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리브 키터리지> 2014년
<올리브 키터리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2008년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를 원작으로 한 미국의 미니시리즈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인공 올리브 키트리지로, 리차드 젠킨스가 올리브의 사랑하는 남편 헨리 키티리지로, 빌 머레이가 올리브의 친구 잭 케네슨으로, 조 카잔이 헨리네 약국 직원 데니스 티보도로 나온다.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차마다 동일 인물들의 4가지 다른 시점을 다루고 있다.
2014년 11월 2일, 미국 프리미엄 TV HBO에서 시즌1 첫 두 에피소드를 연속으로 방영하였고, 다음 날 저녁에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가 연속으로 방송되었다.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는 열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칠십대 중반의 할머니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약국]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알이 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만(灣)이, 그다음엔 키가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코끝을 간질이던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 그리고 겨울이면 찬 공기에서 묻어나는 냄새를 그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래서 그는 언제나 창문을 조금 열고 운전을 하곤 했다. (P9)
“잘 지낸대?” 올리브가 개수대에 물을 흘려보내며 묻는다. 그는 창밖으로 만을, 곶을 따라 늘어선 앙상한 가문비나무들을 건너다본다. 그 광경이 아름답다. 해안선의 고요한 위엄과, 잔물결이 이는 바닷물에서 하느님의 위대함을 본다.
“잘 지낸대.” 그가 대답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는 곧 올리브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다정히 잡을 것이다. 올리브 역시 그녀만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짐 오케이시의 차가 도로를 벗어난 후에,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 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이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그는 카드를 창턱에 놓는다. ‘친애하는 헨리’라고 쓰는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후로 다른 헨리를 알게 되었을까? 알 도리가 없었다. 토니 쿠니오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성당에서는 아직도 헨리 시보도를 위해 촛불을 켜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불현 듯 데이지 포스터가 춤추러 가는 이야기를 할 때 내비치던 미소가 생각난다. 방금 데니즈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대해 느낀 안도감이 갑자기, 묘하게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변한다. “올리브.” 그가 불러본다.
그녀는 수돗물 소리 때문에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게 틀림없다. 그녀는 전처럼 키가 크지도, 어깨가 넓지도 않다. 물소리가 그친다. “올리브,” 그가 부르고, 그녀가 돌아본다. “당신,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니까.” 그녀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는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아니지, 그런 생각은 감히 품을 수도 없어 그는 곧 아니라며 이 생각을 떨쳐버릴 것이다. 누가 스스로를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는 좀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데이지한테 남자가 있대.” 그가 입을 열었다. “곧 두 사람을 초대해야겠어.” (P54-55)
[밀물]
만(灣)에서는 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파도가 밀려들어 조그만 돌멩이들이 바닷물에 쓸려가며 달그락 거렸다. 정박해 있는 요트들의 돛대를 때리는 케이블 소리도 띠잉띵 울려왔다. 소년이 고등어를 손질하며 대가리와 꼬리, 반짝이는 내장을 발라내 선창에서 집어던지면 갈매기 몇 마리가 그것들을 잡아채려고 내려오면서 끼룩끼룩 울어댔다. 케빈은 차 안에 앉아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는 마리나에서 멀지 않은 풀밭에 대놓았다. 좀더 먼 선창 곁 자갈길 진입로에는 트럭 두 대가 주차돼 있었다. (P57)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 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 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오, 미친, 이 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P86)
[피아노 연주자]
그녀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색색의 전구들이 몹시도 밝았다. 잠시 그녀는 사람들이 나무에 이런 짓을 한다는 게, 나무를 그렇게 번쩍거리도록 장식한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사람들은 이런 장식을 일 년 내내 기다린다. 그리고 몇 주만 지나면 나무는 장식이 모두 벗겨진 채 버려져 은색 술을 매달고 길가에 굴러다닐 거라 생각하자 다시 얼굴이 훅, 붉어졌다. 눈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쓰러진 채, 잘려진 줄기가 어색한 각도로 공중을 찌른 모양새일 나무가 얼마나 안쓰러울지 상상할 수 있었다. (P98)
앤지는 이제 머리를 복도 벽에 기대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검정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뭔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그리고 그것이, 너무 늦었을 때에야 뭔가를 깨닫는 것이 인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 그녀는 교회에 가서 피아노를 칠 것이다. 어머니 팔뚝의 멍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부드럽고 헐거운 피부를, 손가락으로 꼭 눌러도 무슨 느낌이 있을 거라 상상하기 힘든, 살갗이 뼈에서 너무도 축 늘어지던 가느다란 팔뚝을. (P108-109)
[작은 기쁨]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P124)
올리브는 커다란 팔 아래 핸드백을 끼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핸드백을 꼭 눌렀다. 수잔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잠시나마 의구심을 가지게 될 걸 생각하니,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녀는 물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내 신발 정말 못 봤어?” 세탁실과 속옷 서랍을 뒤지는 동안 불안감이 속에서 활개를 칠 것이다.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나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게다가, 내 스웨터는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그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스웨터에 매직을 긋고 브래지어를 훔치고 신발 한 짝을 가져가겠는가?
