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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25. 2021

시월, 한낮의 산책

-  소요유의 행복 -

   마을 고샅길에서 시작할까, 언덕길부터 오를까 망설이다 고샅길로 향한다. 찻집 청사초롱 대문 앞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왼편에 오래된 기와집이 나온다. 흙과 기와를 섞어 쌓은 담장 안쪽은 늘 궁금증을 자아낸다. 담장 밖으로 올라온 잘 손질된 소나무와 향나무, 키가 큰 꽃나무들, 햇살을 이고 앉은 대문 앞의 화사한 소국이 담장 안의 정원을 더 궁금하게 만든다.

 

  궁금증을 뒤로하고 기와집을 지나 고샅길을 벗어나면 금방 들판 길이 이어진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논은 벼 밑동들만 덩그마니 남아있다. 논에서 사라진 빛은 앞쪽 야산으로 옮겨가 숲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른 풀밭 위론 메뚜기가 뛰어다니고, 무성한 풀숲에 가려져 있던 연못은 시원하니 넓어졌다. 연못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길을 걷기 시작하고, 낚시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오래전 저수지에서 아이들과 낚시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저기 앉아 나도 낚시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을 지나 둑길을 걷는데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왼편에서 백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너무 놀라 뒷머리가 쭈뼛거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전기가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좀 전에 지나쳐온 장어구이 집에서부터 따라온 것 같다. 외진 곳에 있는 집의 개들은 내가 지나가면 매번 큰 소리로 짖어댔었다. 그래서 되도록 개가 있는 집 근처 길은 피해 다녔다. 그런데 장어구이 집을 지날 때 못 보았던 개가 짖지도 않고 나를 따라온 것이다. 돌아가라고 손짓을 해도 계속 따라왔다. 순해 보이는 얼굴에 꼬리까지 흔들며 따라와 두려움은 사라졌다. 말을 건네며 머리를 쓰다듬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얘가 어디까지 따라오려나? 알아서 돌아가겠지.’ 생각하며 둑길 아래 좁은 논길로 내려왔다. 백구는 따라 내려오지 않고 머뭇거리더니 온 길을 되짚어 장어구이 집 쪽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괜히 지레 겁을 먹었단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다 무섭게 짖으며 달려들던 개 때문에 놀란 적이 있어 난 개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크기가 크든, 작든 개를 만나면 겁부터 났다. 저녁이면 아파트 주변 인도를 따라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에서 반려견이 오면 난 도로 아래로 내려가 피하거나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백구는 사납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아마 말을 걸고 머리라도 쓸어줬다면 개에 대한 내 두려움을 조금은 떨쳐냈을지 모르겠다.           

  

   들길을 지나 산길로 들어서 낮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시 논과 밭이 이어진다. 논 옆 빈터에 억새꽃이 하얗게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예뻐 사진을 찍는데 “에구구… 에구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왼편 논에서 벼를 베던 할아버지가 손으로 억새밭 건너편을 가리켰다. 고라니 한 마리가 논을 건너 숲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었을 때 억새 숲에 있던 고라니가 알아채고 달아났다보다. 억새꽃 찍는다고 고라니를 쫓아버린 것이다. 고요를 깨뜨리며 고라니를 놀라게 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얼마 전까지 수풀로 꽉 차 있던 숲이 몸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 입는 옷들을 비워낸 옷장처럼 숲에 빈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나무를 타고 오르던 칡덩굴 잎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나무의 맨몸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숲 가장자리에 있는 아카시나무 잎들이 가장 먼저 쏟아져 내려 가늘고 기다란 몸과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비워진 숲에 먹이가 줄면서 고라니들이 논과 밭으로 먹이를 찾아 자주 내려오는 것 같다. 전에 산 아래 밭에 채소를 심어 가꿀 때도 그랬었다. 밭가에 그물을 쳐 놓지 않으면 상추, 배추, 고구마 잎은 고라니나 멧돼지 차지가 되어버렸다. 아침마다 텃밭에 갔다가 이발해 놓은 것 마냥 채소 잎을 가지런히 먹어치운 걸 보면 힘이 쭉 빠지곤 했었다.         

  

  그나저나 요즘 가장 배부르고 신난 애들은 새떼들이다. 잡목과 풀숲 열매와 씨앗들이 새들의 만찬이 되어준다. 걷다 보면 과수원에서, 탱자나무 숲에서, 풀숲에서 우르르 새떼가 몰려다닌다. 새들이 성찬을 즐기는 동안 난 하늘과 바람과 햇살, 고라니와 새들과 풀벌레가 들려주는 자연의 달력을 읽으며 걷는 호사를 누린다. 무엇에도 얽매인 마음 없이 자연을 느끼며 자유로이 걷고 있는 그 순간이 내겐 마치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처럼 느껴졌다. 오래전 장자를 읽으며 머리로 배웠던 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삐이 삐이”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나지막이 흉내 내며 걷고 있는데 허리에 물통을 찬 사람이 내 옆을 지나 앞서갔다. 한낮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데 나 말고도 걷는 사람이 있었다. 10m쯤 내 앞에서 걷던 그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왼쪽 밭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었다. ‘평지에서 그것도 젊은 사람이 지팡이가 필요한 건 아닐 테고, 뭘 하려는 거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길 가운데 있는 무언가를 나뭇가지로 살살 밀어가며 길옆 논으로 밀쳐냈다. 아마도 길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작은 뱀인 것 같았다.

  

  내 쪽을 바라보는 그 사람에게 난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난 그쯤에서 기겁해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을 것이다. 그의 행동에서 뒤에서 걷고 있는 모르는 이를 위한 배려와 섬세한 마음이 전해졌다. 산길이든, 들길이든 걷는 사람들 마음은 자연을 닮아 순해지고 고아지나 보다. 그 마음이 전해져 더 흐뭇한 산책이 되었다.  


202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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