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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6. 202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영화 <로리타>  1997년

스탠리 큐브릭감독의 <로리타>(1962)     


영화의 원작 소설 <로리타>의 탄생 배경 역시 독특하다. 러시아 출신으로 1899년 태어나 볼셰비키 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탈출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미국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과 파리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4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소설가이자 교수였다. 1947년, 그는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이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당시 그는 하버드, 스탠퍼드, 코넬 대학 등에서 문학 강의를 하던 중이라 작품의 완성은 조금씩 늦춰졌고, 1954년에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소설이 바로 훗날 어마어마한 사회적·문학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로리타>다.    

 

단순히 소설로 보더라도 <롤리타>는 몹시 모호한 상황과 감정을 다루었으므로 설령 진부한 표현 방식으로 얼버무려 평범하게 바꿔놓는다해도 여전히 독자가 분통을 터트릴 만큼 모호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작품을 통틀어 외설적인 단어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통속소설에 수두룩이 등장하는 상소리 따위에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관습에 길들어 뻔뻔해진 속물이라면 이 책에서 그런 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랄지도 모른다.                   (P11, 머릿말)    

   

본 해설자가 이미 저서와 강연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던 점을 여기 되풀이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요컨대 ‘불쾌하다’라는 말은 ‘독특하다’라는 말의 동의어인 경우가 종종 있으며, 위대한 예술작품은 모두 독창적이고, 바로 그러한 본질 때문에 크든 작든 충격적인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다고 ‘H.H.’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가 잔혹하고 비열한 인물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도덕적 문둥병자의 전형으로서 그가 겸비한 잔인성과 익살스러움은 극도로 비참한 내면세계를 드러낼 뿐 결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을 만큼 변덕스럽다. 이 나라 사람들이나 풍경에 대해 무심코 내뱉는 말 중에는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다. 그의 고백은 시종일관 무모할 정도로 솔직하지만 그렇다고 악마처럼 교활하게 저지른 온갖 죄악이 사면되지는 않는다. 그는 정상이 아니다. 점잖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마치 마법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듯이 롤리타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 우리는 저자를 혐오하면서도 정신없이 책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P12, 머릿말)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P17)     


시각적 기억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을 뜬 채 마음속 실험실에서 어떤 이미지를 능숙하게 재창조하는 기억이고(이때 나는 ‘꿀빛 피부’ ‘날씬한 팔’ ‘갈색 단발머리’ ‘긴 속눈썹’ ‘크고 선명한 입술’ 따위의 일반적인 용어로 애너벨의 모습을 떠올린다), 또 하나는 눈을 감았을 때 눈꺼풀 안쪽의 어둠 속에 즉각 나타나는 영상인데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마치 자연스러운 빛깔의 작은 유령처럼, 마치 복제화처럼 철저히 시각적이며 객관적인 형태로 재현된다(내가 떠올리는 롤리타의 모습이 그렇다).                   (P21-22)  

   

이제 다음고 같은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들 중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 또는 몇 배쯤 많은 나그네 앞에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자기에게 매료된 나그네에게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라 님프의 모습(즉 마성)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선택받은 소녀들을 ‘님펫’이라 부르고 싶다.           (P28-29)     

그녀를 알아보는 찰나에 섬광처럼 떠올랐던 그 영상, 그 전율, 그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그 강렬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시선이 눈부신 햇빛 아래 무릎을 꿇은 (근엄해 보이는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깜빡거리는, 내 모든 아픔을 깨끗이 씻어줄 작은 의사 선생님 같은) 소녀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동안, 내가 (영화 주인공처럼 크고 건장하고 잘생긴)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그녀의 앞을 지나가는 동안, 내 영혼의 진공은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빨아들여 내 죽은 신부의 모습과 하나하나 비교해보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잠시 후 이 새로운 소녀, 이 롤리타, 나의 롤리타는 그녀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내가 그녀를 발견한 것은 결국 소통스러운 내 과거의 ‘바닷가 공국’이 낳은 운명적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은 암중모색과 시행착오, 그리고 보잘것없는 가짜 행복에 불과했다. 이제 수많은 공통점이 두 사건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환상도 품지 않았다. 판사들은 이 모든 이야기도 풋과일을 좋아하는 악취미를 가진 한낱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여기리라. 어쨌든 상관없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헤이즈 부인과 내가 이 숨막히는 정원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내 무릎은 잔물결에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후들거리고 내 입술은 모래밭처럼 타들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

여자가 말했다. “저 애가 우리 로예요. 이건 제가 키운 백합이고요.”

