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간 김개똥 Jan 26. 2022

이디야 토피넛라떼 때문에 퇴사 한다고 말도 못하고

성추행도 참고 혹한기 화생방도 참았는데 토피넛라떼는 못 참았습니다

그 해는 유난히 추웠고, 그 날은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눈좀 쓸라는 메세지를 받고, 아침부터 셔츠 한장만 입고 (혹한기 훈련 비극의 이유는 이쪽에) 눈을 쓸었다.


아니 근데 쓰는 속도보다 내리는 속도가 빠른데, 이걸 쓰는게 진짜 의미있는 일인가?

현실에서 회사원인 내게 이 세계에선 5성급 군인?

따위의 웹소설 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을 때을 하고 있을 때 쯤, 차장님이 출근했다.


정신없이 눈을 쓰는 친구들을 맹한 표정으로 보다, 본인이 보기에도 어이없다고 느껴졌는지 "직원들 커피 좀 사오라"며 대리에게 간식비 카드를 건냈다.



뭐지? 혹시 아직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시나? 

막내가 아니라 대리가 커피심부름을 하게 됐다는 사실에 조금 뻘쭘하고 민망했다.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좋았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대리님!"하고 나댔을텐데, 우리 팀은 서로 그런 배려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펑펑 내리는 눈 사이로 멀어져가는 대리님을 보며, 다시 하염없이 바닥을 쓸었다. 날씨는 춥고, 정장셔츠는 얇았다. 눈은 계쏙 내렸고, 콧물은 계속 흘렀다. 나는 또, 마음속으로 개똥벌레를 불렀다. 


나는야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분위기가 개똥 같아도 여기가 내 집인걸 어쩔티비~


이 집이 나의 무덤이다.

이 집이 나의 무덤이다.

무덤.

무덤으로 만들자.

버티자.

퇴사는 죽음 뿐이다.


20대 후반에 하는 군인체험이 처량하긴 했지만, 한 편으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지만, 누군가와 공통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게 좋았다.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투덜투덜 불평하는 행복. 이런 소속감. 함께라는 감정. 혼자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커피가 곧 올 거라는 사실이 기뻤다. 온다. 커피가. 차장님이 사주신.

달콤하고 따듯한 커피!



커피는 원래 나의 소울푸드였다. 워낙 달달한 커피를 좋아하고 이디야 토피넛라떼가 존맛탱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날은 따듯한 온기가 간절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서, 2년이나 입은 헤진 셔츠 사이로 바람은 술술 들어오고, 또 쌓일 눈을 의미없이 뒤척거리고 있는 나에게 커피는 일종의 부상이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열심히 잘 이겨내자. 버텨내자. 같은 상.





몇 분이나 지났을까. 대리님이 카페에서 돌아왔다.

호다닥 달려가 커피를 내려너 놓는 걸 도왔다. 하나 둘 커피를 내려놓고,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떼, 토피넛 라떼. 네 가지로 분류해 세웠다. 그리고 직원들의 취향을 따라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 한참 적다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팀은 23명인데, 커피는 20잔 뿐이었다.


“대리님, 커피가 좀 모자란 것 같은데요.”     


의아한 내 표정을 보던 선배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미안. 너희 건 없어. 사오지 말라 해서.”




충격이었다. 

피곤한 직원들을 위해 사오라고 한 20개의 커피. 그 중에 우리의 것은 없었다. 막내는 5명인데 왜 3잔만 모자랐나 했더니, 남은 2잔은 청소 아주머니들께 드릴 거라고 했다. 


잘 먹을게! 밝게 인사하며 내 곁을 지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음식을 훔치려다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무전취식자. 도둑놈. 아찔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1인분이 될 수 없는 걸까.


"내꺼 종이컵에 좀 담아줄까? 아님 나가서 사올래?"

싸늘히 굳은 나에게 개인 카드를 내미는 대리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뒤돌아 내 자리로 향했다.


.

.

.

.


다들 미쳤다. 여기는 다들 미쳤어.

사오지 말라고 한 팀장도, 사오지 않은 대리도, 다 알면서 방관하는 차장도, 이 상황을 보고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여기있는 사람들. '뭐 평소에 더한데 커피 하나에 삐지냐'고 하는 동료 이등병들까지. 모두 미쳤다. 


여전히 내 자리에는 싸늘한 겨울 바람이 불었다.

다시 혹한기의 시간이다.





싸늘한 바람이 뼈를 파고들었다.

추운 계절이었지만, 그와 관계 없이 더 추웠다.

발령 4개월차. 나는 그냥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빠지기만 할까.


문득 일을 넘어, 과연 이게 나란 인간을 스스로 존중해주는 일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이 개똥무덤은 정말 버틸만한 지옥일까. 정말 버틸만한 지옥이 맞을까. 버틸만하다고 자위하는 건 아닐까. 인간은 정말 돈만 벌면 어떤 고통을 받아도 되는 존재일까. 지옥 뒤엔 또 다른 지옥이 있을 테니 이 지옥이 낫다며 안도해야 하는 존재일까.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견뎌내야 할까. 


나는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은 정말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2년차 회사원이 화생방이랑 혹한기를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