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작가이니까, 작품 값이 비싼 작가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하니까 열광하는 것이다.
애초에 누구에게도 감동이나 영감을 주지 못하는 이상한 작품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허나 거기에 대가의 이름표를 붙여놓으면, 무언가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형성된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것들은 부풀려지고 확신이 자리 잡는 위대한 마법이 발생한다.
미술의 감동이라는 것이 원래 90% 이상은 작가의 이름값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통은 유명하고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서 감동을 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명분을 찾는다. “난 안 그런데? 나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내 감성에 솔직한데.” 하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10% 훨씬 이하다.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하는 블록버스터 전시들은 거의 100% 작가의 이름값으로 마케팅을 한다. 더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유명 작가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렇게 사람이 몰리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허접한 작품들만 그러모아 전시를 한다고 해도, 작가의 이름값이 있다면 흥행은 충분히 보장된다.
이것은 미술뿐만이 아니다. 영화나 음악, 문학 등 다른 모든 예술분야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미술이 압도적으로 심하다. 이름값에만 기댔다가는 다른 분야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아무리 봉준호나 박찬욱의 영화라고 해도 정말로 재미가 없고 형편없이 만들어진 영화라면, 처음에 어느 정도 흥행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곧 외면당할 것이다.
하지만 유독 미술은 이름값에 의지해 견고히 위상을 지탱해 나간다. 그것은 미술의 특성이다. 유명하고 위대한 미술가가 되는 것은 이 세상 어떤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렵지만, 되고 난 후에 유지하는 것은 어떤 직업보다도 쉽다.
작품의 아우라와 감동은 90% 이상 계급장에 의존한다
‘이것이 그렇게도 유명한 누구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의 ‘인식’과 이것은 너무나 대단한 것이라는 ‘믿음’. 그것들이 미술품의 가치를 공중부양 시킨다. 정치인과 예술가는 인지도가 최고의 무기이다.
비슷한 실험으로 어떤 오지로 들어가서, 그 미술을 접해보지 못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본다고 치자. 대가의 위대한 작품을 허름한 곳에 걸어놓고 무명작가의 작품이라고 하고, 무명작가의 작품 한 점을 가장 럭셔리하고 권위가 있는 전시장에 걸어놓고 대가의 작품이라고 찬양하는 실험을 해보면, 사람들은 거의 100% 몰래카메라의 의도대로 넘어간다. 생각해 보니 오지까지 안 들어가도 된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해도 결과는 똑같다. 그런 식의 몰래카메라 예능 방송은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레플리카를 걸고 진품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 마이 갓!” 하며 머리를 움켜쥐고 감동을 하고, 진품을 걸고 레플리카라고 하면 시큰둥하게 슥 보고 넘어가는 장면과도 비슷하다. 뱅크시가 했던 길거리에서 작품 팔기 퍼포먼스도 똑같은 이야기이다. 미술은 결국 계급장의 권위와 플라시보 효과에 의존하는 것이다.
디티 부하트 라는 미술 사업자는 바스키아에 대해 작품의 예술성보다 작가 생애의 서사적 스토리에 힘입어 성공한 바가 크다고 했다. 스타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두고 천재성, 독창성 하는 것은 유명세에 의한 지나친 찬양이라고 말했다. 맞는 이야기이다.
바스키아
그런데 안 그런 작가가 어디 있는가? 피카소와 잭슨 폴록은 안 그런가? 그들도 똑같다. 앤디 워홀은? 빈센트 반 고흐는 다른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피카소
잭슨 폴록
앤디 워홀
빈센트 반 고흐
피카소는 큐비즘을 처음 만들어냈고, 잭슨 폴록은 드리핑 기법을 처음 시도했다고? 앤디 워홀은 처음으로 저가 미술을 대량 양산했다고? 고흐는 그림에 처음으로 감정을 집어넣었다고? 과연 진짜로 그럴까? 그렇게 누군가가 해석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에게 그냥 주입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스키아 또한 흑인 예술가로서 그런 식의 그림을 그린 처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술의 천재성, 독창성을 어떻게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말인가? 달리기 기록을 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몇몇의 사람들이 정하는 것인데 말이다.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다. 있는 것도 어떻게든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없는 것도 어떻게 해서든지 억지로 끌고 와서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예술성, 작품성 아닌가?
작품 가격의 정당성과 인지도 깡패
어떤 작품은 그냥 딱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전 생 노가다에 재료비도 많이 들어가고 내가 보기엔 작품이 매우 좋은데, 아주 저렴한 가격에도 팔리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작품은 대충 휘갈겼을 뿐인데 매우 비싸다. 작품을 사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줄 서서 사람들이 대기한다.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풍경은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유독 미술계에서는 굉장히 심하다.
실체가 없는 작품성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제시되겠지만, 파고 들어가면 명확하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기준 같은 것은 없다. 벗기고 벗기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하나이다. 작가의 인지도와 유명세. 결국 그것들이 작품의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작품성은 온갖 권위를 빌려와 펌프질을 하고 암기과목인 양 주입을 하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작품성이라는 것은 결국 주관적인 것이다.
배우들의 출연료와 비슷하다. 출연 시간이나 연기력 수준이 출연료 책정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몸을 던져가며 혼을 불사른 열연을 펼친 무명배우의 개런티보다, 잠깐 슥 지나간 한 유명 배우의 개런티가 1000배가 넘어도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정치인과 예술가는 결국 인지도가 치트키이다. 먹고살기 바쁜 대다수의 소시민들은 각각의 정치인들을 면면히 살피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냥 누가 어떻다고 하면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의견을 하나 복사하기 쉽다. 내가 깊이 알아봐야 내 의견이 영향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러니 아주 피상적인 이미지에 현혹되기 십상이고, “투표는 국민의 권리”라는데 가장 쉬운 방법으로 주로 아는 사람 유명한 사람에게 호감을 덧칠해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미술은 몰라도 피카소는 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피카소는 유명한 예술가이고, 그의 작품이 왜 좋은 것인지는 몰라도, 무식하다는 소리 듣기 싫고 불평분자로 인식될까 두려워 우리는 그저 대충 적당히 이해하는 척하면서 넘어간다. 피카소 찬양론자 들의 논리는 거의 ‘복사하기’, ‘붙여넣기’처럼 정해져 있는데, (미술은 암기과목이지 않나!) 그것이 정말 그들의 생각인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범접 불가한 권위에 짓눌린 자기 속임인지, 선민의식인지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보면 그 경계가 붙어 있어 정확하게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