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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Oct 10. 2024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노력하겠다는 말은 도망칠 통로를 만들어두는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다

애인을 여러 번 실망시켰다. 주로 돈 때문이었다. 계속 그에게서 돈을 빌리기만 하고 제대로 못 갚는 상황이 이어지자, 그의 태도가 전에 없이 단호해졌다. 나는 말했다. 미안해. 앞으로는 정말 그러도록 노력할게. 그러자 애인은 이렇게 답했다.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그 말을 해주고 싶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력하겠다는 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내가 즐겨 사용하는 변명이었다. 그 말은 실패하기에 앞서 도망칠 통로를 미리 만들어두는 말이었다. 난 '하겠다'고 한 적 없어. 그냥 '노력하겠다'고 했지. 난 노력했어, 최선을 다했어, 근데 안 된 거야. 그런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자기합리화의 연속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거였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정신승리를 하는 거였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 전혀 달라지지 못한 나, 나쁜 습관을 개선하지 못한 나를 보면서 늘 중얼거렸다. 괜찮아, 난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해?


'최선'과 '노력'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애매하다. 무엇이 최선일까. 어느 정도로 애써야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 애매함에 기대어 많은 것들을 회피하고 변명해왔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마저 그러고 있었다.


노력하겠다는 말은 편하다. 실패를 노력의 부족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노력이 아니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로이다. 적어도 진짜로 해내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노력하겠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 그저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학 공부를 시작했고, 가계부를 썼다. 노력하겠다는 말은 마음속으로 삼킨 채 해야 하는 일들을 묵묵히 했다.


나는 살면서 늘 지각을 하는 사람이다. 항상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무언가를 잃은 뒤에야, 처절한 대가를 치른 뒤에야 깨닫고 변화한다. 이번에도 내가 치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대가를 치르고 나야만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유감이지만, 실패하고 넘어지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데에 일단은 의의를 두고자 한다. 자학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글에서는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애썼고,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착실히 쌓여가던 카드빚을 더는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살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나를 해치기 위한 무기처럼 보였다. 주방에는 어쩜 그리도 위험한 물건이 많은지, 빨래를 할 때마다 세제를 마셔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싸워야 했다. 애인은 내가 그런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애인이 해준 말은 이거였다.


"죽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런데 죽을 거라면 확실하게 결단해야 하고, 그러지 않을 거라면 제대로 살아야 해."


희한하게도 그 말이 정말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면의 무언가가 부서지며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삶에 대해 진지하게 임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은 웬만해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카드론'이라는 선택지를 골라 4000만 원이라는 빚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만큼 내 삶에 애착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이 잘못되면 언제든 죽어버리면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이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를 믿어준 사람에게 보답해야만 하니까. 실패하더라도 진지하게 부딪혀보고 싶어졌다.


나는 여전히 초라한 신용불량자다. 서른 해나 살아오고도 그 무엇도 이루거나 만들어낸 게 없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수학 공부를 하고, 그 과정을 글로 옮기는 동안 내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의 나와 시작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전의 내가 한 잘못된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거였다. 내가 가진 문제들이 언뜻 보기에는 모두 다른 문제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동일한 원인에서 출발한 문제였음을 이제야 알았다.


노력하겠다는 말은 변명일 뿐이므로, 나는 더는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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