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키 신몬의 <어느 장의사의 일기>

영화 <굿바이> 2008년

by 노용헌

영화 <굿바이>는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었던 작품으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이미 해외 유수 영화제와 평단을 사로잡았다. <와호장룡>, <기생충>과 같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빛낸 역대 웰메이드 영화가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듯 <굿바이> 역시 수많은 관객들이 인생 영화로 꼽은 작품이다. 제32회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그랑프리를 수상하였고, 제29회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도 아시아영화상을, 제32회 일본 아카데미에서는 무려 13관왕을 차지하며 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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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라고 하는 일의 성격상 그 동안 다른 사람이 하던 염습과 입관 작업을 제법 자주 보아왔다. 그러나 막상 내가 직접 하자니까 땀범벅이 된 채 좀처럼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시신의 팔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수의 소매에 잘 끼워지지가 않는다. 시신을 끌어안아 올리듯이 하지 않으면 수의의 끈을 아래로 돌려 묶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내가 쩔쩔 매는 광경을 20여명의 유족과 친척들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지켜보았다.

애당초 품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시신에 대한 혐오감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초조함과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도 모른 채 간신히 작업을 끝냈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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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습이라는 것은 병으로 인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자리보전만 하던 상태에서 사망한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하다못해 몸이라도 청결하게 해주자는 뜻에서 깨끗한 물로 온몸을 닦는 풍습이다. 오늘날에는 병원에서 타계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 알코올로 닦아주는 방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자택에서 숨을 거둘 경우, 예로부터의 풍습 그대로 여전히 따뜻한 물로 죽은 이의 몸을 깨끗이 해주곤 한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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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슬픔과 놀람의 아름다운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본 무언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미덥지 못하다.

남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원망하고, 모든 것이 남들 탓이라고 여기던 인간이, 자신을 통째로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사상이 완전히 변한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사회 통념을 운운하면서, 자신도 그 사회통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회 통념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서둘러 의료기구 판매점으로 달려가 외과 의사들이 사용하는 수술용 의복과 마스크, 얇은 고무장갑 등을 사왔다.

옷차림을 똑바로 하고, 예의와 예절에도 신경을 쓰고,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고 진지한 태도로 염습과 입관을 하도록 애썼다. 이제 철저히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인 ‘납관부(納棺夫)’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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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직업을 비하하고, 자신이 관여한다는 사실 자체에 열등감을 품고, 오로지 돈에만 얽매이는 자세에서는 언감생심, 직업의 사회적 지위 따위를 어떻게 바랄 것인가? 그러면서 사회가 차가운 눈길을 던지는 것을 몽땅 사회의 잘못으로 치고, 사회를 원망하기만 한다.

자신이 관여하는 일의 본질에서 눈을 돌린다면, 설사 그 일을 잘 해내더라도 남들로부터 신뢰받는 직업이 될 리가 없다.

싫은 일이지만 돈이 되니까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이상, 그것이 어떤 일이든 세상의 경멸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P38)


'진눈깨비'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sleet라는 단어가 사전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얼어붙은 비(凍雨)’라는 뜻이다. 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눈도 아닌 진눈깨비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닌 것이다. 요컨대 영어권에서는 진눈깨비처럼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애매한 사상(事象)은 용어로서 정착되어 있지 않은 것이리라.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현상을 언어로 나타내는 일이 영어권 사람들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닌 모양이다.

그것은 생사를 드러낼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사상으로는 생이 아니면 사이지 ‘생사’라는 관념은 없다.

그 점 동양사상, 특히 불교는 생사를 일체로 여겨왔다. 생과 사의 관계를 진눈깨비 가운데의 비와 눈의 관계처럼 바라보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진눈깨비’인 셈이다. 그것을 비와 눈으로 구분하면 이미 진눈깨비가 아니라는 관념이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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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순간을 필름의 한 토막처럼 정지시켜 본다면, 눈이기도 했다가 비이기도 했다가 물이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시간 속에 넣으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상태가 된다.