스웨터는 망가지고, 신발은 브래지어와 같이 던킨 도너츠 화장실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져 쓰고 버린 화장지와 오래된 생리대 더미에 덮여 있다가 다음 날 대형 쓰레기통 안으로 구겨져 들어갈 것이다. 사실 탁터 수가 올리브 가까이에서 살 거라면, 수잔이 스스로에 대해 계속 의구심을 갖도록 올리브가 이것 조금, 저것 조금을 가져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올리브가 스스로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살 필요는 없다. 뭐든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니까.
“가.” 올리브가 마침내 입을 열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핸드백을 챙기면서 거실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준비한다. 머릿속으로 꽃무늬 드레스 밑에서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을, 그 커다란 붉은 근육을 그리면서. (P132-133)
[굶주림]
어떤 나이가 되면 어떤 것들을 예측하게 된다. 하먼도 그걸 알았다. 심장발작, 암, 대수롭지 않은 기침이 심한 폐렴이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 등을. 어쩌면 중년의 위기를 겪을지 모른다고도 예측하게 되지만 하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땅 위로 솟아오른 투명한 플라스틱 캡슐에 넣어져 발사되어 날아간 다음, 캡슐이 호되게 흔들려 지나온 인생의 일상적인 기쁨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이것만은 결코 원치 않았다. 그리고 데이지의 집에서 니나가 울고 데이지가 전화를 걸어 니나의 부모가 딸을 데려가도록 했던 그날 아침 이후로, 보니만 보면 냉담해졌다. (P176)
시내에 나가면 온통 커플들뿐인 듯했다. 사람들은 다정하고 친밀하게 서로 팔짱을 끼고 다녔다. 하먼은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그것은 삶의 빛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이론이야 이십 년, 심지어 삼십 년도 더 살 수 있었지만 그렇진 않을 터이다. 그리고 완전히 건강하지 않다면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을 까닭이 무엇이랴. 웨인 루트를 보라. 하먼보다 겨우 두어 살 많을 뿐인데, 그는 아내가 텔레비전에 오늘이 며칠이라고 써 붙여야 날짜를 알았다. 클리프 모트는 동맥이 전부 막혀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해리 쿰스는 목이 뻣뻣할 뿐이었는데 작년 말에 임파종으로 죽었다. (P178-179)
[다른 길]
6월 어느 날, 키터리지 부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헨리는 예순여덟, 올리브는 예순아홉이었고, 두 사람은 딱히 젊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늙었다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자,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 마을 크로스비 주민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그 사건으로 키터리지 부부는 변했다고. 헨리는 요즘 우체국에서 마주치면 인사로 우편물만 잠시 들여 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면 방충망을 쳐놓은 현관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는 외동아들이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갑자기 이사 갔을 때조차 — 사람들은 이 일이 키터리지 부부를 크게 낙심시켰다고 생각했다 — 언제나 순진한 표정의 쾌활한 남자였기에, 이는 더욱 슬픈 일이었다. 올리브는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상냥하거나 심지어 공손하다고 말하기 어려웠지만 그해 6월 이후로 그녀의 이런 면은 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올해는 6월이 쌀쌀하지 않고 갑자기 여름이 찾아와, 자작나무 잎 사이로 햇살이 아롱대며 들어오자 크로스비 주민들은 전 같지 않게 이따금 말이 많아지기도 했다. (P189-190)
크리스토퍼가 갓 결혼한 고집 센 아내 때문에 별안간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아들이 가까이에 살면서 가정을 꾸리길 기대했던(올리브는 미래의 손자들에게 튤립 구근을 심는 법을 가르치는 상상을 했었다) 키터리지 부부에게 실로 엄청난, 꿈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이었지만, 빌과 버니의 경우 손자들이 바로 옆집에 살기는 했지만 그 아이들이 아주 못됐다는 것이 키터리지 부부에게는 입 밖에 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뉴턴 부부는 그날 밤 손자가 바로 전주에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 무서운 일이었다. 누가 이런 일을 예측이나 했겠는가? 이야기를 전하는 버니의 눈이 젖어들었다. 올리브와 헨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들의 “감정 표현을 장려”한다는 미명하에 에디가 이런 태도를 가르친 거나 다름없다고 말할 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P194-195)
인생은 어떤 길을 따라, 그 길을 타고 가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크리스토퍼의 집이 지어지기 전부터 수십 년 동안 쿡스 코너에서부터 테일러네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던 것처럼, 그 뒤부터는 그 자리에 아들 집이 있었고, 크리스토퍼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아들은 이제 거기 없었다. 다른 길. 이제는 그 다른 길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정신은, 혹은 마음은,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요즘 좀 느려서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그녀는 점점 더 빨리 도는 공 위에 올라가려는 뚱뚱한 들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공을 네 발로 긁을 뿐 그 위에 올라가지는 못했다.
