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하기 좋은 달 -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이다. 소설엔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해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고 하는데 오늘은 포근하다. 소설엔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쬐어 소춘(小春)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산책 길 옆 개나리 울타리에 시절 모르고 핀 꽃을 보며 웬일인가 했더니 개나리에겐 소설이 소춘이었나 보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숲은 이제 회색빛 나무 기둥과 가지들만 남았다. 바닥엔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참나무 아래엔 갈색 참나무 잎이, 은행나무 아래엔 노란 은행잎이 푹신하게 깔려있다. 열흘 전 배 밭에 바람이 불어와 춤추듯 흩날리다 내려앉았던 노란 잎들도 새까맣게 변했다. 빈 가지만 허공을 향해 쭉쭉 뻗어있다. 산 중턱엔 나뭇잎이 무성할 땐 보이지 않던 집 한 채가 보인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 표지 석에 희미하게 ‘개운암’이라고 쓰인 걸 보니 작은 암자인가 보다. 그곳에 가면 구름이 열리고 운도 열리는.
인디언 달력에서 십일월은 부족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그중 체로키족은 ‘산책하기 좋은 달’, 아라파오 족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십일월 하순, 비 그친 아침이 고요하다. 간간히 새소리만 들려온다. 회색과 갈색으로 바뀐 숲도, 들판도 고요해졌다. 고요 속을 걷는 내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고요 속을 걷다 보면 십일월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이란 걸 발견한다. 길가엔 노랑, 자주, 보라 빛깔을 띤 국화꽃이 아직 싱싱하게 피어있다. 마른 풀잎이 쓰러져 누운 덤불숲에는 미국쑥부쟁이 꽃과 여름에 떨군 꽃씨가 다시 자라 꽃을 피운 개망초 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밭가 울타리엔 푸른 가지에 빨간 구기자가 매달려 있고, 잎 떨군 찔레와 산수유 나뭇가지도 붉은 열매가 가을꽃처럼 매달려 있다.
산책길에서 꺾어온 개나리 꽃가지와 미국쑥부쟁이, 개망초, 찔레 열매를 화병에 꽂았더니 봄, 여름, 가을이 한 데 모였다. 어쩌면 오늘이 산책하며 꺾어온 들꽃으로 화병을 꾸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2020.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