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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25. 2021

걷기, 삶을 바꾸다

- 걷는다는 건 ? -

    걷는 다는 것!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걸어야지 하는 머릿속 생각이 발끝까지 이어지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소파와 한 몸이 된 등짝과 엉덩이를 떼어내는 일부터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오는 트롯 가수의 애절한 목소리와 미각을 자극하는 요리프로그램으로 도배된 TV를 끄는 일, 헐렁한 티셔츠와 파자마를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일까지 몇 단계의 유혹을 끊어내야 한다. 그 중 가장 큰 결단은 현관문을 열고 몸을 집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걷기의 시작은 현관문을 나섰을 때 비소로 시작된다. 

  

  늘 현관 앞에서 주저앉던 내가 요즘은 일주일에 4일 이상을 걷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심하게 앓고 나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다.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책 제목처럼 걸으면서 건강을 되찾기로 했다. 병과 시름하는 동안 건강한 몸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려면 먼저 면역력과 기본체력을 높여야한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이 두 가지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약도 무용지물임을 알았다. 축농증과 비염 치료를 위해 팔 개월 가까이 한방과 양방, 온갖 건강 보조제를 먹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증세가 극에 달했을 때 코로나19 검사까지 하며 대학병원 진료를 받고나서야 좀 나아졌다.  

   

   몸이 나아지면서 집 가까이에 있는 둘레 길부터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곳 주변에는 한 시간에서 두세 시간 이상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 많다. 메타세쿼이아와 벚나무 가로수로 둘러싸인 5km정도의 호숫가 길과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현충사 둘레길, 논과 밭, 낮은 언덕과 과수원을 따라 걷는 마을길,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울창한 6km의 청댕이 길, 가을이면 갈대와 억새,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장관인 8km의 곡교천 길이 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봉수산, 망경산, 배방산, 설화산, 광덕산… 산과 산을 잇는 산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엊그제는 아파트 바로 뒤편에 있는 청댕이 길을 걸었다. 밭길을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 길옆 밤나무 아래 밤송이가 수북이 흩어져 있었다. 밤송이를 뒤집으니 반질반질한 산밤들이 배를 맞대고 들어앉아 있었다. 알밤 줍는 재미에 산이 어둑해지는 것도 모른 채 밤나무 아래를 헤집고 다녔다. 밤을 줍고 산마루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은 고즈넉했다. 참나무 가지들이 쏴쏴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렸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흙길은 푹신푹신해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졌다. 뒷목으로 파고드는 저녁 바람이 서늘했지만 마음은 큰일이라도 해낸 듯 뿌듯했다. 

  

  오늘은 마을 둘레 길을 걸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 모두가 가을 빛깔을 띠고 있었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가에선 참새 떼가 날아오르고, 들깨를 털고 있는 깨밭에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언덕배기 과수원 사과나무에는 양팔을 벌린 가지가 휘어지도록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고요한 들길 풀숲에선 또르르르 또오또또또 또르르르 또오또또또 가을 풀벌레 소리가 내 발걸음을 따라왔다. 가을 풍경에 빠져 넋을 놓고 걷는데 길옆 야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내 앞을 달려가는 고라니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시원한 바람, 따끈한 햇살, 가을빛으로 물드는 산과 들녘, 풍요롭고 고요한 풍경 속을 걸으며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행복감이 차올랐다.                  

  

  내가 처음부터 걷기와 담을 쌓고 살아온 건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걷기 위해 방학 때마다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걷기에 매혹된 것은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부터였다. 배낭을 메고 한 여름 땡볕 속을 걸을 때면 몇 발짝 떼지 않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겨울 바닷길에선 매서운 바닷바람과 눈보라에 떠밀리며 걷기도 했다. 바람 없이 사뿐사뿐 눈이 내리는 날은 주위 풍경과 대기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오름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은 조각보를 펼쳐놓은 듯 아름다웠다. 밭의 경계에 쌓아놓은 검은 돌담, 겨울 채소가 자라는 초록색 밭, 빈 밭에 쌓여있는 흰 눈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풍경은 몇 번이고 오름을 다시 오르게 했었다. 

  

   올레길을 걷는 동안 발가락은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했다. 발바닥에선 불이 났고 종아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절뚝거리며 숙소에 도착할 쯤엔 오늘도  해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고통을 잊게 했다. 걷는 내내 동행이 되어준 꽃과 나무, 하늘, 바다는 또 하나의 선물이 되어주곤 했다. 자연 속을 걷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찬미하며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걸으며 만났던 자연의 아름다움, 자신과의 한계에 맞서며 발견했던 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떤 힘든 일도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계속 걷게 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제주 올레길을 걸을 때는 날마다 그날 걸어야 할 코스와 거리에 대한 목표가 있었다. 정상을 찍기 위해 산을 오르듯 한 코스의 종착점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었다. 계획했던 코스를 완주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끼게 했다. 걷기 자체를 즐기며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요즘 다시 시작한 내 걷기 목적은 건강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어느 길을 얼마만큼 걸을 것인지 길이와 난이도, 속도가 달라진다. 꼭 어디까지 걸어야겠다는 목표와 부담이 없으니 주변 풍경을 즐기며 느긋하게 걷는다. 올레길을 걸을 때와는 다른 충만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대부분의 병은 걷기만 해도 낫는다’고 말하는 일본의 동네병원 의사 나가오 가즈히로는 생활습관병을 치료하는 가장 훌륭한 약으로 ‘걷기’를 추천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올해 날 힘들게 했던 병도 걷지 않아서 심해진 것이다. 실제로 우울모드에 빠져있다가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땅을 밟고 햇볕을 쬐며 걷다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밝아진다. 걸으며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나뭇잎 하나에 깃든 생명의 기운이 내게 스며듦을 느낀다. 걸을 때 분비된다는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 때문인가 보다. 나가오 가즈히로는 ‘걷는 사람은 얼굴부터 다르다’고 한다. 균형 잡힌 뇌 호르몬이 얼굴에도 반영되어 ‘기분 좋은 얼굴’, ‘세로토닌 얼굴’이  된다는 것이다. 평소 핏기 없이 건조했던 얼굴이 걷고 나면 맑은 기운이 차올라 생기가 넘치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요즘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치하는 일은 걷기다. 마을길을 걷고, 호숫가를 걷고, 숲길을 걷는다.      

  

  내게 걷는 다는 건, 몸을 깨우는 일이다

  피와 살과 뼈를 움직이게 하여 

  고여 있는 것들을 흐르게 하고

  굳어있는 것들을 풀어낸다 

  걷는 다는 건, 온 몸의 세포를 열어 

  바람과 대지, 만물과 숨을 나누는 일이다

  흔들리며 반짝이는 나뭇잎들

  바위를 돌아 흐르는 물소리

  호록 호로록 휘익 휘리릭 새소리에 

  눈이 맑아지고 귀가 열린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대지의 숨결이 실리고 

  정신에, 마음에 맑은 기운과 환한 빛이 깃든다      

  

  걷기로 내 몸과 마음을 바꾸어 내게 남아있는 날들을 가벼워진 몸, 맑아진 정신으로 살고 싶다. 다시 병에 발목 잡히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개 살고 싶다.

  

202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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