“올리브, 우리는 그날 밤 겁을 먹었어.” 그는 그녀의 무릎을 살며시 꼭 쥐었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려 있었어.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한번도 겪지 않을 상황이었다고. 우리가 어떤 말들을 한 건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거야.” 하지만 그는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바다를 내려다보았고, 올리브는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밤을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 앤드리아 비버가 위기로 생각한 — 화장실 인질 사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은 그 말들 때문에 그 밤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는 그 일 이후 내면의 비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늘 눈물을 흘렸기에, 마치 소년과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여드름쟁이 붉은 머리 소년과 그 겁에 질린 얼굴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소년원 정원에서 오후 작업에 열심일 소년을 그려보았다. 간수의 허락을 받은 올리브는 오늘 소 프로에서 산 원단을 가지고 소년에게 원예용 작업복을 만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꾸 마음이 쓰였다. 미드코스트 파워에 다니는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주었을 캐런 뉴턴처럼. 연모의 정으로 가련히 시들어가는 캐런처럼.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낳은 캐런처럼. (P222-223)
[겨울 음악회]
“교회에 들어가는 데 표가 필요하다니 우습네.”
최근에 내린 폭설로 맥클린 음악당의 지붕이 무너져내린 후라, 음악회를 성 캐서린 교회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밥 훌턴은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했다. 푹신한 벨벳 좌석에 자신과 아내 제인이 앉아 있는데 지붕이 꺼지고, 두 사람이 질식하여 인생을 그렇게 같이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요즈음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오늘 저녁에는 집을 나서는 데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인은 크리스마스 전구의 불빛을 바라보는 걸 저렇게 좋아하지 않는가.
아내는 지금 행복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제인 훌턴은 근사한 검정 코트 속에서 몸을 조금 움직이며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선물임을 아는 거라고. 게다가 사람들이 연중 이맘때를 이렇게 열심히 기념하는 것은 또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사람들의 삶이 어떻든(그들이 지금 지나치는 이 집들 가운데에는 근심스러운 고민도 있으리란 걸 제인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삶이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할 일임을 알기에 그들은 이맘때를 축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은 깜빡이를 켜고 대로로 나섰다. 두 사람은 요즈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마치 결혼생활이라는 복잡하고 기나긴 식사가 끝나고 이제야 근사한 디저트가 나온 것만 같았다. (P227-228)
그들은 더 이상 젊지 않았고, 그게 중요했다. 두 사람은 서로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실은 둘 다 작년에 가벼운 심장발작을 겪었다. 제인이 먼저였다. 제인은 저녁에 구운 양파를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햇다. 그리고 몇 달 후 밥의 차례가 왔다. 밥의 경우는 구운 양파를 많이 먹은 듯한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고, 누가 그의 가슴팍에 주저앉은 듯 했는데, 턱은 제인의 경우와 똑같이 아팠다.
지금은 둘 다 괜찮았다. 하지만 제인은 나이가 일흔둘, 밥은 일흔다섯이었고, 어디선가 둘의 머리 위로 지붕이 꺼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한 사람만 남아 홀로 살게 될 터였다. (P228-229)
[튤립]
그녀는 거대한 배에 한 손을 대고 부엌 식탁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앉았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살면서 그 생각을 처음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전 같았으면 적어도 유서는 남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같아선 유서를 남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크리스토퍼, 내가 어쨌기에 네가 날 이렇게 대한단 말이니.”
