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지난 계절의 옷가지처럼, 자꾸 발에 채이는 동네가 있다. 이따금 생각나고, 우연찮게 들르게 되는. 마주칠 때마다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져서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그런 동네. 내게는 S시 M동이 그런 곳이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S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누나와 나는 '그곳만은 싫다'며 부모님께 칭얼거렸다. 그곳은 큰 도시여서 깍쟁이들이 많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게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들의 반대는 부모님의 결정에 큰 영향이 없었다. 우리는 S시에서도 시청이 있는 동네 바로 아래의 거주 단지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이 M동이었다.
아파트들은 낮고 녹지가 많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여지없이 잔디밭이 있고, 도로에는 차들도 많지 않았다. 1층짜리 상가 건물에는 슈퍼마켓과 빵집, 도서대여점과 문구점이 있었다. 5분만 걸으면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고 그 주변 어디든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였다. 학교 친구들은 모두 동네 친구들이어서 학교가 끝나면 단지 곳곳을 쑤시고 돌아다니며 공을 차고 딱지를 치고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다. 그렇게 십 대의 절반을 보냈다.
IMF시기를 겪어낸 동네도 그곳이었다. 아버지는 임원까지 했던 중견 기업을 그만두시고 사업을 준비하셨는데,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나름 보릿고개였다. 한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았던 어머니는 근처 백화점 가구점에서 판매사원으로 일을 하셨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혼자 테니스공을 가지고 나와 텅 빈 하늘로 던졌다가 받고, 또 던졌다가 받으며 놀았다. 근처 농구장에서 지칠 때까지 슛연습을 하거나, 흐린 날엔 집에서 탱탱볼을 튕겼다.
저녁 시간이 되면 옆 단지 상가를 지나 어머니의 퇴근길을 마중 나갔다. 하늘은 발갛게 물이 들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상가건물 빵집에서는 소보로 익는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지친 내색 없이 맑은 미소로 내게 다가왔다. 가끔 속이 텅 비어있는 공갈빵을 사주셨는데, 앙금이 가득 찬 것처럼 배가 불렀다. 떠나 온 이후에도 종종 그곳을 찾곤 했다. 동네 사람들의 발길을 끌던 그 빵집이 생각나서, 정신없이 뛰어놀던 단지 한가운데 언덕이 그리워서.
지난달에 M동을 찾았을 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천 세대의 단지가 텅 비어 있었고, 동네 곳곳엔 부서진 건물 잔해와 파다가 만 땅, 코를 축 늘어뜨린 포클레인이 있었다. 재개발이 확정되어 사람들은 떠났고 놀이터는 고요했다. 상가에선 더 이상 빵 굽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추억이 새겨진 동네를 하나씩 잃어가는 것도 나이 듦의 일부이겠구나, 생각했다. 익숙한 공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얘기하는 날들이 앞으로도 참 많겠구나. 더 담담해져야만 하겠구나.
“어디 사람이세요?”
“아, 저는 S시 사람입니다.”
S시는 태어나고 자라서 다른 도시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쭈욱 살았던 곳이다. 그곳을 떠난 지 10년도 넘게 흘렀지만, 여전히 내겐 ‘우리 동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S시엔 여전히 가족과 친척들이 살고 계신다. 그래서 종종 가게 되는데, 일부러 오래 살았던 동네를 지나가며 슬쩍 바라본다. 다행히 대부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훌쩍 뛰어넘어 다녔던 낮은 담벼락에 빼곡했던 낙서는 대부분 바보, 멍청이 같은 유치한 단어 앞에 나와 친구들의 이름을 붙였다. 몇 차례나 덫칠했을 담벼락과 낙서 속 이름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 흩어졌지만, 동네 친구들 모두 약속한 듯 모여 팽이를 치던 관리사무소 앞 대리석 바닥과 얼음 땡을 하다가 꽈당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철철 났던 공원 내리막길은 여전하다.
동네 빵집에 들러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빵을 샀다. 개념이 부족했던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시식코너의 빵을 하나씩 먹고 나오는 짓을 게임이랍시고 했다. 그때는 완벽히 속였다며 키득거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번도 면박을 주지 않으셨던 빵집 주인분의 따스함 덕에 유년 시절의 상처 하나를 아낀 것 같다. 지역의 자랑일만큼 맛도 좋은 곳이지만 지금도 그 빵집에 갈 때 마다 빵을 잔뜩 사곤 한다. 그 때 어른들이 베풀어주신 너그러움에 작은 보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빵집 뒤로는 동네에서 가장 큰 놀이터가 있다.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미끄럼틀과 허술한 정글짐, 철봉, 시소 등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뭘 하고 놀았는지. 거추장스러워서 잠깐 벗어 놓은 오리털 점퍼를 깜빡 잊고 집에 돌아왔다가 엄마가 옷 찾을 때까지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남매가 쪼르르 쫓겨났던 어느 날 저녁도 이 놀이터에 있었다.
놀이터 아래 상가에는 아이들보다 더 장난끼가 넘치던 문구점 아저씨가 계셨다. 동전을 넣고 뽑기를 돌리면 늘 옆에서 "뭐 좋은 거 나왔냐? 에이 시시한 거 나왔네." 이런 식의 말을 걸며 약을 올리셨지만 언제나 주머니에서 100원을 꺼내 주시고는 다시 뽑으라 하셨다. 도서 대여점, 학원 차를 기다리던 정류장, 떡볶이집, 비디오가게. 사라지거나 남겨진 조각들의 흔적이 여전히 우리 동네 곳곳에 떨어져 있다. 흐릿해서 더 그리운 풍경이기에. 영원히 맞추고 싶지 않은 퍼즐처럼.
(이 글을 쓴 뒤 얼마 안 있어 우리 동네는 재개발을 시작했다. 폐허가 된 곳에 서서 미처 보내지 못하고 붙잡아두었던 오래된 마음들을 놓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