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먼을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말. 대학신문에서 취재비를 지원해 주는 해외취재 기회가 매 방학마다 찾아오는데, 대학신문을 그만두기 전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넷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무엇을 취재하러 어디로 갈지 여러 의견이 오갔는데, 그중에서 최종 선택된 건 '양안관계(cross-strait relations)'를 취재하러 '타이완'에 가자는 거였다. 정치에 문외한인 나는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를 그리 부르는지도 처음 알았다.
타이완에 가자고 대강 합의한 후 양안관계를 파고들던 우리는 '진먼'이라는 섬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는 '금문도(金門)'로 더 잘 알려져 있는(금문고량주로 유명하다) 이 섬은 양안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양안관계 하면 빼놓기 어렵다. 중국과는 8km, 타이완 본섬과는 200km 떨어져 있다. 타이완령이지만 중국과 훨씬 가까운 진먼을 얄팍하게 알았을 때는 '양안이 실질적으로 충돌하는 불안과 공포의 섬'일 거라고 추측했다.
진먼은 타이완 본섬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이 걸리는 섬이다.
실제로 진먼은 과거 수십 년 동안 중국의 폭격을 받았다. 이곳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양안이 충돌하는 전장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국공내전 당시, 타이완은 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진먼을 목숨 걸고 지켜야 했다. 진먼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타이완 본섬이었다. 국공내전이 종식된 후에도 중국의 폭격이 주기적으로 가해져 타이완 정부는 진먼에 내린 군사 계엄령을 해제할 수 없었다. 무려 21년 간 이어진 폭격. 주민들은 마치 천둥이 쏟아지는 듯한 포탄 소리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오늘날 아주 한산하고 평화로운 베이산 마을,
한편에는 과거 포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런데 진먼 출신 교수를 비롯한 양안관계 연구자들, 또 진먼 주민들과 이야기 나누고 보니 '충돌의 섬'은 이미 옛말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연구자들은 이제 양안의 충돌에 가장 불안해하지 않을 사람들로 진먼 주민들을 꼽기도 했다. 주민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타이완과 중국의 교류 거점이 된 진먼을 폭격할 리 없다고 믿었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의 흔적은 여전히 섬 곳곳에 남아 있다. 눈여겨볼 것은 진먼이 전쟁의 흔적을 관광상품화 하는 데 성공한 케이스라는 점이다. 진먼은 일명 '다크 투어리즘'의 사례로 꼽히는데, 다크 투어리즘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뜻한다. 1992년이 되어서야 군사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진먼은 자연스레 탈군사화의 수순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진먼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고, 이들이 찾은 답은 '관광'이었다. 진먼 경제는 이제 관광산업이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먼 관광 홈페이지에는 베이산 마을, 스산 대포 진지, 자이산갱도, 구닝터우박물관 등 전쟁과 관련된 관광지가 친절히 소개되고 있다. https://www.kinmen.travel/ko )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구닝터우 박물관
에라, 모르겠다!
진먼을 조사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상식과 사실이 다른 부분도 많았고, 언어 장벽은 제아무리 똑똑한 파파고가 있다 한들 결코 낮지 않았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는 팀원의 해석에 의지하다 보니 내용을 팔로업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해외취재 팀당 인원이 최대 3인으로 제한되면서 선배 기자가 자리를 양보하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영상의 형식과 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힘이 쪽 빠졌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콘셉트를 강력히 주장했다. 팀원들도 동의해 그쪽으로 아이디어를 모아가고 있었지만 데스크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신문에서 다큐 영화 콘셉트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전례가 없었고, 우리의 기획안도 잘 갖춰지지 않아 충분한 설득력이 없었다. 다큐멘터리라 장면 하나하나 연출할 수도 없으니, 기획안은 대강 흐름만 잡고 화면 같은 건 가서 찍어 와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봐야 알지 않나' 하는 불확실한 생각이 데스크에 받아들여질 리 없다.
결국 기획 단계에서 우리 셋 모두가 번아웃을 경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시기가 조금씩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다 다 같이 해외취재를 포기하자고 결심한 날이 있었다. 그날은 늦은 시간까지 회의가 있었다. 우리 셋은 회의가 끝난 후 대학신문 인근 공대 건물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털어놨다. 건물 내부 공간이 모조리 문을 닫은 밤이었다. 2층 복도에 놓인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우리가 눈물을 머금고 내린 결론은 '포기 선언'이었다.
대신에 우리끼리라도 꼭 진먼에 가기로 했다. 그깟 지원금이 뭐 대수냐, 일단 가서 자유롭게 찍고 오자. 처음부터 생각했던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방향성을 지키고 싶었다. 대학신문으로서 타이완에 가서 다큐를 제작한다면 대학신문의 이름과 경향을 고려하는 것이 맞지만, 한편으론 다큐멘터리 영화를 추구하는 기획안이 대학신문과 맞지 않다면 애초부터 반려하면 될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안 된다고 했다면 사진부 기자인 내가 굳이 엄청난 품을 들여 다큐 제작에 참여할 이유도 없었다.
데스크에 취재 포기 의사를 전한 그날은 참 후련했다. 그러나 해외취재비도 행정 처리가 다 된 상황에서 일정을 취소하기도 곤란하다는 상황을 전해 들었다. 결국, 데스크와 논의 끝에 예정대로 진먼에 가기로 했다. 이견이 합치되기까지 시시콜콜한 논쟁을 하는 동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새 출국 예정을 2주 앞두고 있었다. 엉성하긴 하지만 기획안을 마무리 짓고 촬영 연습에 돌입했다. 셋 중에서 나만 촬영 경험이 있었기에 기초 위주로 속성 훈련을 해야 했는데, 열정이 가득한 팀원들은 기초도 빠르게 배웠다. 그 덕에 현장에서 부담감을 덜고 촬영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취재 일정은 7박 8일로 넉넉히 잡았다. 일주일을 버틸 짐을 꾸리면서도 타이완 진먼에 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먼을 그리는 시간'의 시작. 새벽 비행으로 비몽사몽 했지만 심장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공항버스에 함께 오른 동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드디어 간다, 드디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