올리브는 조심스럽게 부엌을 둘러보았다. 자기 집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여자들, 미망인들이 요양원으로 끌려가고 나면 금세 죽는 경우를 보았다. 하지만 올리브는 여기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랐다. 헨리가 집으로 돌아올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기다렸다. 크리스토퍼가 동부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자동차 열쇠를 찾으며 일어서다가 — 거기 더 있을 수가 없었다 —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훨씬 더 젊을 때 그녀는 가정생활을 지겨워하며, 고개를 움추린 크리스토퍼에게 소리 지르곤 했다. “이런 빌어먹을 노예 노릇은 지긋지긋해!” 어쩌면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올리브는 개를 부른 다음, 집을 나섰다. (P271)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골기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도일 라킨은 그런 축구 경기에 없었다. 그 아이는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도일이 축구를 했는지조차 올리브는 알지 못했다.
루이즈가 한 번이라도 “오늘 오후에 도일의 축구 경기를 보러 포틀랜드에 가야겠어” 하고 말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루이즈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자랑했다. 루이즈가 도일이 여름 캠프에서 집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걸 올리브는 다시금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 또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헨리에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죽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올리브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켰다. 튤립을 심을 것인지를 곧 결정해야 할 것이다.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P292-293)
[여행 바구니]
“나는 바로 화장.” 몰리가 개털 더미 속에서 안전띠를 찾아내기를 기다리면서 올리브가 말했다. “번거로운 요식 절차 없이 말이야. 왜 ‘프릴 없이’라는 말도 있잖아. 집에서 화장터까지 바로 간다구. 벨파스트에서 집까지 와서 시신을 가져간대.”
“무슨 말 하는 거야?” 몰리가 올리브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올리브는 몰리의 오래된 틀니에서 나는 입냄새를 느꼈다.
“광고도 안 하더라구.” 올리브가 말했다. “역시 프릴이 없는 거지. 헨리한테도 말했어. 우리가 죽어서 입을 수의엔 프릴이 없다고.”
올리브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길을 따라 끝까지 내려간 곳에 있는 보니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올리브는 몰리와 함께 먼저 가서 샌드위치를 차리는 걸 돕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 묘지를 피할 수 있었다. 올리브는 하관이라든지 등등의 절차들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P298-299)
“다들 장례식이 훌륭하다고 그러네요.” 말린이 딸아이의 긴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며 말한다. “오늘 아주 훌륭히 해냈어.”
여자아이가 어머니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했어.” 케리가 잔에 남은 위스키를 아이스티처럼 가볍게 마셔버린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올리브는 기분이 묘하다. 질투심? 아니,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느낌,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통통하고 천성이 친절한 여인이 아이들과 사혼, 친구들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런 여인은 올리브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다. 올리브는 이 감정이 가져오는 낙심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늘 왜 여기에 왔던가? 헨리가 에드 보니의 장례식에 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녀가 누군가의 깊은 슬픔을 보며 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기를 바라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가득한 오래된 집은 그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 위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P310)
올리브의 머리 위로 발소리가 들린다. 덩치 큰 남자들의 부츠 소리가 쿵쿵 울린다. 길게 끄는 맷 그리어슨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밤에는 파도가 진짜 높게 일 거야.”
“그럴 거야.”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 도니 매든이다.
“말린이 올 겨울에는 이 구석에서 좀 쓸쓸하겠군.” 잠시 후, 맷 그리어슨이 말한다.
웃기시네, 올리브는 그 아래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달아나, 말린.
