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작품과 일체가 되며 흠뻑 몰입하게 될 때가 있다. 작업을 하며 완전히 빠지고 몰입을 넘어 무아지경의 단계에 이르는 경우인데, 그런 경험은 굉장히 짜릿하고 뿌듯한 기억이다.
무언가에 내 열정을 바치고 순수했던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보람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것에 대한 열망이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죄책감이 있다. <록키>나 <내일의 죠>, <백 엔의 사랑>등 수많은 복싱 소재 영화들은 사람들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심리를 자극한다.
록키
내일의 죠
백 엔의 사랑
그런 감성이 가장 강하고 그것에 이끌리고 그런 것에 인생을 걸려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항상 영화와 현실의 괴리가 있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의지와 예술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고 마는 작업이 아니라, 매일 하는 작업이 할 때마다 그 단계에 가려면 여러 가지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작품의 진행 방식이 온몸의 근육을 골고루 밸런스 있게 쓰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하며 적절한 에너지를 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똑같이 10시간을 작업해도, 나른한 것이 기분 좋게 땀이 흐르는 작업이 있고, 과부하 걸리고 완전히 번 아웃되는 작업이 있다. 후자의 작업이라면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지속적으로 오래 못한다.
둘째, 작가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똑같은 일을 어떤 작가는 15시간 하고도 쌩쌩하고 어떤 작가는 6시간 하고도 녹초가 된다. 이것은 정신력 하고는 거의 상관없는 타고난 체력의 문제이다. 허리디스크 환자가 아무리 일을 더 하려고 해도 몸이 안 따라 줘서 할 수 없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디스크 환자 보러 정신력이 약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셋째, 그 일이 하는 사람에게 재미가 있고 쾌감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도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부분이다. 어떤 영화를 내가 재밌게 보고 싶다고 재미있게 보고 재미없게 보고 싶다고 재미없게 보는 것이 아니지 않나?
미술을 벗어나서 배우나 뮤지션, 댄서들의 일이 아마 그런 것들에 가장 근접하지 않나 싶다.
미술에서는 그렇게 크게 총 3가지의 요소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무아지경) 긴 세월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일을 할 때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해서 찾고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해서 찾는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뽑기처럼 얻어걸리는 것이다. 하다 보니 마침 그런 요소들이 맞아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고 그 일로부터 수입이 얻어지는 작가라면 참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중에 몇 가지가 안 맞거나 다 안 맞아도 그냥 참고, 하는 데까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몸에 탈이 나기도 하고, 망가져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초인 같은 의지력과 정신력을 너무 과시할 것도 없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너무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의지력과 정신력으로 잘 포장이 된 것이고 나약함으로 낙인이 찍힌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