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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카드를 반납하며

<5강 글쓰기 숙제> 장면을 감정으로 나타내기

by 은주

벽걸이 시계가 가리키는 12시 30분, 퇴근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나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런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노트북을 제외한 짐이라곤 볼펜 몇 자루와 다이어리가 전부였다. 한국인 팀원들은 당장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영국인 팀원들은, 내가 사원증을 탁자 위에 두고 쌩하니 나가버리는 모습을 그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입사 동기이자 다른 부서 팀장이 그들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내 발걸음이 닿은 곳은 근처 횟집이었다. 한국 본사 고위 간부들이나 유럽 본부장이 감사 출장을 나올 때면 저녁 식사를 대접하던 곳이다. 한국인 주방장이 직접 사시미를 뜨는 모습을 바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이자카야였다.


오랜 커리어를 공식적으로 매듭짓는 마지막 의식처럼, 나는 그곳에서 가장 비싼 밥을 먹었다. 그리고 법인카드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뒤 입사 동기에게 내밀었다. 그는 한동안 법인카드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회사 생활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피를 나눈 것과 진배없는 동기는 눈빛으로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부장과의 갈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깊어져 있었다. 그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은 호텔의 바가 주를 이루고 명백한 개인 사용처였으며, 그는 직원들의 복리후생비 예산을 없애고 자신의 개인 비용을 처리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심지어 초과된 비용에 대해서는 거짓 보고를 강요했다. 회사의 규정상 재무팀장은 본사의 상무 라인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는 나의 보고를 사전 점검하려 내 옆에 자신의 심복을 심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으려는 심산이었으리라.


나를 제외한 예산 미팅을 열었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직원들은 부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없어진 예산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다. 없어진 예산에는 야근 수당과 식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산이 사라지면 직원들은 야근해도 정당한 수당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동지섣달 칼바람처럼 똑 부러지는 말투로 부당함을 쏘아붙였다. 그는 나의 말에 적당한 반박을 찾지 못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물러서지 않자 그도 자신의 네트워크를 돌려 나를 쫓아낼 궁리를 했다.


그의 뒷배가 나의 정의보다 힘이 셌다. 나는 보따리를 쌌지만, 야근 수당을 지킨 떳떳한 싸움이었고 그 어떤 높은 직책이나 연봉보다 좋은 상사로 기억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숙제 1>

장면을 감정으로 나타내기

그는 피곤했다 : 그는 서류가방을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두더니, 맥 빠진 동작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다리를 책상 위에 걸친 채,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마자, 그대로 눈이 감겼다.

그녀는 설렜다 : 기차가 파리 동역에 가까워지자,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재빠르게 내리려고 5분 전부터 짐을 챙겨,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기대감에 발끝을 톡톡 굴렸다.

그는 지루해했다 : 그는 조용한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위로, 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 번지수를 몇 번이나 확인해도 틀림없는 그녀의 집 주소였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자꾸만 거부됐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낯선 얼굴이었다. 순간 심장이 멈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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