“그럭저럭 살아내겠지.” 도니가 결국 대답한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몇 분 후 그들의 부츠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곧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 올리브는 생각한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 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도 하니까. 불과 일 년 전 새 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를.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 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 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 앤 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 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그리고 헨리는 곧 눈이 멀었다. 이제 그는 다시는 올리브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요즘은 뭐 볼 것도 없어.” 헨리를 찾아가 곁에 앉았을 때 올리브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밤마다 먹던 크래커하고 치즈를 안 먹으니 살이 좀 빠졌어. 그래도 내 몰골은 엉망이겠지만.” 헨리는 이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다고 할 터이다. 헨리는 이렇게 말하겠지. “오, 그렇지 않아, 올리. 내겐 당신이 예쁘기만 한걸.” 그러나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올리브는 매일 차를 몰고 가서 그의 곁을 지킨다. 당신은 성녀야, 몰리 콜린스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멍청한 여자 같으니. 그녀는 삶이 두려운 늙은 여자일 뿐이다. 요즘 올리브가 아는 거라곤 해가 떨어지면 잘 시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 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P312-313)
올리브는 자신과 헨리가 앞으로 갖게 될 손자들에 대해, 착한 며느리와의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을 말린에게 들려주고 싶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두 사람이 크리스토퍼의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면 긴장감이 너무 팽배해서 한 손이 저절로 올라가며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낼 정도였다는 걸. 그래도 두 사람은 집에 돌아오면 며느리가 착하다고, 크리스토퍼에게 착한 아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만 싶다.
그런 여행바구니가 없는 이가 누구랴. 이건 옳지 않다. 몰리 콜린스가 오늘 교회 옆에 서서 그 말을 했다. 옳지 않아. 그래, 맞는 말이다. 옳지 않다.
올리브는 말린의 머리에 한 손을 살며시 갖다 대고 싶지만 그런 것은 올리브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서서, 말린이 앉은 의자 옆에 서서 옆 창문으로 이제 물살이 거의 빠져나가 넓어진 해안선을 바라본다. 저 아래에서 물수제비 뜨기에 여념이 없던 에디 주니어를 생각한다. 그 느낌을 올리브는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돌멩이를 집어서 힘을 조절하여 바다에 던질 여력이 있는 젊음을. 아직 그 짓을 할 만한, 망할 돌멩이를 던질 힘이 있는 젊음을. (P325-326)
[병 속의 배]
위니의 엄마는 줄 리가 태어나기 전에 지방 미인대회에서 수상했고, 위니의 눈에는 지금도 여전히 예뻤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보다 사탕을 더 많이 받거나 숙제에 별도장을 더 받는 기분이었다. 누구보다도 예쁜 엄마가 있다는 것은 그런 기분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뚱뚱하거나 머리 스타일이 엉망이거나 고무줄 청바지 위에 남편의 모직 남방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다녔다. 하지만 위나의 엄마 애니타는 립스틱에 하이힐, 인조 진주 귀걸이를 하지 않고는 집을 나서는 법이 없었다. 위니는 최근에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아니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눈을 부라리며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위니는 제발 그런 게 아니길 바랐고 그런게 아닐 수도 있었지만, 위니로서는 알 수 없었다. (P328)
“나는 키터리지 선생님이 어느 날 했던 그 말이 늘 기억에 남아 있어.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마라. 배고픔을 두려워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얼간이가 될 뿐이다.” (P352)
[불안]
작은 비행기는 하늘 높이 올라갔고, 올리브는 비행기 아래로 밝고 연한 초록 들판이 아침 햇살 아래 펼쳐지는 걸 보았다. 더 멀리로는 해안선이 보였다. 반짝이는 바다는 거의 잔잔했으며, 바닷가재잡이 배 몇 척 뒤로 조그만 흰 파도가 일었다. 그러자 올리브는 예상치 못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삶에 대한 탐욕이 솟구쳤다. 올리브는 앞으로 몸을 숙여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정하고 연한 구름, 새파란 하늘, 풋풋한 연둣빛 들판, 광활한 바다. 높은 곳이 경이롭고 경탄스러울 뿐이었다.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다. 이것이 희망이었다. 저 아래 배들이 반짝이는 물을 가르듯이, 그녀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곳을 향해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듯이, 삶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면의 일렁임이었다. 올리브는 아들의 인생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P363-364)
때때로, 지금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앤을 바라보며 생각하건대, 그런 안정감을 갖는데 아버지가 각기 다른 세 아이가 필요했다면 사랑으로는 불충분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크리스토퍼, 아들은 왜 그토록 무모하게 이런 일을 감행했는가, 그리고 나중에라도 왜 네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거의 어두워진 가운데 올리브는 앤이 몸을 앞으로 숙여 담배를 아기 욕조에 살짝 담가 끄는 걸 보았다. 치익, 작은 소리가 났고, 앤은 담배를 닭장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렸다. (P378-379)
아들이 고개를 돌려 올리브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퍼의 맑은 얼굴은 올리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올리브는 지쳐 있었다. 언젠가는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그냥 노닥거리고 다닐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걸 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인생의 일곱 단계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가 그렇게 말했던가? 하, 노년에만도 일곱 단계가 있다구!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당신은 자다가 조용히 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죽지 않아서 몹시 기뻤다. 여기 가족이 있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빈 부스석이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올리브는 감사한 마음으로 붉은 쿠션이 깔린 좌석에 얼른 앉았다. (P403-404)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머니?” 앤이 물었다. “며칠 더 머무실 계획이었잖아요.”