나는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예뻐요, 예뻐, 정말 예뻐요.”                (P66)     


하지만 그녀 역시 여성 취향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연약한 소녀는 결코 아니다. 이 님펫의 이중성이 —아마도 모든 님펫의 공통적인 특징이겠지만— 나를 미치게 한다. 나의 롤리타는 꿈 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지녔다. 광고나 잡지 사진에 등장하는 들창코 아이처럼 앙증맞기도 하고, 구대륙의 (짓밟힌 데이지꽃과 땀냄새를 풍기는) 어린 하녀처럼 어렴풋한 관능미도 있다. 시골 갈봇집에서 어린애로 변장한 젊디 젊은 매춘부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그 짙은 사향 냄새와 진흙탕 속에서, 그 더러움과 죽음 속에서 문득 티없이 맑고 깨끗하며 다정한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니,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 롤리타가, 나의 롤리타가 해묵은 내 욕망을 되살려냈고, 그리하여 롤리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P73-74)    

 

남녀 배심원 여러분, 어린 소녀와 더불어 굳이 성교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착지근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짜릿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성범죄자 대다수는 사실 그리 사악하지도 않고 소극적이며 소심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가벼운 —뜨겁고 축축한, 이른바 일탈 행동이라지만 사실상 무해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과 사회가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색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능한 군인들과 달리 강간을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행하지만 온순하고 신사적이며 강아지처럼 착한 눈매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력을 지녔지만 님펫을 한 번 만져볼 수 있다면 인생에서 몇 년이나 몇십 년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는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시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P143)     


그러나 여기서 롤리타의 주제넘은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독자 제현을 따분하게 하지 않으련다. 다만 현대의 남녀공학 교육과 청소년 사이의 관행, 모닥불 주변에서 벌어지는 난장판 등이 그녀를 철두철미하게 타락시켰으며,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이 아름다운 소녀에게 수줍음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는 사실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 성행위를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들만의 세계에서 은밀히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출산을 목적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어린 로는 마치 내 삶이 나와는 무관하고 무감각한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듯이 자못 활기차고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다루었다. 대담한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 깊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정작 아이의 삶과 나의 삶 사이에 이런저런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녀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기묘한 시련을 겪는 동안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면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자제할 수 있는 동안은 그랬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른바 ‘섹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게 동물적인 행위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더욱더 원대한 계획이다. 나는 님펫들의 위험천만한 마력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P213)   

  

구세계에서는 지금까지 무수한 연인들이 잘 다듬은 산중턱 잔디밭에서, 혹은 푹신푹신한 이끼 위에서, 혹은 편리하고 위생적인 실개천 옆에서, 혹은 머리글자를 새긴 참나무 아래 소박한 벤치에서, 혹은 수많은 너도밤나무숲 속에 지은 수많은 오두막에서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자연 속에서 연인들이 인류의 가장 오랜 범죄이자 오락에 심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자의 엉덩이는 독풀에 쓸려 화끈거리고 남자의 엉덩이는 이름 모를 벌레에 쏘이기 일쑤다. 남자의 무릎은 숲 바닥에 깔린 뾰족뾰족한 것들이 쿡쿡 찌르고 여자의 무릎은 벌레가 콕콕 찌르기 일쑤다. 그리고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어쩌면 뱀일 수도 있고 —어쩌면 멸종 직전의 용일수도 있고!— 게다가 무시무시한 꽃들이 남긴 마치 게처럼 생긴 씨앗들이 가터로 고정한 검은 색 양말이든 헐렁헐렁한 흰색 양말이든 가리지 않고 잔뜩 달라붙어 온통 푸릇푸릇하고 꼴사나운 양말로 만들어놓기 일쑤다.       (P268)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동부로 돌아와서 그녀를 비어즐리의 사립학교에 입학시킨 일은 크나큰 실수였다. 차라리 어떻게든 멕시코 국경을 넘어가서 아열대성 낙원에 2년쯤 숨어 살다가 나의 크리오요 소녀와 결혼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곱하건대 나는 생식샘과 신경절의 상태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을 오가는 광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1950년쯤 되면 롤리타가 지닌 님펫의 마력도 사라져버리고 다루기 힘든 사춘기 소녀만 남을 테니까 어떻게든 떼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혹시 운이 좋으면 그녀가 내 피를 이어받은 아름다운 님펫을 낳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롤리타 2세는 1960년경에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이 될 텐데, 그때쯤에도 나는 여전히 한창 나이이리라. 제정신인지 남의 정신인지 몰라도 내 마음속의 성능 좋은 망원경은 까마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파릇파릇한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아니, 퍼렇게 곰팡이가 핀 것일까?— 괴상하면서도 자상한 험버트 박사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황홀할 만큼 사랑스러운 롤리타 3세에게 할아버지 노릇을 하는 장면이었다.              (P277-278)  

