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스물둘이었다. 육군 보병으로 평범하게 군생활을 했다. 처음엔 상당히 힘들었다. 여전히 혐오하는 상명하복의 극단적 남성 문화에 적응하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첫 휴가를 나오기 전까지, 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마다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했다.
첫 휴가 때 우리 집엔 나보다 세 살 위의 사촌 형이 잠시 머물고 있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집에 머물다 보니 조용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형은 나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가 전화로 힘들다는 얘기를 계속하다 보니, 부모님께서 많이 속상해하신다는 거였다. 스쳐가듯 나눈 대화였는데 내게는 그게 참 무겁게 다가왔다. 나 자신이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그걸 듣는 부모님은 어떤 마음일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나 자신을 아주 작게, 조그만 티끌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때부터였다. 어른이 어른을 대하는 방식으로 부모님을 대해야겠다. 상대를 배려하는 필터링된 솔직함, 사회적 위치를 고려한 말투와 태도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필요한 것이구나. '아빠'는 '아버지'로, '엄마'는 '어머니'로 바꾸었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스무 해 넘게 써왔던 반말을 버리고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상징 그 이상이다.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도 단어와 말투가 바뀌듯 달라졌다. 나의 부모님은 그리 세심한 분들은 아니어서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언제부터 달라졌는지 어쩌면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건, 내게 중요한 변화였다. 태도의 변화는 선택에도 영향을 끼쳐서, 그날 이후 내 삶의 선택에는 부모님의 영향력이 아주 작아졌기 때문이다. 좀 더 내 멋대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게 난 마음에 들었다.
"신혼도 좋고 남편도 좋고 다 좋은데, 집에 엄마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
신혼 시절에 친구들을 만나면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진심을 담뿍 담았었다. 결혼 전까지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았다. 집을 나와 살림을 꾸리고 보니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생활에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음을. 아주 작은 구석마저 그랬다. 이를테면 수박이 그렇다. 왜 갑자기 수박 얘기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름철 모자람 없이 먹던 수박 역시 엄마의 존재감을 강하게 담고 있었다.
집에는 언제나 과일이 풍족했다. 냉장고를 열면 늘 제철 과일이 있었다. 네모 납작한 유리그릇에 예쁘게 손질된 채. 난 늘 아무 생각 없이 꺼내 먹곤 했던 것 같다. 요즘이야 1인 가구, 2인 가구가 많아서 마트나 백화점에서 수박을 손질해서 소량씩 팔곤 했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이 오면 엄마는 늘 부지런히 수박을 쪼개고 자르고 또 잘랐다. 껍질을 제거한 뒤, 빨간 알맹이만 한입 혹은 두 입에 나눠 베어 먹을 만큼의 사이즈로 깍둑썰기 하셨다. 냉장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수박은 엄마의 수박 해체 시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비워지곤 했다.
결혼 후, 호기롭게 수박 한 통을 사서 집에 왔다. 수박을 도마에 올려놓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단단했다. 수박을 반으로 쪼개는 것부터 쩔쩔맸다. 껍질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제법 힘이 들어가는 칼질을 했더니 양손에 힘이 안 들어갔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엄마가 그러셔 듯 네모 반듯한 통에 담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뿌듯했다. 그런데 나와 남편뿐인 신혼집에서조차 냉장고 속 수박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돌아서고 나니 다시 수박을 사서 잘라야 했다.
그날의 수박 한 통 썰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비싸고 양 적고 기분 탓일지 몰라도 왠지 맛도 부족한 듯한 잘린 수박을 사서 먹게 되었다. 올해 여름이 왔다. 여전히 우리 집 냉장고에는 수박이 없다. 바깥에서나 얻어먹게 된 귀한 수박. 수박을 볼 때마다, 나보다도 작은 몸집의 엄마가 커다란 수박을 두 동강 내며 쓱쓱 썰던 주방과 칼이 도마가 맞닿을 때마다 나던 호쾌한 리듬이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