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 날 아침이다. 여행지에서의 첫날은 늘 잠을 설치거나 밤을 꼬박 새우곤 했는데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다. 어젯밤엔 숙소로 돌아와서도 세 시간 넘게 ‘삽시도 회 식당’에서의 여운을 이어갔다. 낮에 사 두었던 맥주와 함께 마음을 울렸던 노래를 찾아 들으며 감상에 젖고, 내가 올린 바다 사진에"30억 광년을 날아온 외계별이 내는 빛과 언어를~"로 시작하는 과장되고 황당한 남편의 댓글에 배꼽이 빠져나갈 듯 웃기도 했다. 이십 년 가까이 친구와 함께했던 여행의 추억을 더듬으며 섬에서의 여름밤을 보내다 어느 사이 잠이 들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에 잠이 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나 보다.
면삽지 가는 길에서
면삽지
둘째 날엔 먼저면삽지에 가기로 했다. 면삽지란 이름은 말 그대로 삽시도를 면한다는 뜻이다. 밀물 땐 무인도가 되었다가 물이 빠지면 모섬과 이어진다. 면삽지는 숙소 반대편 해변에 있어 숲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이정표가 나왔다. 진너머 해변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면삽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가는 길 내내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심했다. 우리가 넘고 있는 언덕은 ‘봉긋한 언덕’이란 뜻을 지닌 ‘붕구뎅이산’이었다.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데크 전망대를 지나서 내리막길은 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졌다. 올라올 때가 걱정되었지만 섬 여행 책자에서 보았던 면삽지 풍경을 떠올리며 계속 내려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머리에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시큰거리는 무릎 때문에 한 계단에 두 발을 디뎌가며 한참을 내려가자 바다가 보였다. 물이 빠져 면삽지에도 오갈 수 있었다.
면삽지 왼편 바다
호주 그레이트 오션 로드
면삽지 오른편 바다
우린 자갈밭에 앉아 산과 바다, 바위가 어우러진 주변 풍경에 빠져들었다. 붕구뎅이산과 면삽지 사이 바다 풍경이 오래전 친구와 함께 갔던 호주 그레이트 오션 로드 협곡을 떠올리게 했다. 섬 사이 바다를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오래 앉아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산등성이를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조금 더 수월하게 올라가는 방법은 계단 수를 세면서 올라가는 것이다. 숫자를 세다 보면 힘든 것을 잠깐 잊을 수 있다. 면삽지에서 산 능선까지 오르는 계단 수는 대략 이백오십 개쯤이었다. 세어보니 그리 많지 않았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둘째 날 오전은 면삽지의 아름다운 풍경 감상에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운동도 제대로 했다.
진너머 해수욕장
진너머 해수욕장
다시 진너머 해변으로 돌아왔을 땐 날이 더 개었다. 전날은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둘째 날은 비 대신 습하고 더운 공기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몰려다녔다. 진너머 해변은 해변 위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넓고 둥그렇게 펼쳐진 하얀 모래밭과 그 너머의 푸른 바다, 모래밭을 감싸고 있는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과 솔숲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해변으로 내려가자 사람들 몇몇이 바닷물이 빠진 모래밭을 헤치며 조개를 캐고 있었다. 호미로 모래밭을 파헤치자 조개가 나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중 한 사람이 여기서 캔 조개로 끓인 조개탕이 정말 시원하고 맛있다며 우리에게 캐 보라고 했지만, 우린 구경만 하다 거덜너머 해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덜너머해수욕장은 진 너머 해변보다 작고 해안선이 단조로웠다. 해변에 솔숲과 야영장이 있어 휴가철이 시작되면 많이 북적일 것 같았다. 우리 거덜머너 해변을 걷고 나서 마을 고샅길을 따라 다시 진너머 해변 언덕 위 차를 향해 걸었다. 고샅길 주변엔 아기자기한 펜션과 작은 화단을 가꿔 놓은 집들 그리고 주변의깔끔하게 가꿔 놓은 밭에선 고구마며 콩이 자라고 있었다. 해변 길과 마을 길을 걸으며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진너머 해변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두 시간쯤 걷고 난 뒤라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간절했다. 펜션 촌 아래쪽에 삽시도 점방이 하나 있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실망하던 차 자세히 보니 문 앞에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전화를 걸자 걸걸한 목소리의 아주머니가 금방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아직 휴가철이 아니라 오가는 사람이 없어선지, 주인은 가게를 비워놓고 다른 일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주인 없는 가게에서 전화를 걸고,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려 어렵게 산 아이스크림은 더없이 시원하고 달콤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는 밤톨만 한 사과 몇 알을 건네며 보기보단 맛있을 거라 했다. 아주머니의 걸걸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말과 행동에서 섬사람의 강단이 느껴졌다.애기 사과의 새콤,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우린 삽시도 점방을 떠나 어제저녁을 먹었던 ‘삽시도 회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할 만한 곳이 그곳뿐이기도 했고, 오늘 점심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러 다시 갈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이야기를 나눴던 아주머니가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를 내왔다. 뜨거운 칼국수가 시원하고 맛있었다. 비 그친 창밖 하늘과 바다, 팽나무와 솟대, 하양, 파랑 테이블과 접어놓은 빨간 파라솔이 그려내는 풍경은 유리창에 흘러내리던 빗방울이 지워졌을 뿐 어제 그대로였다. 삽시도에서의 행복한 두 끼를 선사해 준 그 식당이 창밖 풍경과 함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작고 아름다운 섬, 삽시도 여행은 짧았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듯 많은 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 오랜 여행 친구와 처음으로 함께한 여행이어서 더 편안하고 좋았다. 삽시도 여행을 시작으로 친구와 나의 새로운 여행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