   

나로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이제 롤리타의 행실이 확실히 나빠졌다는 사실을 기록해야겠다. 그녀는 늘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별다른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 문제가 표면화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약했고, 현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여학생 님펫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인간적인 요소는 줄어들었지만 열정과 애정과 고뇌는 점점 늘어만 갔고, 그녀는 바로 그 점을 이용했다.               (P292) 

    

우리는 이 괴상한 여행을 계속했다. 쓸쓸하고 쓸모없는 내리막길을 지난 후 위로 위로 올라갔다. 가파른 비탈길에서 아까 우리를 추월했던 대형 트럭을 뒤따르게 되었다. 지금은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중이라 추월하기가 불가능했다. 트럭 앞부분에서 조그맣고 반질반질한 은빛 직사각형 물체가 —껌포장지 속의 은박지였다— 날아들어 우리 차 유리창을 때렸다. 내가 정말 미쳐가는 중이라면 결국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아니 어쩌면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고, 초연한 험버트가 허둥대는 험버트에게 말했다. 상자 속의 권총을 주머니에 넣어두면 광기가 발작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P366)     


어째서 나는 국외로 나가면 우리도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을까? 환경 변화란 파경을 앞둔 연인들과 죽음을 앞둔 폐병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전통적 오류에 불과한 것을.         (P382)   

  

만약 롤리타를 잃은 충격 때문에 나의 소아성애증이 말끔히 치유되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일 테고, 그 말을 믿는 독자는 바보일 것이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천성 같은 성향은 결코 달라질 수 없다. 놀이터나 해변에서 나의 우울하고 교활한 시선은 여전히 내 의지를 거역하고 혹시 님펫의 팔다리가 —롤리타의 시녀나 장미소녀만이 지닌 은밀한 특징이— 눈에 띄지나 않을까 남몰래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소망이 시들어버렸다. 언젠가 어느 외딴 곳에서 실물이든 가상이든 어떤 소녀와 더불어 행복을 누릴 가능성 따위는 이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머나먼 가공의 섬, 후미진 해변에서 롤리타의 자매들에게 송곳니를 들이 대는 장면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은 (적어도 당분간은) 끝났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2년 동안 어마어마한 쾌락을 마음껏 누린 덕분에 욕망이 습관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늘 욕구불만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는데, 이러다가 학교와 저녁 식사 사이에 어느 뒷골목에서 우연히 유혹과 마주치게 되면 갑자기 거침없는 광기를 부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외로움은 나를 점점 부식시켰다. 친구와 관심이 절실했다. 내 심장은 걸핏하면 흥분해서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기관이었다. 그리하여 리타가 등장하게 되었다.                 (P412)     

사실 내가 미성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어리고 순결하고 요정 같은 금단의 소녀가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 —즉 위대하지만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장밋빛과 잿빛의 미래— 사이의 격차를 이렇게 무한한 완벽성으로 메워가는 상황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P423-424)   

  

