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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오니 좋구나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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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좌), 천은사 승방(중), 천은사 앞 호수 산책길(우)


매천 황현(1856-1910)은 내게 특별한 인물이다. 대학교 졸업 논문과 대학원 석사 논문을 이 이의 작품으로 썼기 때문이다. 다시는 들춰보고 싶지 않은 논문(형편무인지경이라서)이지만, 이 논문을 쓰는 동안 이 이에 대한 몸살[관심과 애정]을 앓았었다. 아이들이 몸살을 앓고 나면 훌쩍 크듯, 나도 이 이에 대한 몸살을 앓고 난 후 조금은 평정심을 갖고 이 이를 대하게 됐다. 그게 어떤 거냐곤 묻지 마시라. 다치신다. 하하.


구례 산수유 축제에 갔다 오면서 황현을 모신 사당 매천사와 인근의 천은사를 들렸다. 매천사는 30년 전 논문을 쓸 때 찾은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때 모습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깜짝 놀랐다. 외려 더 퇴락한 느낌마저 주었다. ‘하긴 사당이 뭐 발전 시설도 아닌데, 변해봐야 뭐가 변하겠나?’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정체된 모습에 순간적으로 놀랐던 것 같다.


놀람도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 모습의 사당이 되려 황현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현은 구한말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다 경술국치를 맞아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음독 자살한 이이다. 이런 이에게 화려하게 정비된 사당이란 그리 어울리지 않고 외려 지금처럼 조금은 퇴락하여 약간의 안타까움마저 일으키는 사당의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아마 화려하게 정비된 사당을 봤다면 처음엔 ‘그래, 이런 정도는 돼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실망했을 것 같다.


오랜만에 황현의「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그 이의 넋이 어린 사당에서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먹물을 조금이라도 마신 이라면 늘 가슴에 새길만한 시이다.


鳥獸哀鳴海岳嚬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고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우리 강산 이젠 망하고 말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날 돌이켜보니

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너무 어렵기만 하구나


천은사도 예전에 매천사를 찾았을 때 찾은 적이 있는데, 다른 절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 유달리 마음을 끌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건물을 보게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인근의 화엄사가 장엄함이 그 특장이라면 천은사는 고즈넉함이 특장인데, 이런 단청하지 않은 건물도 거기에 일조를 하는 것 같다.


천은사 앞에 큰 호수가 마련되어 있고 둘레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한 바퀴 도는데 한 20분 정도 걸린다) 절과 잘 어울렸다. 산책로를 통해 절로 들어갈 수 있는데, 나는 절 구경을 마친 후 별도로 산책로를 걸었다. 절을 두 번 들어간 셈.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달프다. 그래도… 좋았다 ^ ^


산문을 나오며 주방(? - 788)의「제죽림사(題竹林寺)」를 읊어 보았다(시를 외워두면 이럴 때(?) 요긴하다).


歲月人間促 세월은 인간 세상에서 빨리 가는데

煙霞此地多 이곳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殷勤竹林寺 깊은 정 느끼게 하는 죽림사

能得幾回過 다시 몇 번이나 찾아올 수 있을까?


죽림사를 천은사로 바꾸면 절을 찾은 지금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시이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천은사, 이젠 언제나 다시 한번 찾아올까?


봄철,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서 선뜻 나서기가 좀 망설여진다. 구례 나들이도 사실 용기를 내서 다녀온 것이다. 용기는, 내는 만큼 보답을 받는다. 느슨한 활줄을 시위에 맨듯한 느낌이 들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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