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술사 레전드들의 실제 삶은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약간 특이한 부분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들 또한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크게 부각되고 그럴듯한 이야기로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더욱 드라마틱하고 숙연해지게 편집된 것이다.
그래야 장사가 되니까. 그렇게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처음에 조금 있으면, 나중에는 저절로 스스로 팬이 되어서 자신들의 이익과 상관없어도 그 흐름에 동참하고 스토리 메이킹에 참여해서 확대 재생산하는 열성 추종자 군중들이 생겨난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그러지 아니한가? 내 이야기도 한 두 다리만 더 건너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재탄생하는 경우 말이다. 별 거 아닌 일들이 거창한 무용담처럼 부풀려지기도 하고,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인데 내가 한 것처럼 알려지기도 한다. 알고 보면 사기꾼인데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하고(일류 사기꾼은 그렇게 만든다.), 별로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처 죽일 놈으로 소문이 나기도 한다(마녀사냥).
세상 그 어떤 위인들과 종교의 성인군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도 어느 정도는 포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와 업적이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제 삶도 바로 옆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의 삶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 또한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찌질함과 비열함 등을 아주 약간씩이라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예를 들자면, 바른 소리만 하고 맘에 안 드는 신하가 얄미워서 뒤통수를 한 대 빡 때렸을 수도 있는 것이고, 원균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꼼수를 생각해 본다거나 하는 정도 말이다. 그들도 인간적인 비인간적임이 아무리 조금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떠올릴 때는 완전무결한 성인군자의 이미지로 떠올리지 않는가?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쁜 사람으로 규정된 사람은 그냥 전체가 뼛속까지 나쁜 놈으로,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 사람은 흠결 없는 완전한 성인으로 이미지화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순신 장군의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멋있고 숙연해지는 이 일언은 후대에 추가되어 만들어졌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추측한다. 녹음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물론 사실이 아니란 것도 증명할 수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그렇게 전사하지 않았다는 가설과 주장도 있지 않은가?
거북선의 실체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는 상상인가의 여부도, 어렸을 때는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철이 들고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마냥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거북선의 디자인은 내가 보기에 전함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가깝다. 전투에 나가서 파손될 배에 멋진 용머리 조각상을 정성 들여 깎아서 붙일 필요와 여유가 있었을까?
한정된 자원과 에너지를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우선순위에 따라서 과감하게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수많은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전투를 이끌 배를 만드는 데, 멋있는 디자인이 중요했을까? 조금의 수고라도 아껴서 효율성과 내구성과 전투력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지금과 같은 조명과 디지털 시스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철갑 밑의 밀폐된 공간 안으로 들어가서 전함을 조종하는 것은 더 위험하고 득보다 실이 크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정확한 증거를 요구하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자료가 확실치 않고 상상과 조합이 되면서 애매해지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온화한 이미지에 잘 생긴 서양 백인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도, 실제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종교학자와 역사학자들도 있다.
2000년경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서 발견된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최근의 법의학적 지식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하여 역사적 예수에 가까운 얼굴 모습을 합성 발표한 일이 있다. 뭉뚝한 코에 까만 곱슬머리, 짙은 갈색의 피부를 한 전형적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 오강남 『예수는 없다』
성경에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나 가장 미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이사야 53장 2절」
충격과 상처를 받거나 부정하며 나를 비난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진실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실을 아느냐? 나도 모른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각자의 믿음 또는 의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확실한 진실은,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강하게 이미지화된 것들이 실체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가 우리들의 삶을 지배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이 명언이 가장 진실을 함축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