독자들에게 문학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각각의 유형에 따라 매우 일관성 있는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흔히 친구들에게도 그런 일관성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리어왕]을 아무리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선량한 왕이 세 딸과 그들의 애견을 다시 만났을 때 그동안의 불행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신이 나서 흥청망청 떠들며 맥주잔으로 식탁을 탕탕 두드리는 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플로베르의 아버지가 때맞춰 연민이ㅡ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에마가 그 소금기 덕분에 되살아나 생기를 되찾는 일도 없다. 이런저런 유명한 등장인물이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 사이에서 어떻게 변모하든 간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도 우리가 정해놓은 이런저런 논리적, 상투적 유형에 맞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늘 별 볼 일 없는 교향곡만 작곡하던 X가 느닷없이 불멸의 명곡을 내놓는 일은 없어야 한다. Y는 절대로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Z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정해두고 어떤 사람이 그대로 고분고분 행동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만족감을 느끼는데,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만족감도 커진다. 반면에 우리가 판단한 운명에서 벗어나버린 경우는 파격을 넘어 파렴치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가령 핫도그 노점상을 하다가 은퇴한 이웃집 남자가 최근에 당대 최고의 시집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차라리 그 사람을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P425-426)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났고, 다시 낡아빠진 파란색 세단의 운전대를 잡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내가 그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속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고뇌와 싸울 때 리타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만 잤다. 그렇게 자면서 빙그레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땀방울이 맺힌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그녀를 영원히 떠났다. 다정한 작별인사를 담은 쪽지는 그녀의 배꼽 위에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한 그러면 그녀가 못 볼지도 모르니까.           (P428-429)    

 

어떤 분들은 내가 그녀를 죽일 거라고 짐작했겠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영원히 사랑하리라.       (P433)   

  

우리는 소파에 함께 앉았다. 희한한 일이다. 사실 미모는 빛이 좀 바랬지만 그녀가 황갈색머리를 늘어뜨린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이제야 확연히 깨달았다. 옛날부터 늘 그랬는데 왜 이토록 뒤늦게 알아차렸을까 다소곳한 콧날도 똑같고 아련한 아름다움도 똑같다.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풀고 손수건을 매만져 결국 사용하지도 못한 무기를 도로 싸놓았다.            (P434) 

    

방수, 어째서 아워글래스 호수에서의 한 장면이 내 의식 속에 퍼뜩 떠올랐을까?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도 없고 놀라움도 없다. 조용히 융합의 과정이 진행되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내가 적절한 순간에 무르익은 과일처럼 똑 떨어지도록 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품고 이 회고록 곳곳에 나뭇가지처럼 펼쳐놓았던 무늬 속에 척척 들어맞는다. 그리하여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는 황금빛 평화속으로 녹아들었다. 논리적 깨달음에서 오는 이 거대한 황금빛 평화, 지금쯤은 나에게 가장 적대적인 독자들도 맛보고 있을 만족감, 바로 그것이 분명하고 도착적인 나의 의도였다.         (P436-437)   

  

그래요, 세상만사가 참 우스꽝스러워요. 만약에 누가 내 인생으로 소설을 써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P438)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만큼이나 분명하게 깨달았다. 일찍이 내가 지상에서 보았거나 상상했던 그 무엇보다 그녀를 더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장차 어디로 가더라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지난날 내가 환희의 외마디 소리를 토해가며 덮쳐누르던 그 님펫에 비하면 지금의 그녀는 희미한 제비꽃의 잔향, 낙엽의 메아리에 불과했으니, 갈색으로 물든 낙엽이 시냇물을 막아버리고 메마른 잡초 속에서 마지막 귀뚜라미 한 마리가 노래할 때 저멀리 창백한 하늘 아래 한줌 숲이 보이는 황갈색 협곡 언저리에 맴도는 메아리..... 그러나 내가 다행히 숭배하는 것은 그 메아리만이 아니었다. 넝쿨처럼 뒤엉킨 내 마음속에 제멋대로 자라나던 크고 찬란한 죄는 어느새 줄어들어 고갱이만 남았다. 나는 이 삭막하고 이기적인 악덕을 버리고 저주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야유를 던지면서 당장 퇴정하겠다고 위협하겠지만, 내 입에 재갈이 물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기 전까지는 나의 가련한 진실을 목청껏 외치며 온 세상에 널리 전하리라 —나의 롤리타를, 이 롤리타를, 비록 핼쑥하고 더럽히고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잉태했으나 여전히 눈동자는 잿빛이고 여전히 속눈썹은 거무스름하고 여전히 적갈색과 황갈색으로 빛나는 그녀를, 여전히 카르멘시타이며 여전히 나의 연인인 그녀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인생을 바꿔보자, 나의 카르멘, 우리가 영영 헤어지지 않을 곳으로 가자. 오하이오? 아니면 메사추세츠의 황무지? 어디든 상관없다. 그녀의 눈이 동태눈처럼 흐릿해져도, 좆꼭지가 부풀고 갈라져도, 어리고 귀엽고 예민하고 비단결 같은 삼각주가 출산으로 찢어지고 더러워져도 —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창백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기만 하면, 너의 어리고 떠들썩한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나는 미칠 듯이 샘솟는 애정을 가누지 못할 것이다, 나의 롤리타.              (P447)     