이런 변화를 무상(無常)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해 가는 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특히 일본 민족은 사계(四季)의 변화와 인간의 생사를 쉬 바뀌는 것, 덧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아름답게 표현해 왔다.

그러나 ‘생’에만 가치를 두는 오늘의 우리는, 자신만은 바뀌지 않는다는 아집으로 인해 이 ‘무상(無常)’이라는 단어조차 사어(死語)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P51-52)


인간은 누구나 죽을 때에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이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 죽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인지, 사후의 육체가 아름다운 것인지, 멋지게 죽는 것인지, 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죽는 방식인지 사후의 시신 상태인지 그 구별조차 애매한 것이다. 하물며 시신의 처리 방법까지 죽음의 이미지와 이어지면 점점 더 헷갈리게 된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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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사상에는 중유(中有)라는 것이 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6도(道) --천인(天人), 인간, 수라(修羅), 축생, 아귀(餓鬼), 지옥-- 가운데에서 태어났다가는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을 마친 뒤 다음의 생을 받기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하여 그 기간을 49일로 친다. 이 49일을 7일마다 구분하여 각각의 7일째에 다음에 태어날 곳이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49일이 되도록 정해지지 않는 경우에는 죽은 이의 혼이 허공을 떠도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역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다.

기특한 친척이 7일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와 공양을 올린다고 한들 과연 성불했는지 어쩐지 짐작할 길이 없다.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이 6도의 윤회의 행선지가 명확하다면, 우리 친척들은 축생이나 아귀나 지옥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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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의사의 일기>를 다 쓴 뒤 원고뭉치를 앞에 두고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한 이런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으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일이었다.” (P173)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말기 암입니다”는 진단을 받고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 역시 선종(禪宗)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라는 경지는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죽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내가 소년 시절 배운 ‘무엇 무엇을 위해 아름답게 죽는다’고 하는 사상은,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죽을 각오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죽음’에 관해 제아무리 생자(生者)가 머리를 굴려보았자 닮았으되 닮지 않은 죽음의 이미지를 낳을 뿐인 것이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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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영화 <금지된 장난>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 소녀 역시 전쟁의 희생자였다. 부모가 소녀의 눈앞에서 기총소사로 살해당했다. 어른들이 시신을 묻는 광경을 보았던 소녀, 그녀가 자신의 몸을 의탁한 집의 소년을 꾀어서 작은 동물들의 주검을 묻은 뒤 십자가를 세워주는 장난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영화를 보았을 때에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어찌 할 바를 몰랐었다. 몇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소녀의 슬픔과, 울려 퍼지던 기타의 명곡이 내 가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소년 시절의 원(原)체험은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내가 입관 일을 택한 것도, 그리고 숙부의 나무람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리라. 동생의 주검을 화장터에 내려놓고 직립부동으로 선채 입술을 앙다물고 올려다본 하늘이, 묘하게도 환하게 해맑았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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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어리석고 슬프다.

오늘도 슬픈 사건이 있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 씨가 자살한 뉴스가 신문에 나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웅크린 빈사상태의 소녀, 소녀를 등 뒤에서 노리는 독수리를 찍은 케빈 카터 씨의 사진은 인간이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은 거의가 시선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셔터를 누르기 전에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옳았다고 사진작가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한 장의 사진이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비난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이 작품에는 근원적인 힘이 있었다. 괴테가 말했듯이 인간은 근원 현상이 벌거벗은 채 적나라하게 출현하면, 일종의 공포를 느끼고 불안에 휩싸여 눈길을 돌리는 모양이다.

그리고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비난의 대상을 찾아 철저하게 공격한다. 사진작가를 자살로 몰아넣는 식인 것이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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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위 가운데 종교를 내세우고 전쟁을 벌이는 것만큼 어리석고 서글픈 짓은 없다. 진리는 하나일 터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야말로 진실이다. 진여(眞如)다, 라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허위다, 허망이다, 하고 우긴다. 이처럼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해석에 얽매여 논쟁을 벌인다. 어째서 수행자(沙門)들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진실은 오직 하나여서 두 번째 진실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진여를 아는 자는 다투지 않는다.

-원시 불전에서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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