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국 Apr 22. 2024

인생의 기본값

인생은 슬프고, 목적 없는 나그네 길이다.

오늘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이다. 주말에 열심히 걷고 쉬어서 에너지를 충전한다고는 했는데 오늘 결론 없는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저녁도 못 먹고 집에 돌아오니 기력이 달린다. 아내가 챙겨준 누룽지를 먹고, 집에 오는 길에 떨이로 팔아서 사 온 딸기를 먹었다. 뭘 좀 먹으니 식욕이 돋고, 기력이 좀 생겨서 집에 있는 빵도 먹고, 어제 사 왔으나 남겨진 호떡을 먹었다. 영혼이 털린 때에는 먹는 것만큼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것도 없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되면 몸도 마음도 힘이 빠지고 꽤나 힘들어했을 텐데,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못 되게 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여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나와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도 예의를 갖추며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는 인생의 기본값(디폴트값_PC나 노트북에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는 값)이 무엇인지 알게 된 때부터인 것 같다. 


인생의 기본값은 우선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슬픔이다. 많은 이들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나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살아보니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우리는 원치 않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고,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는 동안 가급적 행복하게 사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겠지만, 지금 사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하여 자신만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즐겁지 않게 지내고 있고, 즐겁지 않은 상태가 기본값임을 인지하게 되면 오히려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소소한 즐거움이 당연히 내 삶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그런 슬픔을 모르고 지내야 한다. 어릴 때 맘껏 뛰놀고 웃고 즐겁게 지내야 힘들고 슬픈 어른의 시절을 견딜 수 있다. 힘들고 슬픈 어른의 시절도 서로 위로하고 지지하면 또 그리 슬프지 않게 지낼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함께 사는 것이 좋은데, 세상은 갈수록 더 각자 혼자 살고 있다. 혼자는 외롭고 같이는 괴롭다. 삶의 무게 그러니까 슬픔의 디폴트값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인 듯하다. 그럼에도 따로 또 같이 사는 지혜를 배워가야 한다. 


인생의 또 다른 기본값은 '목적 없음'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질문을 받는다. 나 또한 인생의 목적 혹은 목표에 대해 (그런 것이 없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혹은 없으면 인생을 굉장히 잘못 사는 것처럼)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삶의 목적 내지 목표에 대해 거창한 무언가가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행복이나 평화 같은 마음 상태를 얘기하기도 한다. 요즘엔 조물주 위에 있는 건물주가 최대 목표인 이들도 왕왕 있고, 그저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는 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으로 내던져진 존재이므로 목적이나 목표가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집에 같이 사는 반려묘에게 묘생의 목표가 없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도 그저 살 때까지 살다가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특별히 근사한 목표나 목적이 굳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서울대 입학 혹은 법조인이 목표인 사람이 서울대에 입학하고, 법조인이 됐다면 또한 어떤가? 대통령이 되지 못해도, 서울대에 입학하고 법조인이 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여도, 혹은 목표를 이루어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건물주가 되지 못해도, 행복하게 살지 못해도, 그럴싸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여도 우리는 주어진 삶을 최대한 살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덜 불행하게, 덜 우울하게 살면 더 좋을 것이다.


인생의 세 번째 기본값은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사실이다. 삼성가에 태어난 이재용(반말 죄송^^;)도, 억수로 돈이 많은 만수르도, 최고의 권좌에 있는 대통령도 그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 빈 몸으로 세상에 왔듯이, 갈 때에도 빈 몸으로 간다. 10원짜리 하나도 저승길에 가져갈 수 없다. 아무리 큰 대저택이나 궁궐도 자신이 죽으면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 욕심부리며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기 자식을 위해서도 가급적이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 


오늘도 걸어서 퇴근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잡념도 사라지고, 묵은 감정도 어느새 가벼워진다. 이런 글의 재료들도 보통은 걸으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들이다. 인생의 기본값은 슬픔이고, 목적 없음이요, 나그네길인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이걸 출발점으로 해서 그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 애초에 나는 슬펐고, 목적이 없었으며,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므로, 조금씩 노력한다면 더 안 좋아질 가능성보다는 나아질 가능성이 많다. 행여 안 좋아지더라도 기본값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재미없고 심심한 삶에서 뜻밖의 행운(Serendipity)을 만나시길 기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