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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07. 2023

빈 공간의 글

 “A four-foot box, a foot for every year.” 

 Seamus Heaney의 시 「Mid-Term Break」의 마지막 구절이다.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축소하여 묘사하는 “Understatement”라는 문학적 장치(figurative language)가 사용되고 있다. 시 속 화자는 오후 2시에 자신을 태우러 온 이웃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다. 무덤덤하게 주변 사람들의 장례식을 다니던 아버지는 울고 있고, 어머니는 눈물 없는 분노의 한숨을 토해내고 있다. 밤 10시가 되자 앰뷸런스가 병원에서 동생의 시체를 태우고 집에 도착한다. 다음날 아침 촛불이 밝혀진 침대에 다가간 화자는 전보다 더욱 창백해진 동생을 6주 만에 마주한다. 4피트는 122cm 정도이다. 일 년에 1피트씩 자란 동생은, 고작 4피트 크기의 관에 누워있다. 4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한 동생의 비극을 시인은 더 ‘작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 계속 멈춰 서게 되는 듯하다. 짧은 시 한 편에 비어있는 공간이 가득하다. 시를 읽다가 잠시 한숨을 내쉬며 빈 곳을 채우고 있는 감정과 의미를 곱씹게 된다.


 나 역시 독자들이 글을 읽다 멈추게 되는 빈 공간을 담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책장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공책 한 권 끼워 넣을 틈 없이 가득 찬 책장은 마치 내 머릿속 같다. 수직으로 서있는 책만큼, 직립한 책 위에 수평으로 누워있는 책이 많아지고 있다. 어떻게든 한 권이라도 더 꽂겠다는 강한 의지다. 책을 읽으면, 책을 소장하면, 그 안의 내용이 마치 나의 내면이 되는 양 착각한 탐욕과 어리석음이 책장에 넘쳐난다.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니, 넘치도록 토해내고, 공격적으로 정보를 쏟아내는 글을 쓰게 되는 모양이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책장 정리기에, 생각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사흘에 걸쳐 300권에 가까운 책을 나눔 하고, 중고서점에 판매했다. 가까스로 빈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홀린 듯 책장의 비어있는 칸을 바라보며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빈 공간을 찾겠다는 의지는 완벽히 잊은 상태였다. 이는 내가 H.I.P인 탓이다. 


 ‘힙하다’의 HIP이 아니다. 언어교육학자 Seliger가 사용한 용어 H.I.Gs (High Input Generators)에서 Generator를 Pursuer로 바꿔 만든 나만의 조어다. Seliger는 적극적으로 인풋을 생성하기 위해 상호작용과 발화수정에 참여하는 HIG로서의 언어학습자가 수준 높은 인풋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따라서 성공적인 언어학습의 경험을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인풋을 추구하는 글쓰기 학습자다. 좋아하는 책, 음악, 영화, 커피와 술을 단순히 취향으로 즐기기보다는 이를 나를 풍요롭게 하고 성장시키는 인풋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경험하고, 기록한다. 인풋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의 취향이자 삶의 태도가 되었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 글을 쓰며 깨달았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좇은 인풋은 성공적인 글쓰기 경험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W.B. Yeats의 시 「Adam’s Curse」에서 화자이자 시인인 ‘I’는 여름의 석양 속에 사랑하는 여인과 앉아 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화자는 ‘한 두 줄을 쓰는데 몇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이 한순간의 영감(moment’s thought)처럼 보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시를 쓰며 느끼는 고뇌를 토로한다.  

 “It’s certain there is no fine thing/ Since Adam’s fall but needs much laboring” 

 그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훌륭한 것에는 노동이 수반된다고 말하며 이에 “저주”라는 제목을 붙였다. 위대한 시인도 고통스러워한 것을 보면 나 따위가 빈 공간을 담은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 건 당연하다. 그래서 당장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최대한 많이 써내리라 다짐한다. HIP로서 인풋을 꾹꾹 눌러 담는 속도보다 빠르게 글을 쓰다 보면 찰나의 순간이라도 공간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시적인 빈틈을 찾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가득 채운 작가로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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