내가 옷에 아이스트림을 질질 흘리고 앉아 있도록 너희가 그냥 내버려뒀지 않느냐고 아들 내외에게 말한다면 얼마나 망신이랴. 자기 애들한테도 그러지는 않았을 터였다. 묻은 얼룩을 닦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올리브 옷자락에 버터스카치 소스가 범벅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처음 물어왔을 때부터 크리스토퍼한테 사흘만 있겠다고 했다. 사흘이 지나면 난 생선처럼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앤과 크리스토퍼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계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크리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랬지. 너희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넌 그 말조차 정직하게 하지 않았어.” 두 사람의 공모하는 듯한 모습에 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크리스가 앤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것하며, 둘이 나누던 그 눈빛 때문에. “내 정말, 거짓말쟁이는 질색이야. 아무도 네게 거짓말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키터리지.” 앤의 골반에 걸쳐진 아기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엄마한테 와달라고 했죠.”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를 보고 싶어서요. 앤이 엄마를 만나고 싶어해서요. 우린 그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좀 달라졌기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엄마, 전 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거예요. 뭔가 속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면 말씀을 하셔야죠. 그래야 대화를 하죠.”
“젠장, 넌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어. 왜 이제야 갑자기 말을 시작하는 건데?” 갑자기 깨달았다. 이게 다 정신과 의사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멍청한 아서라는 작자. 올리브는 조심해야 했다. 이 모든 게 치료 모임에서 다 재연될 테니. 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 그것은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에, 그들은 벌써 올리브에 대해 샅샅이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우라질 소리야?”
앤은 여전히 아기를 안은 채 스펀지로 우유를 훔쳐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그녀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엄마는 행동이 거의 편집증적이에요.” 그가 말했다. “엄만 언제나 그랬어요. 적어도 많이 그랬어요. 그리고 전 엄마가 그에 대해서 책임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일 분은 이랬다가, 일 분 후에는 또 마구 화를 내고, 아주 피곤해요. 주변 사람들을 너무 지치게 해요.” (P410-411)
[범죄자]
“고인의 영혼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목사가 말하자 레베카는 소름이 돋았다. 죽은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점쟁이가 생각나더니, 아버지가 제 눈 바로 뒤에서 레베카의 상상 속의 광경을, 당신의 친구에게 하는 짓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르고, 지금 이 순간 레베카의 생각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엿 먹어. 레베카는 엄마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에게도 말했다. 눈을 뜨고 교회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마른 장작처럼 활기가 없어 보였다. 레베카는 숲에서 종이를 조금 쌓아놓고 불을 붙이는 상상을 했다. 레베카는 언제나 조그만 불꽃이 홱 일어나는 게 좋았다. (P429-430)
[강]
시사잡지를 읽고 있었는데, 그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한 페이지는 대통령의 얼굴이 꼴보기 싫어 얼른 넘겨버렸다. 미간이 좁은 눈하며, 튀어나온 턱, 얼굴만 봐도 울화가 치밀었다. 이 나라에서는 일어나는 온갖 일을 보며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엉망이었던 적은 없었다. 정신지체 같은 인간 바로 여기 있네. 올리브는 무디네 가게에서 어떤 여자가 했다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대통령의 멍청한 작은 눈에서 정신지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그를 뽑았지 않은가! 코카인 중독에서 헤어난 예수쟁이를! 그러니 국민들은 지옥에 가도 마땅했고, 지옥에 갈 터였다. 걱정되는 것은 아들 크리스토퍼뿐이었다. 그리고 어린 손자. 손자가 살아갈 세상이 남아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P457-458)
매일 아침 강변에서 오락가락하는데, 다시 봄이 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봄이, 조그만 새순을 싹틔우면서.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봄이 오면 기쁘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언젠가는 면역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사실이 그랬다. 떠오르는 태양에 강물이 너무 반짝여서 올리브는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P461)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그녀 곁에 앉은 이 남자가 예전 같으면 올리브가 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도 필시 그녀를 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P483-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