카르멘시타, 그녀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신중하게 말을 골랐지만 한심스럽게 더듬거렸다. “너 정말, 정말 — 그래, 물론 내일도 아니고 모레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언젠가는, 언제든 좋으니까, 나와 함께 살지 않겠니? 그렇게 작디작은 희망이라도 남겨준다면 나는 새로운 신을 창조하고 그 신에게 목이 터져라 감사하며 살아갈텐데.” (대충 그렇게 말했다.)

“아뇨.”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싫어요.”

“그랬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험버트가 말했다.           (P450-451)    

 

그리하여 나는 저물어가는 저녁의 가랑비를 뚫고 달려가고 있었는데, 앞 유리 와이퍼가 전속력으로 움직였지만 쏟아지는 내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P451)   

  

56일 전부터 시작해 처음에는 보호관찰을 위한 정신병동에서, 얼마 후부터는 비록 무덤같지만 난방은 잘되는 이 독방에서 [롤리타]를 썼다. 원래는 이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재판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내 목숨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집필중에 나는 아직 살아 있는 롤리타를 차마 뭇사람 앞에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공개 법정이라면 이 회고록의 일부를 제출할 수도 있겠지만 출판은 늦추기로 했다.

나는 사형에 반대한다. 속셈이 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런 이유때문이 아니다. 판결을 내릴 판사의 의견도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내가 만약 나 자신을 심판한다면 험버트에게 강간죄로 최소 35년형을 선고하고 기타 죄목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형을 면하더라도 나보다는 돌리 스킬러가 훨씬 더 오래 살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한 유언장의 법적 구속력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나는 이 회고록이 롤리타가 살아 있는 동안은 출판되지 않기를 바란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쯤에는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내 손의 맥박이 아직 뛰는 동안은 너도 나처럼 축복받은 생명체일 테니까, 나는 지금도 여기서 알래스카에 있는 너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네 남편 딕에게 충실해라. 다른 남자가 네 몸을 만지지못하게 해라.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마라. 네 아기를 사랑해주기 바란다. 기왕이면 아들이기를 바란다. 네 남편이 너에게 잘해주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유령이 되어 검은 연기처럼, 혹은 미친 거인처럼 그 녀석을 찾아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테니까. 그리고 C.Q.를 동정하지 마라. 나는 그놈과 H.H.중에서 한 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H.H.가 그놈보다 두어 달이라도 오래 살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네가 길이길이 살아남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P496-497)     

문학 교사들이 흔히 떠올리는 질문이 있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요컨대 ‘이 친구가 하려는 말이 도대체 뭐냐?’ 그런데 나는 일단 책을 쓰기 시작하면 오로지 이 책을 끝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집필 동기와 발전 과정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영감과 연상의 상호작용’처럼 케케묵은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솔직히 이런 답변은 마술사가 어떤 마술을 설명하려고 다른 마술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P500, 작가의 말) 

    

모름지기 자유국가에 사는 작가라면 감각적 요소와 관능적 요소를 엄밀히 구분하는 일 따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505, 작가의 말)    

 

점잖은 분들은 <롤리타>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므로 무의미하다고 단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존 레이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런 책은 흔치 않다.             (P506,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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