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o Player> 2001년

by 노용헌

세계적 거장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대표작으로 최고의 배우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2001년 제54회 칸국제영화제 그랑프리-여우주연상-남우주연상까지 칸 역사상 전무후무한 3관왕 석권했다. 영화 제목이 소설의 <피아노 치는 여자>가 아니어서 동명의 영화 로만 폴란스키의 2002년 개봉된 <피아니스트The Pianist>로 착각을 한다. 이 영화는 폴란드의 유대계 피아노 연주자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2차세계대전 후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내용의 자서전 <도시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또 다른 영화 제인 캠피온 감독의 1993년 개봉한 <피아노The Piano>도 인상적인 영화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5.jpg

<피아노 치는 여자>는 상대방에게 집착하며 학대를 가하는 한편 서로를 남성의 대체물로 여기는 기이하고도 독특한 모녀 관계,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통제, 관음적이고 마조히스트이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피아노 교사 에리카, 그리고 비정상적인 사랑, 남성적인 시각의 남자 제자 클레머와 욕망, 노골적인 성 묘사와 함께 통상적인 남녀 관계를 전복시키려는 과정을 음악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언어로 표현하여 문학에서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고, 이런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에 의아한 점도 있지만, 소설에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영화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이해가 들기도 한다. 2004년 스웨덴 한림원이 옐리네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결정한 것도 거의 음악적인 경지에 가깝게 언어를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과 더불어 유럽의 ‘비판적 지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이 지향하는 사회적 참여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3년 작품 <피아노 치는 여자>는 수도 빈에서 음악과 독문학 및 연극학을 전공한 옐리네크 자신의 자서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며, 주인공의 성격을 프로이트와 라캉의 심리분석적인 틀로도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에리카 코후트처럼 옐리네크도 어린 시절 자신을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철저하게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켰던 어머니를 증오했다고 고백한다. 옐리네크는 파이프오르간을 비롯해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대학을 졸업하고도 어머니에 대한 반발과 오기로 음악가의 길을 가지 않고 독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고 전한다. 이 소설의 상황처럼 옐리네크의 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옐리네크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딸은 부부처럼 한 침대에서 자며 정신적으로 서로에게 남성의 대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에리카는 어떤 남자와도 일반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원인이기도 하다. 죽음만이 오직 이 둘을 갈라놓을 수 있을 정도로 두 모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며, 라캉의 이론을 빌린다면 ‘상상의 세계에서 결합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라캉이 재해석한 오이디푸스기에 따르면, 아버지의 개입이 없는 엄마의 결여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상상계는 상징계로의 진입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아버지(사회의 전체 체계)라는 체계의 금지(법, 관습, 규율)등이 온통 혼란스러운 상태인 셈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2.jpg

“에리카는 부모가 결혼한 지 이십 년 후에야 비로소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세상에 위험한 존재가 될까봐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p.21)


“자식은 어머니의 우상이고,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그저 약소한 대가를 요구할 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의 삶 전체인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삶을 자기가 평가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한다.”(p.39)


그녀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환경적 원인은 특이한 모녀 관계에서 비롯된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꿈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인지, 아니면 딸 에리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인지, 뭔지 모르는 강압적인 구속과 통제를 하려고 한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는 결국 에리카에게 사디즘뿐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적 성향도 길러준다. 또한 에리카의 사디즘적 성향은 피아노 선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 학생들을 괴롭히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교습이 끝나면 포르노 영화관 부근에 숨어 그곳을 배회하는 남학생들을 지켜보다가 자기에게 피아노 배우는 학생이 걸려들면 그 학생의 서투른 피아노 솜씨를 심하게 비난하며 그를 인격적으로 모욕한다. 게다가 남성에 대한 시각 또한 뒤틀려 있다. 남성이 주도하는 관례적인 성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클레머는 복수심이 발동해, 어느 날 에리카를 찾아가 편지에 적힌 대로 그녀를 폭행하고 성적으로 학대한다. 그 일로 에리카는 깊은 심리적 상처를 입고 다음 날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칼을 지니고 찾아가지만, 결국 자기 어깨를 찌르고, 자신이 가야할 길은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피아노 치는 여자3.jpg

“누구도 그녀 어깨에 손을 얹어주지 않고, 누구도 그녀의 짐을 덜어주지 않는다. 그녀는 힘없이 자기 어깨를 내려다본다. 칼이 이제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후벼내야 한단 말인가! 그럴 힘이 남아 있질 않다. 아무것도 향하지 않은 채 시선을 떨구더니 에리카 코후트는 치솟는 분노도 울화도 열정도 없이 자기 어깨에 칼을 꽂는다. 그러자 금방 피가 솟아난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다. 다만 더러움 때문에 곪게 될까봐 걱정일 뿐이다. 세상은 그대로다. 상처도 입지 않았고 숙연해지지도 않는다.”(p.379)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다. 칼을 자신에게 꽂고, 그리고 무덤덤하게 그 자리를 떠난다.


피아노 치는 여자4.jpg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가고 있다. 치즈 그릇의 유리덮개 아래, 에리카와 그의 훌륭한 보호막인 어머니가 함께 갇혀 있는 것이다. 이 그릇은 누군가 밖에서 유리그릇을 들어올려야만 열릴 수 있다.

에리카는 시간과 연령을 초월한 곤충이다. 그녀는 이야깃거리도 없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지도 않는다. 이 곤충은 움찔거리고 기어다니는 능력을 오래전에 상실했다. 에리카는 ‘무한’이라는 빵들로 구워내졌다. 이 무한성을 에리카는 기꺼이 자기가 아끼는 작곡가들과 나누지만, 사랑을 받는 일에서만은 절대로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에리카는 위대한 음악적 창조자의 반열에서 조그만 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투쟁한다. 그건 아주 경쟁이 치열한 자리다. 왜냐하면 빈 전체가 여기에 주말농장 오두막 하나라도 짓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탁월한 음악가라는 자기 자리를 금그어놓고 기초공사 구덩이를 파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작품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이 자리를 정직하게 얻은 것이다. 결국 재창조자인 연주자도 어떤 창조가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연주자는 연주라는 수프를 항상 자신에게서 나온 어떤 것으로 가미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자기 심장의 피를 연주에 떨어뜨려 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주자 역시 잘 연주하려는 겸허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물론 연주자는 작곡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에리카는 말한다. 이 사실이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인정한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종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리카는 모든 다른 연주자들과 같은, 하나의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그건 다른 사람보다 더 연주를 잘하는 것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P22-23>

keyword
이전 02화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