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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차는 초록색 번호판

by 벤자민 Benjamin

초록색 번호판의 낡은 회백색 승용차. 아빠가 늘 타고 다니던 차였다. 아마 원래 새하얀 흰색이었을 거다. 그런데 세월의 흔적에 페인트가 바랬다. 아빠의 오른손은 늘 기어봉을 잡고 있었다. 능숙하게 그 막대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둑둑둑.

아빠와 다닐 때면 어디든 그 차를 타고 다녔다. 나와 동생을 외할머니 댁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합천 할아버지 댁에 온 가족 다 같이 가기도 했다.

할아버지 댁은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아빠는 운전석에, 엄마는 보조석에 앉았다. 나와 동생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우리 형제는 넓은 뒷좌석에 번갈아가며 누웠다. 다리를 끝까지 펴도 차 문에 발이 닿지 않았다. 동생이 졸려하면 내 무릎에 머리를 두게 하고, 조금 있다가 나도 동생의 무릎을 베개 삼는 식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잠들어버리면 나는 앉은 채로 동생의 볼과 머리를 만졌다.


도시에서 시골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모든 간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타이어 신발보다 싸다', 고가도로로 올라가는 교차로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던 문구였다. 노란 바탕에 검은 글자. 엄마에게 내 신발이 얼마인지 물었다. 3만 원이라고 했다. 몇 주 전 엄마는 걸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찍찍이 신발을 시장에서 사주었다. '타이어가 이것보다 싸다고?' 빨래처럼 널려있는 거무튀튀한 고무 덩어리보다 예쁘게 반짝반짝 빛나는 내 신발이 더 비싼 게 당연해 보였다. 괜히 이리저리 발을 굴렀다. 신발이 동의하듯 밝게 반짝였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더 이상 볼거리가 없었다. 그럴 때면 아빠랑 스무고개를 했다. 서로가 생각한 단어를 여러 질문을 통해 맞추는 것이다. 나는 아빠를 이기기 위해 내가 아는 단어 중 가장 어려운 단어를 고르곤 했다. '말미잘', '트리케라톱스', '강강술래' 같은 것들 말이다. 신기하게도 아빠는 다 잘 맞추었다. 내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는 듯했다.

우리는 휴게소에 들렀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엄마 손에는 늘 호두과자가 들려있었다. 엄마가 몇 알 주었지만 나는 수박씨 발라내듯 입안에서 호두 조각만 쏙 빼냈다. 나는 군옥수수 가게로 달려갔다. 가끔은 군옥수수를 팔지 않는 휴게소도 있어서 속상해했다. 그럼 이상한 옥수수 노래를 부르며 다음 휴게소에 또 들르자고 투정 부렸다.


군옥수수를 시킬 때마다, 아빠는 사장님에게 나무젓가락을 부탁했다. 그러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옥수수를 반으로 뚝 갈라서, 가운데에 나무젓가락을 푹 꽂아주셨다. 동생 하나, 나 하나. 한 번은 내가 갈라보려고도 했었는데, 뜨거워서 잡을 수도 없었다. 그때 아빠가 웃으며 단번에 팍 갈라주었다. ‘우와 아빠 진짜 힘세다!’ 마치 슈퍼맨 같았다.

고속도로를 뚫고 읍내를 지난 후 언덕을 넘었다. 옅은 구름의 하늘이 반원처럼 넓게 펼쳐졌다. 호수처럼 펼쳐진 논두렁이 보였다. 비탈길을 마치 롤러코스터 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소똥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방귀 뀌었다고 하하하 놀렸다. 엄마는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아빠도 백미러 속에서 웃고 있었다.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내민 소랑 눈이 마주쳤다. 자기를 놀리는 줄 알았던 걸까.

옥수수를 다 먹을 즈음, 할아버지 댁이 보였다. 제대로 떼먹지 못한 옥수수 알갱이가 이빨 모양을 따라 짓눌려 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 댁 마당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빠는 옥수수를 건네받고 뒤뜰에다 던졌다. 닭들이 ‘꼭꼬꼬’ 소리 내며 달려들었다. 고무신을 구겨 신고 나온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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