무 복잡한데 그냥 치킨이나 시켜 먹을까?",
"다른 가족들은 배가 아직 안 고프다는데 저녁때 먹을까?".. 이렇게 흘러갔다.
그럼 왜 물어봤나 싶을 정도로, 엄마는 대부분 내가 바라는 걸 허기질 때, 제때 먹여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허기지면 가끔 허무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참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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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메커니즘을 몰랐을 때,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어서 혼자 분노하고, 울었다.
내가 식사를 준비할 땐 먹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보다도 약간의 울분이 묻어있었다. 내 음식을 나눠먹는 게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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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엄마가 종종 언니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해 줄 때면 질투가 났다. 앞서 말했듯이 언니는 요구적인 자식이었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피곤해지기 전에 바라는 걸 내어주는 게 편하다는 걸 깨달은 나의 성실한 부모는 언니의 감정이나 요구에 더 감각이 예민했다. 그에 비해 그들에게 화내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 스스로의 욕구를 강요하지 않는 나의 감정이나 요구에는 매우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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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언니가 주말에 집에 오면 김밥을 말아준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가벼운 음식이라서. 사실 언니가 요구하지도 않는데 엄마가 해주는 것이다.
언니는 스스로의 욕구불만을 타인에게 분노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사춘기를 지나왔고, 경제적인 상황이 나아진 현 상황에서 본인의 욕구는 본인이 더 잘 해소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아마 엄마가 김밥을 싸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긴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려는 아주 바람직한 명목일 것이다.
나는 김밥을 먹으면서도 분노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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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치킨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치킨을 좋아하긴 하는데 좋아하지 않는다.
배달로 시켜 먹기에 간편한 음식이라서, 치우기도 편하고 단백질이니까, 무엇보다 "뭐 먹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그건 재료가 없잖아", 혹은 "그 음식은 좀 그렇지 않아?"라는 논쟁 따위를 뒤로 할 수 있는 음식이라 대답하는 것일 뿐인데 엄마는 내가 치킨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아닌데...
가족들은 내가 비밀스럽게 군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입으로 자신의 요구만을 내뱉었지 나의 요구에 귀 기울인 적은 있나 의문이다.
언니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밀린 숙제 하듯, 대학생이 자료조사하듯 묻곤 했다. 나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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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니는 우리가 '자매'의 장점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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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나에게 종종 유용한 정보를 주곤 한다.
본인이 힘들 때, 자신의 열등감에 취해 본인의 동생을 시기하며 미워하던 때를 뒤로 하고 현재의 언니는 잘 산다. 하지만 협력하고 싶던 때는 지났다. 언니의 물음마저 나는 '그게 본인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너무 속물적이고 솔직한, 무례하기까지 한 생각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본 언니는 그랬다. 단지 동생이라는 이유로 떡 하나 더 주고, 양보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기 손해는 절대 보지 않을, 똑똑하다면 똑똑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필요하니까 물꼬를 트는 사람.
"내가 요리를 하니까 너는 설거지를 해."
"너는 ~~를 하니까 나는 ~~를 꼭 가져야 해."
그리고 꽤 통제적이었다. 내가 오므라이스 위에 계란을 프라이로 올리던, 스크램블로 올리던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같이 먹는 요리에서 스크램블을 만드는 과정 하나, 혹은 계량 하나가 완벽하지 않으면 뒤에서 상관했다. 내 생각에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도 언니는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서 좀 속이 탔던 부분도 있다.
"우유는 조금, 아니 조금 더... 넣어야 하지 않나."
"도마는 한번 닦고 써야 하지 않나?"
"기름 먼저 넣고 팬 달구면 어떡해. 팬 먼저 달구고 기름 넣어야지, "
"아니, 우유 넣고 소금 넣으랬잖아. 소금먼저 넣으면 어떡해." (내 기억에 정말 중요하지 않았던 지적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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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때를 지나서 이제 나는 웬만한 훈수에 끄떡 않을 정도로 요리에 나만의 방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참고로 언니는 그때의 언니와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언니가 불편하다. 언니는 내 눈치를 본 적이 드물어서 내 욕구를 잘 못 읽는데, 나는 그게 피곤하다. 늘 내가 먼저 언니의 표정을 읽는다. 그러면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리고 나는 또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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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나는 배가 고프면 참치캔을 뜯어서 먹는다. 그 시절을 회상하냐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 내 기억엔 없기 때문이다. 그때도 나는 화가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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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 주린 내 배를 채워주는 게, 내 뱃속을 제 때 생각하는 게 나뿐이라는 게 화가 나는 걸까. 나는 얼마만큼의 이해와 사랑을 더 바라는 걸까. 어디쯤에서 포기를 해야 하는 걸까.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오직 나만이 나에 대해 예민하게 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누가 내 허기짐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도 아직 남아있다.
앞서 "누군가가 내 허기짐을 제 때 채워줄 거란 기대를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실망이 두려워서 기대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녁약속이 잡혀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밥을 해서 먹는다. 그러면 묘한 만족감이 쌓인다.
*
나는 참치를 먹어도 화가 나면 글을 쓴다. 글을 써서 풀어버리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허기짐이 채워지지 않아서, 분이 풀리지 않아서 글로 맺힌 게 풀릴 때까지 그때 있었던 걸 지금도 쓴다. 그게 인간의 무서운 점이다. 나도 모르게 생겨난 앙금. 제 때 해결하지 못한 허기짐이, 실망이 해일처럼 다 휩쓸어버린다.
늘 내가 배가 고프지 않도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