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자락 중턱의 어느 동네
나와 같은 시기에 이태원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면 모두 ‘남산 걷기 대회’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태원이 남산자락에 위치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태원 초등학교에서는 연례행사로 남산을 올랐다(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서울스럽지 않은가, 매 학기 남산타워까지 걸어서 오르다니 그것도 전교생이 한 번에. 그 끝없이 이어지던 행렬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매해 봄과 가을 전교생이 모여 남산을 올랐다. 저학년은 공원까지, 고학년은 남산타워가 있는 꼭대기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출발해 이태원 2동을 지나 약수터 쪽으로 산을 탔다. 학년 별로 그리고 반 별로 줄을 지어 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름은 '남산 걷기 대회'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소풍에 가까웠다(그러나 소풍날이 따로 있기는 했다. 재밌는 건 소풍을 또 남산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매해 성격이 바뀌기는 했지만 누가 빨리 오른다고 상을 주지는 않았으니 '대회'는 분명 아니었다. 도시락을 싸서 등산을 하고 꼭대기에서 좀 놀다가 다시 내려가는 것이 다였으니 소풍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강도가 좀 셌을지언정 소풍은 소풍이었다.
그때의 남산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꼭대기까지 가는 시내버스도 없었고, 도로와 인도의 구분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한국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었기에 다른 관광지처럼 노점상도 꽤 많았다. 지금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꼭대기까지 이르는 가파른 언덕에 쥐포, 번데기, 오징어, 솜사탕 등을 파는 노점상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소풍 가는 날이라고 손에 쥐어진 몇 천 원으로 아이들은 군것질 거리를 사 먹곤 했다. 역시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솜사탕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취향이 올드했던 나는 언제나 석화구이 오징어를 택했다.(그 어린이는 커서도 석화구이 오징어를 좋아하지만 이제는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남산을 오르기 위해선 도시락과 얼음물 그리고 작은 돗자리면 충분했다. 나는 친구들의 돗자리에 의지해 물과 도시락만을 챙겼는데, 대신 500m 생수가 아닌 1.5L 생수를 얼려 가져갔다. 한두 번 오르다 보니 작은 생수는 너무 빨리 녹고 양이 부족한 게 아닌가, 엄마와의 상의 후 파격적으로 1.5L를 챙겨갔던 걸로 기억한다. 꽤 무거웠지만 처음 가져 간 날 볼 수 있었던 친구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덕분에 나는 '남산 걷기 대회' 날이면 인기가 좋아지곤 했다. 그 물이 떨어질 때 쯤 남산타워에 다달았다.
아이들은 남산 꼭대기 이곳저곳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팔각정은 언제나 선생님들 차지였기에 넘볼 수 없었고, 봉화대 쪽은 매점이 있어 앉을자리가 없었으니 우리는 그저 아무 나무 아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을 먹은 후 주어진 짧은 자유시간 동안 할 것이라고는 봉화대를 보고 오는 일뿐이었지만 학교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웠다. 무엇보다 이제는 올라갈 일 없이 내려가기만 하면 됐으니 걱정이 없었다. 소풍 이후의 하굣길은 자유로웠다. 함께 내려오다가 집 근처를 지날 때 바로 집에 가면 그만 이었는데, 산을 내려 올 수록 행렬의 크기는 작아졌고 학교까지 다시 돌아가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저 인사만 하면 어디서든 선생님과 헤어질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방만한 관리가 아닌가 싶지만 그 시절엔 그런 방식을 신경 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에도 나는 친구들과 우리만의 '남산 걷기 대회'를 한다. 대게 공원 산책에 끝날 때가 많지만 일 년 에 몇 번은 꼭 남산타워를 보고 온다. 특히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면 꼭 남산 꼭대기에 오른다. 언젠가 서울을 재패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서 랄까.. 는 농담이고 괜히 등산을 하고 나면 올해는 잘 살 것만 같아서 그런다. 매번 남산의 정기를 받아 한 해를 산다. 이태원에 사는 나는 오늘도 나는 남산을 걷는다. 남에 집 멍멍이의 귀여움에 감탄하며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내려오는 길에 해가 지는 서울의 전경을 잠시 감상한다. 마음만 먹으면 잘 가꿔진 공원과 공기 좋은 도서관, 속이 트이는 서울 전경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남산이 동네 뒷산이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다. 그러니 역시 클럽이나 맛집보다는 남산이 가까이 있다는 게 이태원에 오래 살고 싶어 지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