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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밀어주던 그네

by 벤자민 Benjamin

할머니집 앞에는 놀이터가 있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매일 그곳에 나갔다. 놀이터에는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었다. 미끄럼틀 타러 올라가기엔 아직 내 다리가 짧았다. 한쪽 구석에서 모래를 만지며 놀았다.


작은 삽으로 흙을 퍼다 작은 통에 담았다. 통을 다시 엎어서 흙을 한 곳에 쌓아두었다. 흙을 파다 보면 상아 색의 마른 모래가 아닌 촉촉한 고동색 흙이 나왔는데, 그 촉감을 정말 좋아했다. 그렇게 놀다 보면 신발 안에는 항상 모래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할머니는 놀이터의 정자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우리 할머니만 “할머니”라고 불렀고, 다른 할머니들은 “할매”라고 불렀다. 옆집 할매, 마녀 할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할매들은 늘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네 살이라고 말했다. 뭔가 잘못한 것 같아 다시 주먹을 꼭 쥐고 내 눈앞에 들고 왔다. 하나, 둘 세며 손가락을 폈다. 결국 ‘안녕’하듯이 다섯 손가락을 펴고 말았다. 우리 할머니가 엄지 손가락 하나를 접어주었다.


하루는 할머니와 늦은 오후에 놀이터로 나섰다. 짜리 몽땅한 그림자가 나를 따라왔다. 늘 아이들로 붐볐던 그네가 그날따라 텅 비어있었다. 갑자기 그네를 타고 싶었다. 예전에 형아들이 그네를 타다가 멋있게 점프해서 내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한동안 누가 타지 않은 듯, 그네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모래를 발로 차며 그네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나를 들어 앉히고는 손잡이를 꼭 잡으라고 말했다. 그러곤 내 손을 포개 잡고 그네를 앞뒤로 흔들었다. 쇠사슬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차가웠지만 내 손을 감싼 할머니의 손은 따뜻했다. 삐걱이는 그네 소리가 텅빈 놀이터에 울려퍼졌다.


처음엔 무서웠다. 앞으로 갈 때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눈을 꼭 감고,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할머니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여보라 했다. 앞으로 갈 때 다리를 쭉 펴고, 뒤로 갈 때 다리를 다시 접으라고 말이다. 점점 재미있어졌다. 그네는 더 높이 올라갔다. 눈을 떠보니 커다란 하늘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앞뒤로 흔들던 다리가 점점 아파질 때쯤, 할머니한테 점프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형아들이 멋있게 점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두울- 셋!’ 가장 높은 곳에서 미끄러지듯 내렸다. 내 그림자와 이렇게 멀리 떨어져본 적이 있었을까. 그 느낌도 잠시.


'철퍼덕.' 발, 무릎, 손이 차례로 모래바닥을 만났다. 형아들처럼 멋있게 뛰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얼른 나를 일으켜세워서 옷을 털어주었다. 넘어져 아픈것 보다, 할머니 손이 더 매웠다.


할머니가 집 가서 손 씻고 밥 먹자고 했다. 손을 펼쳐보니 모래 알갱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넘어진 게 아무렇지 않은 듯, 괜히 귀를 후비적이며 할머니 뒤를 따랐다. 돌아보니 그네가 아직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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