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찔: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어제에 이어 수양에 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수양은 일차적으로 대인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대인관계가 없는 곳에서야 수양도 필요 없지 않을까요?
■ 맹: 흠~ 글쎄요? 사람은 생득적으로 사람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가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내 일찍이 양지(선천적인 앎)와 양능(선천적인 능력)을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양지와 양능도 그 밑바탕엔 사회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 찔: 그렇군요. 대인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잘되면 별 문제가 안 생기지만 그렇지 못하면 꼭 사단이 생깁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 맹: 저의 제자 이루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지요. 어떤 이가 나에게 불손한 언행을 하면 먼저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고, 그렇지 않으면 전과 같이 행동하십시오. 그런데 이후에도 상대가 똑같이 불손한 언행을 한다면 한 번 더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정말 잘못된 점을 고쳐서 그를 상대했는지, 겉과 속이 다르게 상대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이후 진정 변화된 태도로 그를 대했는데도 상대의 불손한 언행이 계속된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 정도라면 금수와 다를 바가 뭐 있겠는가!' 짐승과는 말싸움을 하지 않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언행이 불손한 사람과는 말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자는 종신(평생)의 근심은 있어도 일상의 자잘한 근심은 없습니다. 아니, 하지 않습니다.
■ 찔: 종신의 근심이란 무엇이고, 일상의 자잘한 근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 맹: '순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임금은 어떻게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까지 그 이름을 드날리고 나는 어이하여 한낱 무명의 촌사람에 불과한가!'라고 탄식하는 것이 종신의 근심입니다. 일상의 자잘한 일은 근심할 꺼리가 못됩니다. 인[어짊]과 예에 맞지 않으면 행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행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자잘한 근심에 매몰되는 이유는 대개 이[잇속]를 따지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벗어나 실행과 불실행의 기준을 인과 예에 두면 일상의 자잘한 근심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됩니다.
■ 찔: 종신의 근심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지요?
■ 맹: 순임금처럼 행동하면 되지요. 그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실천하면 순임금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 찔: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좀 현실감이….
■ 맹: 하하하. 또 나의 주장이 이상적이고 단선적이라 말씀하실 요량인가요? 그러나 이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 찔: 그렇긴 합니다만….
■ 맹: 좀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나의 방법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한 그는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종신의 근심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생은 길은 것 같지만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회성입니다. 이런 소중한 삶을 일상의 근심에 매몰되어 살다 마감한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 아닙니까? 그러나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지요. 말을 물 가까지 인도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 찔: 네, 잘 알겠습니다. (약간 당황한 표정) 그런 다음 질문을…. 대인 관계에 있어 수수(주고받음)가 항상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 맹: 이미 앞에서 말한 것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인의 예에 맞으면 받고, 그렇지 않을 경우 거절하면 되지요.
■ 찔: 애매한 경우, 예를 들면,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경우는 어떻게 해아 할는지요?
■ 맹: 안 받는 게 좋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경우란 없습니다. 그건 받은 사람의 자의적 판단일 뿐이지요. 애매한 상황의 경우는 안 받는 게 좋습니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별거 아니라 해도 받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조금은 묻어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 찔: 주는 경우는 어떨는지요?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인 경우 말입니다.
■ 맹: 안 주는 게 좋습니다. 방금 말한 대로 줄 적에는, 자신도 모르게, 받는 이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기대가 있는데 상대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괜스레 상대에게 원망을 품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니 안 주는 게 좋습니다.
■ 찔: 생사(죽고 삶)의 문제는 어떠한지요? 간혹 무의미한 죽음도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 맹: 그런 죽음이 있지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수도 안 죽을 수도 있는 경우, 죽음을 택한다면 이는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 찔: 이번엔 수양과 명예에 관한 것을 여쭤보고자 합니다. 부귀함에 관한 욕망 못지않게 명예에 관한 욕망도 사람이 가지는 큰 욕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은지요?
■ 맹: 부귀함이 충족되면 이후 추구하는 것이 명예이니 명예는 부귀보다 더 큰 욕망임이 확실합니다. 때로는 그 충족을 위해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 찔: 그렇습니다.
■ 맹: 그러나 부귀이든 명예이든 그것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다는 것은 남이 준다는 의미입니다. 남이 준 것은 언제든 남이 되가져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귀와 명예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안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 남이 가져갈 수 없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
■ 찔: 그것은….
■ 맹: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인과 의죠. 내 안의 인과 의를 확충하면 부귀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안 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왔다 하여 기뻐할 필요도, 안 왔다 하여 낙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니까요.
■ 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씀도 아닙니다.
■ 맹: 이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나는 길을 제시할 뿐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명심하십시오. 삶은 일회적인 것이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 찔: 넹, 선생님! (미소)
■ 맹: 넹?
■ 찔: 아, 아 죄송합니다. 말이 헛 나와서. (당황) 선생님, 수양을 하는 데 있어 요체가 되는 게 있다면 뭘까요?
■ 맹: 그건 과욕, 즉 욕심을 적게 갖는 것입니다. 욕심을 적게 가지면 자질이 좀 부족해도 큰 과실이 없게 되고, 욕심을 많이 갖게 되면 좋은 자질도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일찍이 과한 것과 부족한 것은 둘 다 중용에 벗어난다며 경계의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과한 것보다는 부족한 쪽에 더 무게를 두는 편입니다. 물론 중용이 최상이지만요.
■ 찔: 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이만 줄이고 내일 또 수양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제 마음이 많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수양된 마음의 감화력 탓인 것 같습니다.
■ 맹: 그래요? 하하하. 고마운 말이군요. 그럼, 내일 또 보죠.
■ 찔: 네, 선생님. 편히 쉬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