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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27. 2022

모르는 척

영화 <브로커>와 <조커>

 <브로커>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임신 시절 블루베리를 넣어 파란빛을 띠는 빵에 신 맛이 강한 요거트 크림을 듬뿍 바른 케이크를 먹고 싶어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디저트를 먹기 위해 거북이 씨에게 반차까지 쓰게 한 후 롯데월드타워에 갔고, 간 김에 아쿠아리움을 들렀다. 대형 가오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실제 바닷속에서 만난 만타 가오리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숨 죽이고 있는 인간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던 존재였는데, 어항 속 가오리는 물속을 떠다니는 모형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기분은 미소가 예쁜 새하얀 벨루가 돌고래 덕분에 이내 사라졌다. 벨루가는 내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따라다녔고, 심지어 가까이 다가오려다가 수족관 벽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유리벽에 둥그렇게 눌렸던 벨루가의 이마는 그 안에 가득한 지방 때문에 벽에서 떨어지고 난 후에도 한 동안 흔들려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능이 매우 높은 벨루가는 자신이 갇혀있음 명확히 인지하고, 30년이 넘는 평균 수명의 1/3인 10년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모두 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귀여운 벨루가의 몸짓에 즐거워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답게 <브로커>는 부모가 된다는 것,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한 감독의 전작들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가족’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브로커> 속의 가족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소화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묘하게 인위적이고, 동화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스커피를 한 잔 마시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모두 불을 끈 채 한 방에 누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듣는 장면을 떠올리며 곱씹었다. 나에겐 그 씬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탄생을 축복받지 못한 존재가 정말 이렇게나 많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이 영화의 아젠다를 대표하고 있다고 느낄까? 홀로 의구심을 가졌다가 나의 어리석음에 놀라 도로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사실 그런 존재를 이미 많이 만나봤다.


 내가 만난, 중학생 나이가 되어서도 A, B, C를 모르는 학생들은 모두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시골 학교에 제공되는 정부의 넘치는 지원금으로 개설한 ‘기초학력신장 방과 후 수업’에서 가르친 한 학생은 아빠가 술만 마시면 폭력을 일삼아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다. 어떤 학생은 30대 초반의 지나치게 젊은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준 채 혼자 살게 내버려 둬 점심을 먹으러 오후가 되어서야 학교에 왔다. 또 다른 아이는 벌써 다섯 번째 바뀐 ‘엄마’와 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한 번도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문기사에 실릴만한, 실제로 실린 잘못을 일삼았다. 그런 아이들과 피부를 맞댄 적도 있으면서,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척해서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어른이 응당 느껴야 할 책임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모르면, 잊어버리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마치 웃고 있는 벨루가의 얼굴을 믿고 그 가여운 동물의 비극을 ‘모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수족관 속 대형 가오리를 보면서 동물원에서 턱을 괸 채 우리 밖의 인간을 관찰하는 오랑우탄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너무나도 사람 같은 포즈와 표정의 동물은 나를 불편하게 해서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희생당하는 동물, 그리고 그걸 소비하는 나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하지만 벨루가는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웃고 있는 얼굴이라서, 그 동물이 마치 거대 어항 속에서 행복한 듯 보인다. 벨루가는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와 같은 운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슬프고 비참할 때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웃음 발작증을 가진 불쌍한 아서. 그를 “해피(Happy)”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단 한 명의 인물은 그의 어머니 페니다. 웃음의 속뜻은 외면한 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그녀는 망상장애 환자다. 벨루가의 비극을 알면서도 귀여운 외모를 보고 죄책감 없이 웃는, 사회의 잘못과 부조리를 알면서도 애써 모르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은 망상증 환자와 닮은 것이다. <브로커>에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슈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건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더 이상 불편한 기분을 피하지 않고 낱낱이 뜯어보고 고민해 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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