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론이 맞는가? 관념론이 맞는가?”와도 비슷한 논제일 수도 있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도 비교할 수가 있다.
한쪽이 완전히 맞고 한쪽은 완전히 틀리다고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5:5의 힘은 아니다. 나는 9:1이나 그보다 더 큰 차이로 생각한다. 후자의 힘이 훨씬 더 막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작품이 좋다는 것의 기준은 너무나 다양하고 주관적이다. 그리고 좋은 작품들은 너무나 많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수많은 재능 훌륭한 참가자들이 본선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탈락해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출중한 재능과 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값어치가 매겨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너무나 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본기와 작품성은 기본이지만, 다들 알다시피 미술은 그 기본기의 개념이 무너져버리고 기준이 없어져버린 지 한참 되었다. 기술적인 기준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고리타분한 기준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어쨌든 좋은 작품의 기준은 결국은 매우 주관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이며, 개개인의 호불호는 결과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준과 결과는 그냥 “닥쳐 인마.”(아주 정중하고 매너 있는 목소리로) 하고 통보될 뿐이다.
그리고 ‘가격’이라는 것은 굉장히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엄청남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비싸기 때문에 아름답다.”라고 했다. 이것은 과시재인 명품들과 그 명품들 중에서도 끝판왕인 미술에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작품의 위대함인가 가격의 위대함인가?
전혀 다른 성격의 모든 영역을 견주어 비교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번역어는 ‘가격’이다.
가장 성능이 좋고 빠른 자동차와 가장 예술성이 높은 작품, 그리고 가장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명배우, 가장 기록이 좋은 위대한 야구선수를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본질적으로 비교가 불가하고 완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가격’이라는 세계 만국 공용어를 통해서 간단하게 우열이 가늠될 수가 있다.
우열 비교의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다. 가치를 결론 낸 ‘가격’이 중요할 뿐이다.
앤디 워홀의 천억 짜리 작품 앞에서, 피카소의 이천억 짜리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느끼고 싶어 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의 무식함과 안목 없음을 탄식하고 자책한다. 이것이 바로 엄청난 자본이 갖는 위력이다. 없는 잘못을 알아서 찾아서 시인하게 만드는 힘.
앤디 워홀
피카소
그 앞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대단한 감동과 영감 같은 것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얻은 사람은, 진짜 감동을 얻은 것일 수도 있고 감동에 대한 열망과 간절함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가 감동을 느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상상임신을 하면 진짜 입덧까지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이 어디쯤 에인가 위치할 것이다.
가격이 작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서, 3백만 원이었던 작품이 3억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되면 분명히 작품에 대한 대우와 취급이 달라진다. 작품의 권위는 가격에 비례하고, 그 작품이 왜 3억인지에 대한 명분과 필연적 이유들이 헌사된다. 이 작품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력해지고 가격에 맞는 아우라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비싸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라는 말은 별로 하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고 작품성이 깊고 대단한지에 대해서 찬양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 작품이 3백만 원일 때는 왜 지금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처럼 대우하지 않았었나? 3백만 원일 때 하고 3억이 된 지금하고 작품이 변했는가? 작품을 개조한 것도 아니고 추가된 게 있는가? 없던 분위기가 갑자기 생겨났는가?
생겨난 거 맞다. 3억이라는, 가장 막강한 권위인 '가격'이 주는 가장 강력한 아우라.
이것이 작품이 좋아서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올라가서 작품이 좋아지는 이유이다.
가격이 작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근거
결과를 보고 이유를 찾는 것은 쉽다.
‘좋은 작품=가격이 비싼 작품’이라는 전제 하에, 작품이 좋아서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올라서 작품이 좋아 보이는 것이라는 것의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이 좋아서 가격이 오르는 것이라면 각 작품들의 미래를 예측하고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좋다는 것의 기준이 주관적이고 애매하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소수라도 전문가들이 예상한 것이든지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 것들이 나중에 결국 가격이 올라야 하고, 100%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50% 이상의 승률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50%는커녕 그보다 한참 밑이다. 어느 누구도 작품의 미래를 맞추기는 힘들다. 예측하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적중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찰스 사치나 베르나르 아르노 또는 프랑수아 피노 등의 억만장자 슈퍼 리치 컬렉터들이나 세계적인 메이저 갤러리 들처럼 돈으로 미술시장을 장악하고 쥐락펴락하며 본인들 스스로가 가격을 움직일 수 있는 거물급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답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며 결과를 보고 난 후에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답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은 가격이 나오기 전에는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가격이 나오고 가격이 오른 작품이 결정된 후에 위대한 작품의 이유와 서사가 부여되는 것이다.
일단 가격의 권위가 크게 한번 망치를 때리고 나면, 직관적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가장 막강한 이유가 형성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마치 돈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성 때문에 위대하다는 달콤하고 반박하기 힘든 이유들이 주르륵 죽죽 헌사가 된다. 성공‘할’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에게 몰리고 갖은 찬사와 아첨꾼들이 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짜 예술
예술을 사랑하는 대통령 부인이 주식시장에서 예술적인 작전을 하듯이, 작품 값을 올리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술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큰 손들의 작업을 보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놀랍고 예술적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짜 예술인 듯 싶다. 찰스 사치나 호세 무그라비, 데이비드 게펜 같은 거물급 재벌 투자자들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작품이 백억, 이백억 심지어 천억이 넘는다면, 그런 것들이 작품의 예술성과 관련이 있을까? 도대체 그 예술성이란 무엇일까?
그 지점서부터는 돈이 돈을 버는 자본의 메커니즘과 그 위대한 ‘돈’님의 무소불위의 권위, 그리고 끝을 모르는 인간들의 욕망, 엄청난 가격과 유명세에 의한 아우라만이 작동할 뿐이다. 그 작품이 그 가격인 이유와 명분은 그럴싸하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어떤 작품이라도 상관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일단 그 위치에 올라가기만 하면, 담론과 명분은 다 만들 수 있다.
사연 하나 없는 작품이 어디 있는가? 그 스토리가 대단하고 작품이 좋아서 그 가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단 작품이 그 가격이 되면 스토리에 정령과 아우라가 실리고, 없는 스토리도 생겨나고, 있던 스토리는 더 완벽하고 그럴듯하게 다듬어지는 것이다. 가격 한 줄 만큼 효과적이고 직관적으로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