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다녀오라고만 할 뿐, 어딜 가는지 누구와 가는지 언제 가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신혼 초 그랬던 것처럼 한결같이 무심하다. 한때 그 무관심을 나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사춘기 아이에게도 무관심하다. 이건 불행일까 다행일까. 아이의 눈에 이런 관계는 '정상'으로 보일까 '비정상'으로 보일까.
애초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의 척도는 어디일까?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은 얼마나 보편적일까
그 넓은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상식 밖이 되는 것일까
상식 밖의 논리는 배제되어야 맞는 걸까
보편성이 우리에게 주는 건 안도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무엇에 안도하는가
보편적인 건 통속적이다.
통속적인 건 식상할 수밖에 없고
그건 작가나 예술가에게는 매우 슬픈 일이다.
아릿한 비감을 달래며도쿄행 항공권을 검색한다.
홀로 서야 할 자리를 알고 있다.
그곳엔 바람이 불 것이다.
천지인 키보드가 두드린 말, 결국 말로 뱉어내지 못한 마음, 잊혀버린 약속. 갈 곳을 잃은 희망. 그곳엔 황량한 바람만 불어올 것이다.
결국 바다가 보이는 숙소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한 번은 낯선 곳에 나를 가두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다고,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물세 살이던가, 계절은 잊었다. 혼자 속초로 향했다. 영등포역 공중전화에서 친구에게 비장하게 전화했다. 혼자만의 여행을 하겠다고. 속초에서 바다를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갔다. 바다 삼면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처음으로 식당에서 혼자 아침식사도 했다. 영덕의 바닷마을은 예뻤다. 그러나 이십대 초반의 혼자 돌아다니는 아가씨는 눈에 띄기 마련. 무서운 일을 겪을 뻔하고혼자만의 여행을 도망치듯 끝내고 서울로 와야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무모하고 겁이 없었다. 딱 그만큼의 세월이 흐른 마흔 일곱 살의 나는 여전히 무모하다.
쉬러 온 여행이지만 오래 걷는다.
휴대전화를 충전하고 이어폰, 보조배터리를 충전한다.
바다를 보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음악도 놓지 않는다.
읽기 쉬운 마음, 훑고 지나가라고 했던 마음을 듣는다.
천천히 오래도록 걷고 싶었던 마음도 듣는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액셀을 밟은 적이 있다.
두 번이나 거세게. 얼마나 놀랐는지 몸이 덜덜 떨렸다. 그 경험이 남긴 트라우마는 몸 어딘가에 고였다. 나를 믿을 수도 더 이상 알 수도 없게 되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까.
살아온 시간만큼 능숙해진다는 건 어쩌면 무뎌지고 뭉툭해지는 걸 좋게 포장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무지 능해지지 않는 게 있다. 망상은 벚꽃처럼 빠르게 피고 지고 마음은 나뭇가지처럼 멋대로 뻗어나간다.
바다를 보면 드는 생각
'나는 어디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번엔 삶이 간절히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그의 욕심에 응하고 싶다. 이 삶을 긴박하게 붙들고 보듬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몸과 마음의 기억을 하나씩 맛보며 바다로부터 멀어졌다. 삶은 바다가 아니라 당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